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71

2017.01.11

르포 | 서울 노량진 학원가 ‘공시생’의 신정 나기

“새해는 없다, 시험만 있을 뿐”

공무원시험 응시생 70만 명 중 5만 명 노량진 상주…“올해가 마지막” 매번 못 떠나

  •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입력2017-01-06 17: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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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일, 공무원시험 준비 학원이 몰려 있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로는 한산했다. 수험서를 파는 서점 앞에서 마주친 김모(31) 씨는 “크리스마스나 신정(새해 첫날) 같은 기념일은 바깥에서나 의미 있는 날이지 노량진에서는 평소와 같은 일요일일 뿐”이라며 발길을 재촉했다.

    새해 첫날부터 책을 편 공무원시험 준비생(공시생)은 김씨 외에도 많다. 2016년 한 해 공무원시험에 응시한 인원은 약 70만 명. 같은 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수험생의 수(약 60만 명)를 훌쩍 넘어섰다. 정부가 채용하는 공무원 수도 늘고 있지만 지원자가 느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공시생 간 경쟁은 해마다 치열해지고 있다. 경쟁률이 오르는 만큼 합격 문은 점점 더 좁아져 공시생은 쉽사리 노량진을 떠나지 못한다. 이들에게 공무원시험은 안정적인 미래를 위한 ‘마지막 기회’다.



    “누군가와 말한 지 오래됐다”

    신정 아침 노량진로에 모습을 보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잰걸음으로 학원 건물로 들어갔다. 2년째 7급 행정직 공무원을 준비하는 정모(28) 씨는 “일요일은 학원 수업이 없는 날이다. 학원에는 자습하러 오는 것이라 대로변에 나오는 공시생은 드물다”고 말했다. 한산한 대로변을 지나 공무원시험 준비 학원이 몰려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자 비로소 사람이 많이 보였다. 작은 골목 안은 식당, 카페 같은 음식점과 스터디룸 등 학습시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식사시간이 아니라서 음식점은 한산했지만 스터디룸은 공시생으로 붐볐다. 스터디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박모(25) 씨는 “1월 1일이라지만 여느 주말과 다름없이 손님이 많다”고 말했다. 상가 골목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자 구석구석에 독서실이 숨어 있었다. 거리에 인적이 드문 이유는 공시생들이 독서실에 콕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독서실 신발장마다 신발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노량진 골목에서 6년간 식당을 운영해온 장모(48·여) 씨는 “국경일, 공휴일에도 공시생들은 식사시간 외에는 고시원이나 학원에 박혀 있는 것 같다. 식사시간에는 손님이 줄을 설 정도로 장사가 잘되지만 식사시간이 지나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골목처럼 조용하다”고 말했다. 노량진 학원가에는 9급, 7급 행정직 공시생 외에도 초·중등 임용고시와 경찰직, 소방직 공무원시험 준비생 등을 위한 학원이 즐비하다.



    인사혁신처와 행정자치부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5~9급 공무원시험에 응시한 인원은 총 70만6540명. 이 중 노량진에만 학원업계 추산 5만여 명이 머물고 있다. 이들은 불철주야 공부하며 공무원의 꿈을 키우지만, 높은 경쟁률로 합격이 쉽지 않다. 지난해 10월 지방직 공무원 7급 공채 경쟁률은 122 대 1에 달했다. 또 지난해 4월 4120명을 채용하는 국가직 9급 공채 시험에는 응시자 22만1853명이 몰렸다. 2년째 9급 일반행정직을 준비 중인 서모(29) 씨는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자 노량진에 들어온 뒤 한 번도 고향인 경남 창원시에 내려가지 못했다. 서씨는 “매년 응시자가 늘어 경쟁률이 높아지다 보니 마음이 초조해 본가에 내려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매달 생활비와 학원비를 지원해주는 부모님에게 죄송해 올해는 꼭 합격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말했다.  

    노량진 학원가를 걷는 공시생은 대부분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귀에 이어폰을 꽂거나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바닥을 보며 빠르게 걸었다. 이들이 이어폰을 빼고 느리게 걷는 지점은 언덕길 진입로였다. 언덕길 사이사이에는 고시원과 자취방이 늘어서 있었다. 집 근처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이들은 이어폰을 뺀 뒤 휴대전화를 꺼내 가족이나 친구와 통화했다. 대학 2학기 종강과 동시에 노량진에 들어와 중등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다는 임모(25·여) 씨는 “사람과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며 “임용고시에 합격한 선배들이 수험생활을 하면서 가장 피해야 할 것이 인간관계라고 조언해줬다. 친구를 만들고 같이 어울리다 보면 공부할 시간이 모자라 결국 낙방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인사혁신처가 공시생 22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83.6%가 ‘수험생활을 하며 인간관계를 포기하고 있다’고 답했다.



    나가는 자, 들어오는 자

    이들이 인간관계까지 포기하면서 공무원시험에 몰두하는 건 안정된 직장에 취업할 수 있는 ‘공평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대학생 578명을 대상으로 그 이유를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0.1%가 ‘고용 안정성’을 꼽았다. “공무원시험에서는 성별도, 학벌도, 학점도 중요하지 않다.” 서울 명문대 졸업을 앞두고 노량진에 들어온 최모(23·여) 씨가 한 말이다. 최씨는 “동기나 선배들을 보면 여자라는 이유로 취업 전선에서 고배를 마시는 경우가 빈번하다. 게다가 출산휴가라도 내면 경력 단절로 이어지는 사례가 많다는 얘기도 들어 공무원시험 준비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2년째 경찰직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인 김수영(30) 씨는 디자인 관련 중소기업에 취업했다 1년 만에 그만뒀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야근수당 등을 다 챙겨준다는 얘기를 믿고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당은커녕 야근만 많았다. 월급으로 손에 쥐는 돈도 160만 원 남짓이었다. 계약과 다르다고 사장에게 따져봤지만 ‘이 업계가 좁다. 앞으로 이 일을 하지 않을 작정이냐’는 협박만 돌아왔다”고 말했다. 김씨는 “사실상 대기업 취업이 어려운 지방 사립대 졸업생에게 공무원시험은 인간다운 미래를 위한 마지막 보루”라고 밝혔다.

    노량진 공시생은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온다. 인터넷 강의 등이 발달해 지방에서도 공무원시험을 준비할 수 있지만 굳이 노량진으로 올라와 좁은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것. 1년째 유아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윤지현(24·여) 씨도 전북 전주시가 고향이다. 윤씨는 “집에서 혼자 일정을 관리하며 공부할 자신이 없어 여기로 왔다. 함께 시험 준비를 하는 경쟁자들의 모습을 보면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된다”고 말했다.

    새해 첫날 마음을 다잡고 노량진에 새로 들어온 공시생도 종종 눈에 띄었다. 이들은 대부분 부모와 함께 큼지막한 가방을 끌고 자취방이 즐비한 골목으로 향했다. 노량진에서 복사 전문 인쇄소를 운영하는 이모(45) 씨는 “합격, 시험 포기 등으로 해마다 꽤 많은 공시생이 노량진을 떠나지만, 그만큼 새로운 공시생이 또 들어온다. 그 덕분에 장사가 잘되는 것은 좋으나 오랜 기간 공부하느라 고생하는 공시생들을 볼 때면 측은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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