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0

2006.08.29

‘임거만록’ 책 조작했나 안 했나

북경서 광해군 정통성 부인한 원본 구입 … 실록에서도 “허균이 조작했을 가능성” 거론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입력2006-08-28 09: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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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거만록’ 책 조작했나 안 했나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허균의 누나 허난설헌 생가 터. 허균도 어린 시절 한때 이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20세기 허균(1569~1618)의 이미지는 진보 색깔이 강하다. 문학 창작에서 작가의 개성을 힘주어 말한 사람, 성리학의 윤리에 길들지 않은 사람, ‘호민론(豪民論)’을 써서 민중 저항을 은근히 찬양한 사람, 그 저항의 실례로서 ‘홍길동’을 창조한 사람, 그리고 마침내 역모 혐의로 죽음을 당한 사람.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허균은 중세를 벗어나고자 한 ‘조숙한 근대인’으로 보일 것이다. 과연 그럴까. 아마 그 이미지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서구의 근대를 찾으려는 한국사의 욕망이 만들어낸 것일 터이다. 이제 이 선입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선조, 광해군, 인조 3대 ‘실록’은 예외 없이 허균을 악평한다. “사람됨이 경망하여 볼 것이 없다”(선조실록 31년 10월13일), “행실도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선조실록 32년

    5월25일). 이런 평가는 정말 악의에서 나온 것인가. 여러 사례가 있지만 “어머니가 원주에서 죽었는데도 강릉의 기생에게 빠져 분상(奔喪)하지 않았다”(선조실록 37년 9월6일)는 것은 정말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곡필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해도 이런 비난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의 행동에는 시대를 초월해서 부도덕으로 단죄될 여지가 분명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정적 평가의 저편에는 그의 천재성에 대한 평가도 있다.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뭇 서적에 박통(博通)하고 글을 잘 지었다.”(선조실록 31년 10월13일) “오직 문장의 재주로 세상에 용납되었다.”(선조실록 32년 5월25일) 허균은 왜 이러한 재능에도 비난을 받고, 죽음의 길로 걸어갔을까.

    당대 최고 천재 질시의 대상

    허균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문장가였고 비평가였다. 조선은 문인 국가다. 문학적 능력이 최고의 가치였고 유일한 출세 도구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인간은 자본의 축적, 곧 자본가가 되기를 열렬히 소망하는 것처럼, 허균은 양반관료 사회에서 고급관료가 되어 사회적 명예와 권력을 얻는 것을 열망했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은 질시 대상이었다. 그는 슬기롭게 처신할 필요가 있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율곡 이이(李珥) 역시 천재였으나 도학(道學)으로 스스로를 다스렸다. 허균은 자신의 재능을 주체하지 못하였다. 출세는 더디고 관력(官歷)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1605년에는 수안부사, 1607년에는 삼척부사에서 떨려난다.



    ‘임거만록’ 책 조작했나 안 했나

    허균의 글씨(왼쪽)와 그의 소설 ‘홍길동전’의 한 부분.

    벼슬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내뱉었지만, 그는 끝내 관직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급기야 간신 이이첨(李爾瞻) 일파에게 빌붙어 출세를 도모한다. 그 과정에는 기묘하게도 책 한 권이 삐죽 나와 있다. 이 책 이야기를 해보자.

    종계변무(宗系辨誣)라는 말이 있다. 쉽게 말하면, 왕실 계보의 오류를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의 명나라 문헌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서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을 시해하고 왕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이인임은 이성계의 정적이었으니 심각한 오류다. 1394년 이 사실을 안 조선은 200년 동안 오류를 바로잡고자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명은 ‘대명회전’을 수정했고, 1588년 조선 조정이 책을 직접 확인하여 오류는 2세기 만에 정정되었다. 그런데 여진이 남아 있었고 여기에 허균이 개입한다.

    1613년 12월에 주청사로 북경에 파견된 박홍구(朴弘耉) 등이 중국에서 구입한 책 ‘오학편(吾學編)’ ‘감산별집(山別集)’ ‘경세실용편(經世實用編)’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등 4종의 서적에 이성계에 관한 오류가 그대로 실려 있었다. 사신단은 중국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잘못된 원문을 모두 삭제하고 다시 간행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자 중국 예부에서는 귀국해서 왕에게 보고하고 정식으로 주문(奏文)을 올리라고 답한다. 박홍구 등은 조선에 사건의 전말을 급보한다. 1614년 10월10일 승정원은 이 급보를 광해군에게 보고하면서 ‘대명회전’ 등의 공식 문헌이 개정(改正)된 이상 민간의 소소한 문헌은 문제 삼을 필요가 없는데도 박홍구 등이 중국 예부에 글을 올리는 등 불필요한 소란을 떨었다며 나무라고, 사신단이 돌아오면 의논하여 차분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그런데 승정원의 보고에 의하면 책의 구입 주체는 박홍구가 아니라 허균으로 되어 있다.

    1614년 4월21일 천추사 허균은 서울을 떠나 7월16일 북경에 도착했다. 9월에 ‘오학편’등의 책을 구입해 문제의 내용을 발견하고 미리 북경에 와서 머무르고 있던 박홍구 일행과 문제를 논의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박홍구는 중국 조정에 수정을 요청하고 조선에 사건의 전말을 급보한다. 허균은 귀국하여 1615년 2월 자신이 구입해온 서적을 조정에 올린다. 그가 구입한 책은 ‘광해군일기’ 7년 윤 8월8일 변무(辨誣)를 위해 중국에 보낸 주문(奏文)에 나열되어 있다. ‘오학편’ ‘황명대정기(皇明大政記)’ ‘속문헌통고’ ‘경세실용편’ ‘학해위언(學海危言)’ ‘감산당별집’ ‘애집(艾集)’ 등이 그것으로 이성계에 관한 전술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고, 또 ‘속문헌통고’와 ‘경세실용편’ 등의 책은 조선이 일본과 짜고 중국 땅을 침략하고자 했다는 등의 내용도 담고 있었다.

    2세기 만에 정정한 ‘대명회전’

    당시 조선의 지식인 사회는 이런 책들의 오류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민간 서적이라 굳이 개정을 요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실의 정통성에 관계된 일이 공론화된 이상 침묵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떤 조처가 있어야 했다. 사실 문제가 된 책은 이런 책들이 아니라, 허균이 북경에서 구입한 명나라 문인 오원췌(伍員萃)의 저작 ‘임거만록(林居漫錄)’이었다. 이 책은 읽거나 보고 들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적는 수문수록(隨聞隨錄)의 에세이집이다. 이 책에도 앞서와 같은 오류가 반복되어 있었다. 그런데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광해군이 형인 임해군의 지위를 빼앗아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이 있었다. 광해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민감한 내용이 아닌가.

    ‘임거만록’ 책 조작했나 안 했나

    강릉시 사천면에 있는 허균 시비(좌)와 강릉시 강문동의 허균 문학비.

    그런데 이 책에는 수상한 흔적이 있다. 허균이 구입한 ‘임거만록’은 간본이 아닌 초본(草本), 곧 필사본이었다는 것이다. 초본이라는 말은 이 책이 오원췌의 자필 원고본이라는 의미다. 원고본을 구입하다니 정말 드문 일이다. 수상한 흔적은 이것만이 아니다. 서장관으로 허균과 함께 북경에 갔던 김중청(金中淸)의 말에 의하면, 북경이 아닌 귀국길에 오른 뒤 허균이 ‘임거만록’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즉 11월3일 북경을 출발하여 그날 저녁 통주(通州)에서 하루를 자고 그 다음 날 아침 허균은 김중청에게 ‘임거만록’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김중청은 광해군의 정통성을 의심한 한 대목을 보고 놀라 귀국 보고서에 써넣었고, 자신이 본 것은 필사본이라고 증언했다. 왜 허균은 이 위험한 내용을 담은 책에 대해 북경에서 박홍구와 의논하지 않고 북경을 떠난 뒤 김중청에게 보여주었을까.

    여기에서 조작설이 흘러 나온다.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이 초본 ‘임거만록’의 해당 내용은 허균이 조작해 써넣은 것이라고 한다. 허균을 따라갔던 서리 현응민(玄應旻)은 아주 총명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으로 허균을 위해 목숨조차 내놓을 심복이었다. 현응민은 중국어에 능통하여 북경 시장에서 물건을 사들이는 일을 맡고 있었다. 허균은 광해군에 관한 내용을 써넣은 ‘임거만록’ 필사본을 만들고, 현응민을 시켜 북경 책 시장에 내다 팔게 하고는 즉시 다시 사들이게 했다는 것이다. 광해군은 당연히 이 책의 기록을 지울 것을 중국에 요청할 것이고, 그 임무는 책의 최초 발견자 허균 자신이 맡게 될 것이다. 조작설이 맞다면 허균의 계산은 아마 이렇게 돌아갔을 것이다.

    허균이 과연 책을 조작할 수 있었을까? ‘광해군일기’의 사관은 이렇게 말한다.

    허균은 문재(文才)가 극히 높아 붓만 들면 수천 마디 말을 써냈다. 그러나 거짓 글을 짓기를 좋아하여 산수참설(山水讖說)과 선불이적(仙佛異迹)으로부터 모든 글을 가짜로 지어냈는데, 그 글이 평상시의 작품보다 월등 나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구분해낼 도리가 없었다. 이제는 나라를 비방하는 문서까지 만들고, 자신이 또 그것을 해명하는 글을 지어 공(功)을 바라는 바탕으로 삼았으니, 그 계책이 지극히 교묘하다 하겠다.(‘광해군일기’ 6년 10월10일)

    사관은 ‘임거만록’을 완전히 가짜로 보고 있고, 당시 사람들이 그 책이 모두 허균이 조작해낸 것으로 믿고 있다고 증언한다. 당대 최고의 천재이자, 산문작가였던 허균의 실력으로 가짜 글을 지어 슬쩍 끼워넣는 것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었으리라.

    광해군일기엔 해결 과정 없어

    광해군은 ‘임거만록’의 해당 부분을 반드시 삭제해야 했다. 그 임무는 당연히 허균에게 맡겨졌다. 광해군은 허균을 불러 중국에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보내니 미안하다고 말한다. 허균은 곧 북경으로 떠났고 이듬해 1월6일 비밀리에 조선으로 보고서를 보낸다. “국사(國史)와 야사(野史)에 우리나라를 무고하는 말이 있는 것을,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바로잡았습니다.”(‘광해군일기’ 8년 1월6일) 일은 잘 해결되었다. 하지만 ‘광해군일기’는 그 구체적인 과정과 결과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상한 것은 김중청이 남긴 기록이다. 김중청은 자신의 문집에서 이 사건에 대해 약간 언급하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북경에 도착한 허균은 인쇄본 2종을 구하여 그중 문제 되는 부분을 적출해 예부에 올려 해명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허균이 애초에 구입한 원고본과 인쇄본은 일치한다. 따라서 허균이 조작할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광해군일기’ 8년 1월6일을 적은 사관은 “오원췌의 ‘임거만록’의 초본은 더욱 의심스러운 책이다. 허균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워 모아 왕에게 보고하고, 왕의 의중을 맞추어 마침내 변무하는 일을 맡았던 것이다”고 말한다. 여전히 허균의 조작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 애당초 허균이 가져온 책은 인쇄본으로, 허균이 중국인 각판수(刻板手)에게 돈을 주고 자신이 지은 글을 끼워넣었다는 말까지 나돌았으니, 허균의 조작설은 끊이지 않았다.

    ‘임거만록’ 사건으로 허균은 광해군의 신임을 얻는다. 허균은 광해군 7년 5월에 문신 정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동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좌승지를 역임한다. 같은 해

    6월5일 광해군은 허균이 책을 많이 사왔고, 변무하는 일에 대해서도 다방면으로 힘을 썼다 하여 그의 품계를 올려주었다. 광해군 8년 5월1일 허균은 형조판서가 되었다. 12월26일 광해군은 또 허균의 품계를 올려주고 토지 20결과 외거노비 4명을 하사한다. 허균은 소원대로 이제 출세가도에 올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임거만록’은 조작인가, 아닌가. ‘임거만록’을 볼 수 없으니, 확인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나는 조작 쪽에 손을 들겠다. 허균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기에.

    허균의 두 차례 북경행은 책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허균은 두 차례의 북경행에서 엄청난 공금을 횡령해 서적 4000권을 구입해온다. 그 책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음 호에서는 그 이야기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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