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60

2006.11.14

“햇볕 전파로 북녘을 녹이고 싶다”

  • 이미숙 주간동아 아트디렉터 leemee@donga.com

    입력2006-11-09 17: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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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볕 전파로 북녘을 녹이고 싶다”
    1991년 7월. 스물네 살의 청년 하태경(39)에게 그 여름은 길고 무더웠으며 아팠고 슬펐다. 구소련이 해체되고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으며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이 함께 사인한 ‘남북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에 관한 합의서’의 잉크가 말라가는 동안, 그러니까 전 세계를 덮었던 ‘냉전’의 아우라가 속이야 어쨌든 녹아내리던 그해 여름과 가을 사이 하태경을 비롯한 전대협 간부 8명은 국가안전기획부에 연행되었다. 매카시적(的) 시대의 광기를 피 냄새로 제 몸에 새긴, 저 소문 짜하던 ‘남산 지하실’에서 그는 생애 두 번째 고문을 받았고 구속·수감되어 2년 구형, 1년 9개월간 실형을 살았다. 이유는? 그 시절 늘 그렇고 그랬던, 추정 가능한 죄목 아니었겠나. 말하자면 ‘빨간색’으로 대별되는 국가 이적행위 같은 것.

    그랬던 여름, 안팎으로 멍들어 헌 데마다 고였던 붉은색은 인권의 사각에 내던져진 북한 인민을 향한 ‘빨간약’이 되어 오늘날 하태경을 붙들고 있다. 운동권 출신의 신념이나 의지가 그리 녹록히 허물어질 일인가. “Soon it shall also come to pass(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 모든 것은 흘러간다지만 어떤 까닭으로 ‘전향한 386 운동권’이 되어 북한으로 주파수를 맞춘 방송사(열린북한방송, 단파 9785kHz www.

    nkradio.com)를 운영하는지 북한 뉴스 전문 매체인 ‘데일리NK’ 사무실에서 그의 얘기를 들었다.

    전향한 386 운동권 … 분단 조국 아픈 현실 인식

    “처음 끌려갔던 게 대학 4학년 땝니다. 4~5일 있었나요? 며칠 잠 안 재우고 생각날 적마다 주먹으로 한 대씩 치고…. 맞아도 이쯤이야 뭐 별거 아니다 싶데요. 그 전까지는 운동권으로 불릴 만하게 한 일도 없었던 ‘범생’이었죠. 극우단체들이 ‘빨갱이 연구소’로 부르던 평화연구소에 자료를 찾으러 갔다가 불심검문에 걸렸어요. 평화연구소는 북한 핵문제를 다루던 뎁니다. 이적표현물 소지죄였죠. 그리고 두 번째는 국보법 제3조(불법 회합통신)와 제7조(이적단체 구성 및 가입)로 걸렸는데 정말 첫 번째는 약했구나 싶었습니다.”



    하태경은 서울대 물리학과 86학번이다. 이과 전공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순수한 과학적 열망이 논리정연한 형태로 숨 고르며 들어앉은 가슴을 ‘군부독재’가 비벼논 첫 남산행부터 그의 궤적은 운동권들이 거치는 순서를 밟아갔다. 북한을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주사파는 아니었지만 자본주의를 부정했던 그였다. 군사정권에 대한 막연한 분노는 결연해지고 자본주의에 대한 얼뜬 반감은 극단으로 치달았으며 PD나 NL계열의 주장처럼 ‘이 모든 현상의 주체자는 미국’이어서 ‘우리는 우리끼리라야 산다’는 민족주의에 불타올랐다. 그래서 남들은 4년에 마치는 대학을 6학년까지 다녔다. ‘루이제 린저의 방북기’나 재외교포들의 연이은 방북 러시, 문익환 목사, 서경원 전 의원, 임수경을 아우르는 방북 릴레이들이 모두 꽃띠 청년의 공고한 민족주의에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햇볕 전파로 북녘을 녹이고 싶다”

    열린북한방송국의 직원은 4명. 그중 1명은 하태경 대표가 중국에서 가르쳤던 탈북자다.

    ‘별’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단순사범이 확신범이 되는 것처럼 맞는 강도만큼 의식은 더 굳건해졌다. 20여 일에 걸친 수사였다. 비밀 지하조직을 구성해 전대협을 배후 조종하며 반국가단체로 규정된 자민통(자주민주통일투쟁위원회)과 연계해 국가 이적행위를 했다는 안기부의 수사결과에 맞서, 옥중에서 군사정권이 저지르는 반민족적 뉴스가 들릴 적마다 감방 동료들과 공동 단식을 했다.

    “단식으로 몸이 많이 축갔어요. 제대로 하는 단식이 아니어서 상할 수밖에 없었죠. 보식이고 뭐고 그런 것도 없이 한꺼번에 왁 ‘하잔다’ 하면 일주일도 굶고 열흘도 굶고…. 그러면서 되돌아봤어요. 동서독 통일이나 소련 해체, 중국이 변하고 있단 소식을 듣는 동안 마르크시즘에 대한 회의가 생기더군요.”

    친북, 반미, 사회주의, 체제변화…. 열에 들떠 지난 5년을 관통하던 생각은 변해갔다. 척박한 조건에서 영혼은 자유로웠고 그제야 가야 할 길을 보았다. 북한을 돕고 통일을 앞당길 길이 자신이 추구해온 운동의 마무리라 싶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특사로 풀려나 곧바로 ‘통일맞이 NGO’에 들어간 건 그래서다. 단체를 이끌던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뜨던 94년 봄까지 문 목사의 정책비서를 맡았고, 이 시기 북한에 대한 그의 인식은 크게 달라진다.

    하나 된 조국통일을 기치로 남북한 재외동포가 한데 모여 91년 발족한 범민련(祖國統一汎民族聯合)이 해산하자 남측 범민련의 주축이었던 문 목사에게 북측이 편지를 보내왔던 것. ‘문익환은 안기부 프락치’라고 적힌 종이를 직접 보았다. 적어도 자신이 보아온 인간 문익환은 어떤 경우에도 그런 비난을 받을 구석이 터럭만치도 없었으므로 결론은 ‘이건 아니다’였다.

    실금 간 그릇은 쉬 깨진다. 친북의식도 그렇게 깨지기 시작했다. 맹렬히 쥐었던 끈을 놓자 허탈했다. 운동도 뭣도 빈자리에 채우기가 힘들었다. 다시 책을 들었다. 부산대학교 영어동시통역대학원 석사(96년), 고려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석사(99년), 중국 지린대학교 동북아연구원에서 박사(2001년)를 받았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중 북한 난민들의 대량 탈북사태를 보고 방향을 중국으로 틀었어요. 지린성으로 학교를 정한 것도 북한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유에서였습니다. 미약하나마 제 힘닿는 한 북한 동포를 현실 속에서 돕고 껴안고 싶었습니다.”

    수업이 없는 주말이면 밤 기차를 타고 북한 난민이 많이 떠도는 창춘으로 갔다. 직접 보고 듣는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참혹했다. 독재자 김정일에게 ‘수탈된 대지’(에두아르도 갈레아노) 북한은 이미 국가가 아니었다. 강제 북송의 두려움에 떨며 인권의 바닥에서 몸부림치는 북한 동포는 결코 남의 일일 수 없었다. 물적 지원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소신은 이때 얻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런 젊은 탈북자들을 모아 귀국 직전까지 공부를 가르쳤다. 중고 노트북들을 구입해 e메일을 비롯한 컴퓨터 운용법이나 북한 국가관 인식 훈련 등 그가 알리고 가르칠 수 있는 최대치의 교양을 전해주려 애썼다. 북한 동포에게 진실로 가야 할 것은 ‘쌀’보다 의식 고양을 통한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눈’이고 ‘이 눈’이 있어야 통일이 가능하리라 여겼다. 북한 동포의 교양 고취에 목표를 둔 북한 전문 방송국을 마음에 둔 건 이때부터다.

    “덩샤오핑(鄧小平)의 중국, 마오쩌둥(毛澤東)의 중국은 절대로 양립하지 못한다”고 알았던 중국 유학시절, 문화혁명의 희생자 덩(鄧)이 ‘공적이 7이고 과실이 3’이라며 마오(毛)를 껴안는 걸 보고 자신의 ‘포용’도 뒤돌아보았음을 털어놓았다. 고려대 국제대학원 시절 남미, 아프리카의 해외 좌파 사례를 연구하다가 만난, 수치(data)로 입증된 ‘박정희’도 그 포용 안에 있었다. 박정희가 일궈낸 경제적 공과로 북한보다 빈한했던 한국의 아버지들이 우리를 배부르고 등 따스운 곳으로 이끌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2형제 중 맏이로 언제나 무탈했던 아이가 서울 땅에 떨어진 그날부터 징그럽도록 속썩여 문드러진 가슴을 두들기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가슴에 비로소 안겼다.

    “햇볕 전파로 북녘을 녹이고 싶다”

    하태경 열린북한방송 대표는 ‘몸의 양식’이 아닌 ‘마음의 양식’으로 북한을 변화시켜야 한다며 햇볕정책의 오류를 지적한다.

    그는 얼마 전 미국에서 돌아왔다. 2005년 봄 4년간 다니던 안정된 직장(SK텔레콤 경영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을 그만두고 미국 워싱턴으로 가 민주주의기부재단(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에서 6개월간 펠로십을 받았다거나, 미 국무부 예산을 따내기 위해 체류기간을 연장한 일은 다 중국에서 품었던 꿈의 실현 과정이었다.

    서울에 스튜디오를 둔 미니 방송국은 지난해 12월7일 자정 첫 방송을 내보냈다. 일반인이 개설하는 대북방송이라는 이유로 국내에서는 방송용 주파수를 얻기가 어려워 미국에서 개국을 추진했다. 서울에서 제작해 워싱턴 송출을 택한 것도 그 까닭이다. 개국에 든 비용은 어림잡아 2억원 미만. 그간 직장생활로 모은 돈과 친구들의 주머니를 털어 초기투자를 했다. 방송주파수는 시간이 곧 돈이어서 애초에는 대북 송출을 원하는 개인이나 단체에서 제작한 어떤 종류의 방송이라도 대신 내보내주고 비용을 충당하는 중계방송사업자 방식을 택해야 했다. 그나마 1시간 분량이었다.

    이즈음 상황은 달라졌다. 최근 미국 국무부가 주는 대북방송 지원예산 가운데 첫해분 100만 달러의 공동수혜자 세 곳 중 하나로 선정됐기 때문. 고작 4명의 직원을 둔 방송국이 그런 돈을 받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워싱턴 내 기금을 둔 재단들과 미국 국무부를 움직인 것은 오랜 시간 공들인 하태경의 설득 덕분이었다. 기금 수혜 이후 비용을 따로 받지 않고 대북방송을 원하는 어느 개인과 단체든 방송국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 말 그대로 ‘열린’ 참여방송으로 선회했고 향후 방송시간도 늘릴 계획이다.

    정치색 배제 말랑한 교양물로 방송 편성

    북한 주민들은 하 대표의 북한 방송을 얼마나 들을까. 그가 탈북자 100여 명을 직접 면접 조사한 결과 북한 주민의 1%가 단파방송을,

    7∼8%가 라디오를 통해 한국 중파방송을 듣고 있음을 확인했고, 탈북자 303명을 대상으로 물었더니 응답자의 4%가 한국 단파방송을, 11%는 “중파 라디오를 청취한다는 2005년 한국언론재단의 조사 결과도 들려주었다.

    ‘부드럽게 간다’는 열린북한방송이 첫 방송 때부터 정한 원칙이다. 북한 핵, 기아, 북한 내 인권 같은 정치색 강한 소재는 아예 뺐다. 대신 이산가족의 편지, 연재소설 ‘방랑 김삿갓’ 읽어주기, 웰빙 생활법, 톡톡 잉글리시 강좌 같은 재미를 곁들인 교양물로 시간을 구성했다. 이런 취지의 하나로 김수환 추기경을 직접 만나 김 추기경의 회고록을 방송하는 일도 얼마 전 허락받아 놓았다고 한다.

    “조건 없이 ‘퍼주기만 하던 사랑’(햇볕정책)이 핵으로 돌아왔다”며 ‘진짜 햇볕’을 전파에 실어보내 북녘 동포를 깨우겠다는 하 대표의 부인은 을지대학교 교수다. 모교 3년 후배로 그는 ‘운동’과 상관없이 연애했다고 하나, 자신보다 더 열혈 운동권이던 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아들딸 이란성 쌍둥이로 얻은 유치원생 첫 아이들과 두 돌 안 된 막내로 늘 씨름 중인 대전 그의 집은 사람 사는 소리로 그들먹하다.

    보안문제로 열린북한방송을 드러낼 수 없다고 해서 경복궁에서 인터뷰용 사진을 찍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의 영결식 현판 위로 가을 해가 떨어진다. 공교롭게도 10월26일이구나. 중추(中秋)의 바람이 서늘한 경복궁을 나서는 다부진 어깨의 사내…. “20대에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못한 사람도 바보고, 40대가 되어 그것을 버리지 못한 사람도 바보”라고 했던가.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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