주간동아 598

2007.08.14

장난감 놀이요? 장난 아니고 취미예요!

성인들 로봇·인형·레고 즐기기 붐 … 구입에 수십만원씩 쏟아붓는 마니아도 많아

  •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입력2007-08-08 1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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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난감 놀이요? 장난 아니고 취미예요!

    ‘로보트 태권V’ 피겨(맨 왼쪽)와 건담 시리즈 제품을 튜닝한 피겨들.

    장난감을 모으는 어른들

    장난감 [명사]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여러 가지 물건.≒ 완구(玩具).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장난감은 과연 아이들만을 위한 물건일까. 요즘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커피점 사장 한결(공유 분)은 장난감, 특히 레고 마니아다. 드라마 속 그의 집은 2007년 신판 레고 캐슬세트, 로봇, 인형 등 장난감으로 가득하다. 서른을 코앞에 둔 어른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이 신기하다고? 그러나 장난감을 좋아하는 어른이 비단 드라마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적지 않은(?) 나이의 장난감 마니아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26세 회사원 강모 씨는 브라이스를 ‘키운다’. 커다란 머리에 큰 눈을 가진 브라이스는 구체관절인형과 함께 성인 마니아층에게 사랑받는 인형이다. 수집가들은 보통 인형 주인을 ‘오너’, 인형을 ‘아가’라고 부르는데 4년 전 친구의 브라이스를 보고 반해 수집하기 시작한 강씨는 현재 다섯 명의 ‘아가’를 키우는 ‘오너’다.

    “사실 저는 마니아라고 하기도 어려워요.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에 가보면 진열장에 브라이스를 가득 채워놓은 사람들도 많거든요.”



    강씨는 10만원대인 브라이스 인형 5개 말고도 한 벌에 2만~4만원인 수십 벌의 브라이스 의상, 옷걸이·흔들의자 등의 가구와 가방, 구두, 목걸이, 귀고리, 선글라스 같은 액세서리를 구입했다. 사는 것 외에도 본인이 직접 만들어 입히거나 꾸미고, 파스텔 등으로 화장을 시키기도 한다. 로봇 수집 취미를 가진 남자친구 최모(31) 씨와 데이트할 때는 각자의 수집품인 브라이스와 로봇 프라모델(플라스틱 모델) 모형을 가지고 나와 사진 찍기를 즐긴다고 한다.

    “어렸을 때 인형놀이를 좋아했는데, 그것을 다시 하게 되니 즐거워요. 또래 친구들은 인형수집을 하나의 취미로 생각할 뿐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아요.”

    강남에서 PC방을 운영하는 27세 김모 씨는 건담 로봇 마니아다. 그의 가게에는 수백 종의 건담이 진열돼 있다.

    “지난해부터 (건담 프라모델 수집을) 시작했어요. 처음엔 어렸을 때 장난감 로봇을 조립하던 추억 때문에 사게 됐어요. 그러던 것이 나중에는 건담 자체가 워낙 정교해 수집의 길로 빠지게 됐죠. 현재 수입의 30% 이상을 건담 구입에 쏟는데, 마니아 중에는 저 같은 사람이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김씨가 열광하는 건담의 경우 성인 남성 마니아가 많은 대표적인 상품이다. 가격은 5000원부터 40만원대까지, 기성제품을 튜닝한 수제품의 경우 100만원을 훌쩍 넘는 것도 많다. 건담 프라모델을 제작 판매하는 일본 반다이사 관계자는 “성인 마니아층이 두껍게 형성돼 있어 고가 제품도 따로 마케팅할 필요가 없을 만큼 잘 팔린다”고 밝혔다.

    “건담 모형을 한두 개 이상 가지고 있는 분들을 포함해 유저층을 20만명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건담은 특히 30대 남성 마니아가 많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른이 장난감을, 그것도 비싼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아 잘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가격과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장난감에 열광하는 성인들은 점차 늘고 있다. 인터파크 등 온라인 쇼핑몰은 최근 성인 마니아층을 겨냥해 프라모델 전용숍을 열었다. 인터파크의 이지현 게임·취미 담당 매니저는 영화 ‘트랜스포머’로 인기를 끈 로봇을 예로 들면서 “10, 20대 프라모델 마니아뿐 아니라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전 연령층이 구입해 저변이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장난감 놀이요? 장난 아니고 취미예요!

    최근 20, 30대 장난감 마니아가 증가하고 있다.<br> 브라이스 인형을 들고 있는 여성(왼쪽)과 프라모델 전문점을 찾은 남성.

    장난감, 놀잇감과 예술품 사이

    성인 장난감 애호가들은 아이와 어른의 합성어인 키덜트(kidult)로 불리기도 한다. 실제로 상당수의 장난감 애호가들은 장난감을 통해 “나이를 잊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피터팬 콤플렉스’라기보다 하나의 ‘취미’에 가깝다. 대기업 마케팅팀에서 일하는 이은정(36) 씨 역시 마찬가지다.

    “장난감이 나이를 잊게 해주는 측면은 있어요. 하지만 그저 취미의 하나로 봐야 할 것 같아요. 제 경우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나 SF영화 속 등장인물의 모형을 구입하는데, 다른 수집과 차이가 없어요.”

    만화가이자 장난감 전문 수집가인 현태준(41) 씨는 장난감 수집이 동심에 젖어 하는 행동은 아니라고 말한다.

    “비싼 미술품에서 생활 속의 장난감까지 감상 범위가 넓어졌다고 봐야죠. 장난감 자체가 가볍고 웃기면서도 예쁘잖아요. 특히 요즘 장난감은 인체 비례나 움직임이 매우 정교해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없어요. 실제로 장난감과 예술작품의 경계가 무너지는 측면도 있고요. 한 예로 일본 팝아트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의 작품은 몇억원을 호가하지만 분위기는 장난감 같거든요.”

    더불어 성인용 장난감은 어린이용 장난감에 비해 구조가 복잡한 편이다. 또 같은 종류의 장난감이라도 활용법에서 차이가 있다. “프라모델을 좋아하다 보니 취미가 직업으로 연결됐다”는 웹진 ‘튜닝타임즈’ 김두영 편집장은 인형이나 프라모델의 조립·수집·튜닝 같은 행위를 ‘애들 장난질’로 보는 시각을 경계했다.

    “프라모델 튜닝의 경우, 제대로 작품을 완성하려면 플라스틱을 더하고 깎고 다듬고, 색을 새로 입히는 등 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결과물의 디자인만 봐도 굉장히 격이 있고요. 그런데 사회적 인식은 ‘장난감을 만드는 이상한 어른들’로만 굳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이 아쉽죠.”

    장난감의 발전은 선진국의 척도?

    이런 장난감 폄하(?) 분위기 탓인지 국내 장난감 시장은 협소하다. 반다이사 제품이 70~80%를 차지해 ‘한국은 반다이 조선 총독부’라고 불릴 정도로 제대로 된 국산 제품이 부족한 실정이다. 8월15일 국내 최초로 국산 피겨(프라모델의 일종·영화나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모형) 로보트태권브이를 출시하는 ㈜로보트태권브이 장순성 실장은 “장난감 산업이 발전해야 선진국”이라는 말로 장난감 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장난감이 발전한 나라는 앞선 디자인 기술과 제조능력, 어린이를 배려하는 민도가 뒷받침돼 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렇게 앞선 기술력과 문화에서 생산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은 창의력 면에서 앞설 수밖에 없습니다.”

    장 실장은 장난감 산업이 중요함에도 “당장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소홀히 했다”며 아쉬워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구매력 있는 성인 마니아층의 증가가 장난감 시장을 확대해 산업 발전까지 이끌 수 있다”며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문화평론가 진중권 교수(중앙대)는 성인 장난감 마니아의 증가에 대해 “성인과 아동의 구분이 모호해진 시대, 신화나 동화적 사유가 압도하는 사회적 맥락과 일치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런 분위기가 “유아적 코드로 퇴행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상상력이 싹튼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평생 소년의 호기심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합리적 사유능력에 상상력과 창조력이 더해지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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