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49

2006.08.22

가톨릭 vs 신교, 그림 vs 문자 ‘대충돌’

인쇄술 발달 전후로 선교 무기 뚜렷한 차이 … 종교개혁 때 성상 파괴, 금서 소각 맞불

  •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입력2006-08-21 1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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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 vs 신교, 그림 vs 문자 ‘대충돌’

    베르니니, 이단에 대한 참된 종교의 승리, ‘일 제수’ 교회 로욜라 제단 장식.

    얼마 전 일부 기독교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종교적 성향의 집회를 하려다 이를 말리는 정부와 감정적 충돌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납치와 참수의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이라크에까지 들어가겠다는 분들이니 아프가니스탄쯤은 위험지역 축에도 못 낀다고 믿을 것이다. 대천사 미카엘이 불칼로 지켜주고 설사 순교를 하더라도 하늘에서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 세상에 못 갈 데가 어디에 있겠는가.

    16세기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기독교가 공인된 것이 A.D. 313년, 그러니까 마지막 순교자를 본 지 1000년이 훨씬 넘은 시점이었다. 이 종교적 지루함(enneui)에 지친 일군의 광신도들이 교황청이 있는 로마로 행진하며 성상들을 파괴했다고 한다. 그들의 소원은 하나, 로마에서 자신의 신앙을 위해 순교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교황은 단호하게 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로마에서 소원을 이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 광신도들이 순교를 당하기 위해 교회로 난입해 성상을 파괴했다는 대목이다. 원래 성상 파괴운동(iconoclasm)은 A.D. 8~9세기에 비잔틴제국의 동로마 교회에서 일어난 현상이다. 하지만 몇백 년 후에 로마교황청의 지배를 받던 서구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성상 파괴운동이 일어난다. 종교개혁을 주장하는 개신교도들이 가톨릭교회의 성화와 성상, 특히 마리아상을 파괴하고 나선 것이다.

    형상금지의 계율

    헬레니즘의 신들은 텍스트가 아니라 이미지로 존재한다. 제우스와 아폴론, 헤라와 아프로디테는 무엇보다도 호메로스의 서사시, 프락시텔레스의 조각, 피디아스의 신전건축 속에 들어 있다. 반면 헤브라이즘은 철저한 텍스트의 종교다. 유대의 신은 ‘토라’라 불리는 모세오경 속에 말씀으로 존재한다. 게다가 야훼는 모세의 석판에 써준 십계명에서 “눈에 보이는 것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했다.



    교회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당시 유럽 민중들은 대부분 까막눈이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이해할 정도로 지적 수준이 높지 않았다. 선교를 위해서는 이미지를 만들어 보여주어야 하나, 십계명은 분명히 눈에 보이는 것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금한다. 지적 수준이 높지 않았던 당시 민중들은 당연히 성상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원리주의자의 눈으로 볼 때 돌을 섬기는 것은 성서에서 금하는 우상숭배다.

    이 때문에 그 계명을 둘러싸고 8~9세기에 성상 찬성론자와 성상 파괴론자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서로마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는 이 논쟁을 해소하는 영리한 어법을 제시한다. 즉 성상은 파괴돼서도 안 되고, 숭배돼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가 유럽의 민중 사이에 뿌리를 내리는 데 성상이 발휘한 역할은 지대한 것이었다. 중세의 성화는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성서’, 즉 글자를 모르는 무식한 민중의 성서였다.

    가톨릭 vs 신교, 그림 vs 문자 ‘대충돌’

    1.세자레 리파의 ‘도상학 핸드북’ 삽화 -‘이단’.<br>2.3. 세자레 리파의 ‘도상학 핸드북’ 삽화-‘민주’,‘오류’.

    인쇄술의 혁명

    종교개혁이 인쇄술의 발달과 맞물려 일어났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구텐베르크 혁명 이후 유럽은 서서히 문자문화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성서가 자국어로 번역되고, 이것이 대량 복제되면서 교황청의 권위는 결정적으로 약화된다. 신앙의 시대에는 성서의 해석을 독점하는 자가 곧 지상의 신이 되는 법이다. 하지만 성서 해석의 독점권을 잃으면서 교황청은 과거에 누리던 권력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된다.

    인쇄술은 우리나라가 독일보다 몇백 년 앞섰지만, 고려의 인쇄술은 어디까지나 한자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알파벳이야 스물넉 자에 불과하지만, 한자의 경우에는 한 세트를 갖추는 데 수만 개의 활자가 필요하다. 이 정도의 설비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할 주체는 당연히 국가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인쇄혁명이 의식혁명, 나아가 사회혁명으로 이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소자본으로 인쇄소를 차릴 수 있었던 서구에서는 출판 자체가 민간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때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출판됐고, 이는 다시 글쓰기 자체를 촉진시켰다. 당연히 그중에는 교회의 권력에 대항하는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인쇄술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마틴 루터의 ‘95개조 논제’는 아마도 찻잔 속의 태풍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림이 가톨릭교회의 무기였다면, 문자는 종교개혁가의 무기였다.

    그림과 문자의 전쟁

    종교전쟁 시기의 성상 파괴운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교도들이 구교회의 성상을 파괴한 것은, 이미지야말로 가톨릭교회를 유지시키는 주요한 프로파간다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지를 파괴하는 개신교도들은 인쇄술 보급으로 가능해진 각종 팸플릿으로 철저한 이론무장을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 운동은 유럽대륙이 영상문화에서 문자문화로 넘어가는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혁가들의 공격으로 잠시 멈칫했던 교회는 곧바로 반격을 시작한다. 이 반격은 한편으로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다시 바로잡는 도덕 재무장의 움직임, 다른 한편으로는 스페인의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한 무자비한 무력 진압과, 고문과 처형이 수반된 가혹한 종교재판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종교전쟁은 곧 미디어 전쟁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모두가 모두에 대항해 싸우는 어지러운 전쟁의 시기에는 그림과 문자도 서로 싸우고 있었다.

    가톨릭 vs 신교, 그림 vs 문자 ‘대충돌’

    4.5.6. 세자레 리파의 ‘도상학 핸드북’ 삽화 -‘개종’,‘죄악’, ‘관용’.

    사진(7)은 17세기에 스페인의 종교재판소에서 만든 금서목록의 표지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반종교개혁은 동시에 텍스트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다. 종교개혁이 이미지를 금했다면, 반종교개혁은 텍스트를 금지했다. 신교도들이 성상을 파괴했다면, 구교도들은 금서를 불태웠다. 물론 개혁자들이라고 문자만 사용하고, 가톨릭 교회라고 그림만 사용한 것은 아닐 게다. 하지만 문자가 종교개혁의 매체였고, 그림이 반종교개혁의 주요한 선전매체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크의 선전예술

    종교전쟁이나 종교재판의 잔혹함에 비하면 베르니니의 작품은 너무나 아름답기만 하다. 바로크의 걸작이라고 불리는 그의 작품들은 실은 반동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충만한 시각적 프로파간다였다. 사진은 예수회 소속 ‘일 제수(Il Gesu)’ 교회의 제단을 위해 제작한 작품이다. 손으로 십자가를 들고 불벼락을 쥔 다른 손을 높이 치켜든 여인은 ‘진정한 종교’, 즉 가톨릭교회를 의미하고, 그 아래에 넘어져 있는 추악한 인물들은 물론 ‘이단’, 즉 개신교의 상징이다.

    가톨릭교회는 시각매체가 주는 종교적 선전효과를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1656년에 오토네티라는 신학자는 그림이 주는 교육적 효과를 섬세하게 이론화했다고 한다. 성화는 먼저 보는 이에게 감성적 인식을 주고, 이어서 그에게 지적인 향유를 주어야 하며, 나아가 그를 경험의 최고 단계인 초자연적인 인식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거의 현대의 현상학적 미학을 연상시킬 정도로 섬세한 이론이다.

    하지만 이런 고급스런 취향으로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아무래도 제한이 있었다. 대중은 지적인 향유나 초자연적인 인식 같은 것보다는 무엇보다 ‘눈요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실물을 방불케 하는 바로크 자연주의는 여기서 탄생한 것이다. 바로크 특유의 시각적 화려함, 극적인 효과, 바탕에 깔린 은밀한 에로티시즘 등은 위기에 처한 가톨릭교회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들의 취향에 영합한 결과이기도 하다.

    가톨릭 vs 신교, 그림 vs 문자 ‘대충돌’
    알레고리

    베르니니의 작품에서 아름다운 여인은 ‘참된 신앙’을, 추악한 인물들은 ‘이단 신앙’을 상징한다. 이렇게 추상적 관념을 구체적인 대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알레고리’라고 한다. 마틴 루터는 중세 신학에서 즐겨 연구하던 알레고리에 대해 “이 우의적인 연구들은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알레고리가 관념의 시각적 표현이라는 점에서, 이는 언어의 영역에서 일어난 성상 파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세자레 리파의 ‘도상학 핸드북’에 실린 알레고리들은 반종교개혁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이단은 늙고 추한 여인, 신교도는 눈먼 소경이다.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이는 젊고 예쁜 여인이며, 이단의 죄에 빠진 자는 뱀에게 심장을 빼앗긴다. 이 이단들에게는 심지어 ‘관용’의 여신마저 동정심을 보여주지 않는다. 17세기에 이렇게 중세의 알레고리를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종교개혁의 보수성을 엿볼 수 있다.

    구텐베르크의 은하가 종말을 고하고, 때는 바야흐로 또다시 관념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디지털 영상의 시대. 이 새로운 영상문화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보수화는 가능하다. 개혁 다음에는 늘 반동이 따르는 법. 참, 위의 그림 중에 설명을 빼놓은 게 있다. 그림짿를 보라. 손에 뱀을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됐음이 틀림없는 저 여인의 이름은 ‘민주주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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