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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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이군 신념으로 하늘서도 모시리다”

故 정동열 비서관의 최 전 대통령 평생 보좌 ‘화제’ … 5공 때 장관직도 고사하고 측근 자처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7-01-10 1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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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사이군 신념으로 하늘서도 모시리다”

    대통령 재임 시절 민정 시찰에 나선 최규하 전 대통령.

    1964년, 두 사내의 첫 만남은 우연이었다. 말레이시아의 한국대사관에서 일하던 정동열(1932~2006) 전 대통령의전수석비서관은 64년 주 말레이시아 대사로 부임한 최규하(1919~2006) 전 대통령을 쿠알라룸푸르에서 처음 만난다. 이후 최 전 대통령은 정부에서 파견한 태권도 교관이던 정 전 수석의 사람됨에 매료됐으며 일찍 아버지를 여읜 정 전 수석은 최 전 대통령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최 전 대통령의 친척인 최서면(79) 국제한국연구원 원장은 “형(최 전 대통령)에게 외교관으로 성공한 이유를 물으면 ‘비서를 잘 두었고, 장가를 잘 갔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비서로 둔 것은 행운이었다’고 말하곤 했다”고 전한다. 최 전 대통령이 언급한 비서가 지난해 12월30일 별세한 정 전 수석이다.

    정 전 수석은 최 전 대통령이 외무장관으로 있던 1967~71년 장관 비서관을 지냈고, 최 전 대통령이 국무총리로 일할 때(76~79년)는 국무총리 의전비서관을, 최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에 있을 때(79~80년)는 대통령의전수석비서관을 각각 역임했다. 정 전 수석은 민족운동가 고당 조만식 선생의 외손자다.

    퇴임 후 집안 대소사 챙기며 한가족처럼 지내

    “고인에게 미안한 구석은 있는 모양이지.”



    “불사이군 신념으로 하늘서도 모시리다”

    고 정동열 의전수석비서관

    지난해 10월22일 최 전 대통령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정 전 수석은 조문 온 고건 전 총리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고 전 총리가 양지를 찾아 의리를 저버렸다는 뜻이었다. 정 전 수석은 최규하 정부에서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을 지낸 고 전 총리가 신군부 정권에 출사한 것을 곱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

    최 전 대통령 시절 대통령의전비서관을 지낸 신두순(68) 씨는 “형(정 전 수석)은 다른 비서관들과 달리 신군부가 제안한 공직에 일절 나가지 않았다. 퇴임하는 대통령을 따라 서교동 사저로 돌아간 다음 어떤 공직도 사양한 채 칩거하면서 역사의 죄인인 양 주유한 큰 사람이다”라고 회고했다.

    “정군(정 전 수석)에게 직접 들은 얘기인데, 전두환 정권이 정군에게 장관 자리를 제안했었답니다. 그런데도 정군은 20년 넘게 야인생활을 했죠. 정군은 최 전 대통령의 비서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평생 의를 지키고 세상을 떠난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요.”(최서면 원장)

    정 전 수석은 40여 년 동안 최 전 대통령의 참모이자 벗 그리고 식구였다. 1979년 12월21일 정 전 수석은 제10대 대통령 취임식을 마치고 돌아온 최 전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불사이군 신념으로 하늘서도 모시리다”

    ‘40년 사귄’ 주인을 따라 세상을 떠난 고(故) 정동열 전 수석의 빈소(좌).<br>1980년 제11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최규하 전 대통령.

    “각하, 오늘 대통령에 취임하신 것도 중요하지만 이곳을 어떤 모습으로 떠나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지난 역사를 볼 때 초대 이승만 박사를 비롯해 세 분 대통령 중 어느 한 분도 스스로 걸어서 이곳을 나간 예가 없습니다. 각하께서는 국민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신 전 비서관은 “형의 얘기를 들은 최 전 대통령은 담배 연기를 방 안에 가득 채우면서 긴 호홉을 했다. 그때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지는 안정된 국가건설에 신명을 다하리라 다짐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한다.

    그러나 출렁거리는 역사는 정 전 수석의 바람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의 범인을 체포하던 현장의 증인이었으며, 신군부의 하극상을 겪은 최 전 대통령을 측근에서 보좌한 정 전 수석은 1981년 8월 최 전 대통령이 민주적 헌정질서를 마련하지 못하고 사퇴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정 전 수석은 지난해 10월22일 최 전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도 늘 한결같았다. 최 전 대통령은 매일 아침 전화로 정 전 수석의 안부를 물었으며, 정 전 수석은 일주일에 세 번가량 최 대통령을 찾아가 말벗이 되었다. 명절 때는 몸이 불편한 최 전 대통령을 대신해 정 전 수석이 손님을 맞고 배웅했다.

    정 전 수석은 지난해 10월 최 전 대통령의 빈소를 나흘간 꼬박 지켰다. 5개월 전 다발성 골수종양 진단을 받아 치료를 받고 있으면서도 비서관의 도리가 그런 게 아니라며 그는 단 하루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최 전 대통령의 유족들은 이런 정 전 수석을 삼촌처럼 여기며 집안 대소사를 상의했다고 한다.

    “아저씨는 저희와 한가족이었습니다. 장남인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우리 집과 인연을 맺었는데, 우리 형제들은 그분을 삼촌처럼 여겼습니다. 엄하셨던 아버지껜 차마 말 못할 고민도 아저씨와는 상의하곤 했죠.”(최 전 대통령의 장남 윤홍 씨)

    같은 해 세상 하직 … 우연인가 필연인가

    정 전 수석이 그랬듯이 윤홍, 종석(차남), 종혜(딸) 씨 등 최 전 대통령의 자녀들 역시 정 전 수석의 빈소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켰다. 윤홍 씨는 “집안 어른이 돌아가셨는데 당연한 일 아니냐”고 되물었고, 차남 종석 씨는 “식구 같은 분”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조문객들은 최 전 대통령 가족의 극진함에 혀를 내둘렀다.

    정 전 수석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것은 최 전 대통령의 장례 때 무리를 한 직후부터였다. 골수암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는 앞으로 5년 정도는 더 살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난해 12월9일 치악산 구룡사에서 열린 최 전 대통령의 49재에 참석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정 전 수석은 치악산에서 가까운 강원 정선군의 한 병원으로 거소를 옮겼다.

    정 전 수석이 앰뷸런스를 타고 서울대병원에 실려간 것은 49재를 수일 앞둔 때였다. 최 원장은 “형님이 하늘에서 정군을 부른 건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신 전 비서관은 “형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어 최 전 대통령을 큰형님, 아버지처럼 생각했다”면서 “최 전 대통령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전한다.

    권력자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사람을 ‘측근’ 혹은 ‘참모’라고 부른다. 정 전 수석은 서구적 기능성을 품은 참모라는 말보다는 체온을 나눌 만큼 가깝다는 의미의 측근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역사적으로 측근은 사회가 급변할 때 제 살길을 찾아 주인을 옭아매는 측간(側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정 전 수석은 최 전 대통령의 곁을 끝까지 지켰으며 ‘40년 사귄’ 주인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최 전 대통령은 사임 성명에서 “역사는 불연속의 연속이고 또한 연속이면서 불연속”이라고 했다. 사람의 인연도 우연이면서 필연이고 또한 필연이면서 우연이 아닐까. 2006년, 두 사내의 ‘함께 죽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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