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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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의 문학적 독창성 “이건 아니잖아”

후대 연구가들 높이 평가하지만 실제론 양명좌파와 공안파 사유 빌려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입력2007-01-10 17: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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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암의 문학적 독창성 “이건 아니잖아”

    박지원의 ‘국죽도’(위)와 초상화.

    시(詩)는 자하(紫霞)에게서 망했고, 문(文)은 연암(燕巖)에게서 망했으며, 글씨는 추사(秋史)에게서 망했다는 말이 있다. 한시는 자하 신위(申緯)에게서 더 나아갈 경지가 없어졌고, 산문은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에 와서 정점에 이르렀으며, 서예는 추사 김정희(金正喜) 이후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나에게 이 말은 범재의 슬픔으로 들린다. 천재 뒤에 태어나는 범재들에게 오를 수 없는 경지는 곧 절망이기 때문이다.

    절망의 대상은 언제나 위대한 법이다. 나는 연암의 산문과 ‘열하일기’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본 적이 없다. 모든 연암 연구자들은 예외 없이 연암의 위대함을 말한다. 어떤 연구도 그의 위대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20세기 이후 연암을 연구한 모든 연구물은 ‘연암은 위대하다’라는 짧은 문장의 무한한 반복이다.

    저서에 독서 이력 거의 안 밝혀

    연암의 위대함은 그의 독창성에서 왔다고 말한다. 연암의 위대함에 말참견을 할 수 없듯, 그의 독창성 역시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불경스럽게도 그 독창성이 의심스럽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연암이란 말인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연암의 문학 역시 시대의 산물, 곧 그 시대 문학담론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말해 그 문학담론을 이루는 책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연암은 어떤 책을 읽었던가? 존 로크(John Locke)는 인간의 대뇌를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즉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흰 종이라고 말했다. 백지인 연암의 대뇌에 입력된 책은 어떤 것이었던가. 도대체 그의 위대한 산문을 가능하게 한 외부의 사유, 곧 책들은 어떤 것들이었던가.

    연암과 가까웠던 이덕무의 문집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를 보면, 이덕무의 독서 이력을 손바닥 보듯 환히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연암집’을 이 잡듯 뒤져보아도 그의 독서 이력은 오리무중이다. 그가 남긴 문자에서 타인의 저작이 남긴 흔적은 찾기 어려운 것이다.



    연암은 1780년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로 베이징(北京)에 파견되자 자제군관으로 동행한다. 홍대용보다 15년 뒤, 이덕무보다는 2년 뒤에 중국 땅을 밟았던 것이다. 베이징에서의 일정은 홍대용이나 이덕무와 다를 것이 없었다. 베이징 시내를 구경하고, 홍대용과 이덕무 등이 구축한 인맥을 따라 중국인과 필담으로 대화를 나눈다. 이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에 더 말하면 사족이 될 뿐이다.

    연암 역시 유리창을 방문했다. 이덕무가 박지원에게 자랑했던 도옥(陶鈺)의 오류거(五柳居)를 맨 먼저 찾는다. 하지만 이덕무와 달리 연암은 유리창과 오류거의 책에 대해서 감탄하는 말을 남기지 않는다. 다만 그는 유리창에서 이렇게 말한다.

    연암의 문학적 독창성 “이건 아니잖아”

    박지원의 ‘열하일기’.

    수레를 몰아 정양문을 나왔다. 유리창을 지나며 “이 창(廠)이 몇 칸이나 되는가?” 하고 물었더니, 어떤 사람이 “모두 27만 칸입니다” 하였다.

    대개 정양문부터 선무문까지 거리 다섯이 모두 유리창이었고, 세상의 모든 보화(寶貨)가 쌓여 있었다. 나는 한 누(樓)에 올라가 난간에 기대어 탄식하였다.

    “이 세상에 나를 진정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한이 없으리라. …지금 나는 유리창 가운데 홀로 서 있다. 나의 옷과 갓은 천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고, 나의 수염과 눈썹은 천하 사람들이 처음 보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반남(潘南·연암의 본관)의 박(朴)씨는 천하 사람들이 들어본 적 없는 성일 터이다. 내가 이에 성인도 되고 부처도 되고 현자도 되고 호걸도 되며, 그 미친 경지가 기자(箕子)나 접여(接輿)와 같다 한들 장차 그 누구와 천하의 지락(至樂)을 논할 수 있으리오?”

    해설해야 할 부분이 있지만, 그럴 겨를이 없다. 덮어두자. 연암은 광대한 유리창에서 선각자의 고독감을 토로한다. 책벌레 이덕무와 차원이 다르다. 이덕무는 유리창에서 허겁지겁 책 목록을 베꼈지만, 박지원은 책에 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다. 이제 그가 읽었던 책들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열하일기’에는 연암이 읽었던 책 이름이 간헐적으로 나온다. 이 단편적 자료를 실마리 삼아 그의 사유에 결정적인 충격을 주었던 책을 추적해보자.

    연암은 1780년 7월 초 통원보(通遠堡)란 곳에서 며칠을 묵는다. 연일 쏟아지는 비에 길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답답하여 말벗이나 찾을 요량으로 근방을 수소문한 끝에 부도삼격(富圖三格)이란 만주인 출신 훈장을 만나보니, 지식도 없고 인격도 용렬하다. 더 이상 마주할 생각이 없어 일어서면서 소일할 책이나 좀 빌려달라고 한다. 부도삼격은 다른 책은 없고, 자신의 아버지가 예전에 베이징 유리창에 명성당(鳴盛堂)이란 서점 겸 출판사를 내었던바, 그때 판매하던 책의 목록이 있다면서 진짜 청심환과 조선 부채를 주면 그 목록을 보내주겠다고 한다. 한심했지만 물건을 보내고 목록을 받아보니 빤한 내용이다. 보낸 물건이 아까워 목록을 베껴둔다. 50종 남짓한 책은 명·청대 저작들인데, 양명좌파 이탁오(李卓吾)의 ‘분서(焚書)’와 ‘장서(藏書)’ ‘속장서(續藏書)’, 반(反)주자학자였던 모기령(毛奇齡)의 ‘설림(說林)’ ‘서하시화(西河詩話)’, 고증학의 기원이 되었던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과 ‘북평고금기(北平古今記)’ 등 명·청대의 신사고(新思考)를 담은 저작이 포함돼 있다. 또 청대 문단과 사상계를 수놓았던 이어(李漁)·주이존(朱彛尊)·장조(張潮)·육롱기(陸其) 등의 저작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연암의 발언이다. 그는 이 책들은 이미 조선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그는 이런 책을 위시한 명·청대의 신사고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명·청대 신사상 소상히 파악

    국립중앙도서관에 ‘공작관고(孔雀館稿)’라는 책이 소장돼 있다. 이 책은 목판으로 찍은 오사란(烏絲欄), 곧 원고지에 쓴 것인데, 판심에 ‘연암산방(燕岩山房)’ 넉 자가 인쇄돼 있다. 연암은 1771년 백동수와 함께 황해도 금천군 연암협을 답사해 이곳에서 은거할 뜻을 굳혔다. 자호를 연암이라 한 것도 이 시기에 와서다. 이 책은 적어도 이 시기 이후에 만든 연암의 개인용 원고지로 엮은 것이다. ‘공작관고’란 이름도 흥밋거리다. ‘공작관고’란 이름은 1793년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공작관이라는 정자를 지은 데서 나온 것이다(‘燕巖集’ 3권이 ‘孔雀館文稿’다). ‘연암산방’과 ‘공작관고’란 말은 연암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문자다. 이로 보아 이 책은 연암이 자신이 읽을 목적으로 직접 필사한 것이다.

    연암의 문학적 독창성 “이건 아니잖아”

    경남 함양군 안의면 안의초등학교에 있는 박지원 사적비. 안의초등학교 교정은 박지원이 안의현감으로 재직한 안의현청이 있던 자리다.

    그렇다면 이 책의 내용은 무엇인가. 연암의 자작 시문이 아니고, 김성탄(金聖嘆)의 ‘서상기’에 대한 비평과 원굉도(袁宏道)의 문학비평을 모은 것이다. 김성탄은 청대의 문인이자 비평가다. 그는 ‘수호지’와 ‘서상기’ 등에 독특한 비평을 가했던바, 이 비평은 과거의 고문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던 산문창작론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즉 신흥 장르인 소설의 글쓰기가 어떤 특징을 갖는지를 명징하게 제시했던바, 이것은 역으로 고문의 창작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더욱 문제적 인물은 원굉도다. 원굉도의 스승은 ‘분서’의 지은이 이탁오다. 이탁오는 알다시피 양명좌파다. 그는 주자학이 말하는 절대진리 ‘리(理)’를 해체하고 거부한다. 어떤 초월적 원리와 중심도 인정하지 않는 이탁오의 사상이 문학으로 전화(轉化)한 것이 원굉도의 문학비평이다. 원굉도 이전 중국 문단은 진(秦)나라 이전의 산문과 한(漢)나라의 산문을 전범으로 삼아 산문을 창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파, 곧 의고문파(擬古文派)가 있었다. 의고문파가 문단을 휩쓸자, 이에 반대해 당나라와 송나라의 산문을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유파, 당송파가 등장했다. 당송파의 주장은 의고파의 주장에 비해 설득력이 있었지만, 이 역시 당·송 산문이란 전범을 설정한다는 점에서는 의고파와 다를 바 없었다. 여기에 이탁오 사상의 세례를 받은 원굉도가 등장한 것이다. 원굉도는 숱한 비평문에서 절대적 전범은 존재하지 않으며, 문학은 오로지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사유와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탁오가 절대진리 ‘리’를 부정했듯, 그는 절대전범의 설정을 부정했던 것이다. 이로써 문학의 언어는 이제 고전의 압력으로부터 해방됐다. 연암은 ‘공작관고’에 원굉도의 혁명적 비평관을 담은 ‘서소수시(敍小修詩)’ ‘서진정보회심집(敍陳正甫會心集)’ ‘설도각집서(雪濤閣集序)’ ‘서죽림집(敍竹林集)’ 등을 베껴놓고 있다. 연암의 문학과 비평이 원굉도의 영향권 안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연암집’의 어디에도 원굉도에 관한 언급은 없다. ‘공작관고’ 하나만으로 연암이 원굉도의 사유를 수용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한가. 연암과 문학관에서 대립적 위치에 있었던 유한준(兪漢雋)의 아들 유만주(兪晩柱)가 쓴 일기 ‘흠영(欽英)’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그(燕巖)는 스스로 문장을 이렇게 자부했다.

    “나의 문장은 좌구명과 공양고를 따른 것이 있으며, 사마천과 반고를 따른 것이 있으며, 한유와 유종원을 따른 것이 있으며, 원굉도(袁宏道)와 김성탄(金聖嘆)을 따른 것이 있다. 사람들은 사마천이나 한유를 본뜬 글을 보면 눈꺼풀이 무거워져 잠을 청하려 하지만, 원굉도와 김성탄을 본뜬 글에 대해서는 눈이 밝아지고 마음이 시원하여 전파해 마지않는다. 이에 나의 글을 원굉도와 김성탄의 소품으로 일컬으니, 이것은 사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는 자신이 ‘공양전’과 ‘곡량전’을 본떠 쓴 ‘음청권수’의 서문을 보여주며, “이것은 고문이다” 하였다.

    평가하건대, ‘공양전’과 ‘곡량전’을 본뜬 것은 아름답지 않고, 김성탄과 원굉도를 본뜬 것은 아름다우니, 이것은 그의 재주가 김성탄의 문장에는 빼어나지만, 순고(純固)하고 정대(正大)한 문자에는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연암 자신이 자기 문체의 한 근거로 원굉도와 김성탄을 꼽는다. 앞서의 추측과 불확실한 증거들은 이제 연암 자신의 발언으로 정확성을 얻게 됐다.

    “산문은 독창적 사유를 개성적 언어로 바꿔야”

    연암의 시대에 조선 문단은 앞서 말한 의고파와 당송파의 산문 창작이론이 들어와 유행하고 있었다. 여기에 연암의 비평이 출현했다. 그는 어떤 시대의 산문을 표준으로 삼는 것 자체가 이미 모방과 표절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고, 또 사실 모방과 표절로 떨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산문은 작가의 독창적 사유를 개성적 언어로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주장을 자신의 산문 작품으로 실천했다. 오늘날 독서 대중이 열광하는 연암의 산문 그리고 ‘열하일기’는 그 실천의 산물인 것이다.

    하지만 물어보자. 연암의 이 주장은 어디서 온 사유인가. 연암의 사유를 꼼꼼히 검토하면 양명좌파와 공안파의 사유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언어를 빌려오는 것을 표절이라 한다면, 사유의 틀을 통째 빌려오는 것은 뭐라 말해야 할 것인가. 연암은 독창을 말했지만, 그 독창을 설파하는 사유 자체는 남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하늘 아래 어디에 새로운 것이 있다던가. 제발 연암 사유의 독창성을 그만 말하라.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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