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6

2016.12.07

커버스토리

청와대의 일격, ‘눈치대왕’들의 난장 법석

‘임기 단축’ 선언은 신의 한 수? 탄핵대오 흩뜨리고 인사권 행사로 존재감 회복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입력2016-12-02 16:4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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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은 인공지능 알파고와 겨룬 제4국에서 ‘신의 한 수’를 둬 3연패 끝에 극적인 첫 승을 거뒀다. 승리 원인으로 꼽히는 제4국 78수는 왜 신의 한 수였을까. 바둑 전문가들은 이 9단이 78수를 두기 전까지 위쪽 중앙의 백 4점을 죽어 있는 상태로 봤다. 그 대신 백은 오른쪽 중앙의 흑돌을 가져갔다. 이를 두고 위쪽 중앙 백 4점을 버리는 대신 오른쪽 중앙의 흑돌을 취해 교환한 것이라고 판세를 분석했다. 그런데 이 9단은 위쪽 중앙의 백 4점을 지키려고 78수를 뒀다. 이 한 수로 죽은 듯 보였던 백 4점이 살아났고, 결국 이 9단은 잃은 것 없이 이득만 챙겨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켰다. 알파고가 자신이 둔 바둑에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5수를 더 교환한 뒤였다. 바둑 전문가들은 알파고가 87수째가 돼서야 78수의 묘수를 깨달았고, 역전하고자 무리수까지 뒀지만 결국 돌을 던졌다고 분석했다.

    11월 29일 “나의 임기 단축 등을 국회가 결정해달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는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 겨룬 제4국에서 선보인 78수 같은 ‘신의 한 수’가 될까, 아니면 그저 그런 ‘꼼수’에 그칠까. 아직 결과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점점 ‘꼼수’가 아닌 ‘신의 한 수’가 돼가고 있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두 번 죽일 수 없는 것 아닌가’

    11월 29일 박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 전 상황으로 되돌아가보자. 주최 측 추산 190만 명에 달하는 국민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26일 제5차 촛불집회 이후 정치권은 ‘대통령 탄핵’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대통령이 ‘물러나라’는 국민 요구를 외면하니 헌법에 규정된 탄핵을 통해 강제로 끌어내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본 것이다.

    더불어민주당(민주당)과 국민의당, 정의당 등 야 3당은 물론, 새누리당 비박(비박근혜)계 진영 일부에서도 ‘대통령 탄핵 불가피성’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기 시작했다. 성난 민심을 거스를 경우 자신들에게 촛불 민심이 향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대통령 탄핵 찬성’으로 나타난 것이다.



    만약 대통령이 ‘임기 단축’을 언급한 3차 대국민담화가 없었다면 12월 2일 새해예산안 통과 이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돼 표결에 부쳐졌을 개연성이 높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국민담화 이후 국면이 크게 바뀌었다. 특히 탄핵에 긍정적이던 새누리당 비박계 인사들의 동요가 컸다. ‘스스로 임기 단축을 선언한 대통령을 굳이 탄핵해 두 번 죽일 필요가 있느냐’는 논리가 비박계 탄핵 찬성파들 사이에 먹혀들기 시작한 것이다.

    비박계 한 초선의원은 “대통령 탄핵은 물러나라는 국민의 요구에 대통령이 끝까지 버틸 때 국민의 대의기구인 국회가 선택할 수 있는 최후 수단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임기를 줄이겠다고 스스로 선언하지 않았나. 대통령 권한을 국회가 추천한 국무총리에게 위임하고 언제까지 물러나겠다고 대통령이 약속한다면 굳이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할 이유가 없어진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가 ‘신의 한 수’로 여겨지는 이유는 거대한 촛불민심 앞에서 다 죽은 듯 보이던 친박(친박근혜)계가 다시 목소리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다. 마치 위쪽 중앙의 백 4점을 이세돌 9단이 78수로 살려낸 것처럼, 박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는 촛불 앞에 위축된 친박계가 수세에서 공세로 발언권을 키워가는 계기가 됐다.

    대표적 친박계 인사인 홍문종 의원은 “(대국민담화로) 야당은 약이 오를 것”이라 했고,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도 11월 30일 “야당이 탄핵을 실천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장담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임기 단축’ 카드를 꺼내 들어 공을 국회에 넘겼지만 야권은 ‘탄핵’ 외 협상은 없다며 배수의 진을 치고 나섰다. 그러나 ‘탄핵’ 외길로 향하는 야권에 대해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이 둔 78수의 의미를 뒤늦게 깨닫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할 개연성이 높다는 분석이 적잖다. 새누리당 비박계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야 3당이 탄핵안을 발의하더라도 가결 여부가 불투명하기 때문.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 대표는 “새누리당은 박 대통령 퇴임 이후 민심을 수습할 절대적 시간이 필요한 반면, 야권은 박 대통령을 향한 국민적 분노가 자신들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질서 있는 퇴진’보다 탄핵 같은 ‘즉각 퇴진’에 무게를 두고 있다”며 “서로 생각이 다른 여야가 지루한 정치적 공방을 이어간다면 사실상 탄핵이 물 건너갈 가능성도 있다”고 풀이했다.

    야 3당이 발의한 탄핵안이 만약 국회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부결된다면 더 큰 후폭풍이 몰아칠 수 있다.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던 성난 민심이 정치권 전체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은 탄핵안 부결에 부역한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대통령 탄핵을 관철하지 못한 무능한 야권’으로도 성난 민심이 향할 수 있다.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이 “탄핵안이 발의되면 무조건 가결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나선 것도 탄핵안 부결에 따른 후폭풍을 우려해서다.

    탄핵안 가결을 위해서는 새누리당 비박계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비박계는 ‘4월 말 퇴진, 6월 말 대선(대통령선거)’이란 정치 일정을 대통령에게 요구하면서 탄핵하지 않아도 될 명분을 축적하고 있다. 정기국회 마지막 본회의 날인 12월 9일 이전까지 박 대통령이 비박계의 요구에 어떻게 화답하느냐에 따라 탄핵안은 가결될 수도, 부결될 수도 있다.



    인사권 앞에서 떨고 있는 사정당국

    정치권이 탄핵과 질서 있는 퇴진 등을 둘러싸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공방을 벌이는 사이 1월 정기인사를 앞둔 검찰과 경찰, 국가정보원 등 사정당국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탄핵 또는 질서 있는 퇴진 어느 쪽이든 박 대통령의 입김이 작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질서 있는 퇴진이라 해도 정기인사가 있는 1월까지는 박 대통령이 인사권을 휘두를 테고, 그 전에 탄핵 일정이 잡히거나 만에 하나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더라도 박 대통령의 분신인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고위 공직자 인사를 진두지휘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특히 촛불집회 대응 과정에서 청와대에 밉보인 경찰과 대통령을 피의자로 만든 검찰 수뇌부 또는 특별수사본부 소속 검사들, 탄핵정국 과정에서 자체 감사를 진행하는 등 제 기능을 못 한 국가정보원 수뇌부에 대한 인사가 초미의 관심사다. 이런 가운데 박 대통령이 정국 타개 회심의 일타인 3차 대국민담화 바로 전날인 11월 28일 단행한 경찰 수뇌부 인사는 주변을 깜짝 놀라게 했다.

    경찰청 차장을 포함해 6명뿐인 치안정감 자리에 오른 김양제 경기남부지방경찰청장과, 치안감으로서 경기북부지역지방경찰 총수자리에 앉은 이승철 경기북부지방경찰청장은 모두 경찰 내에서 경비통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이 청장은 지난해 11월 고(故)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사경을 헤맬 때인 그해 12월 경찰청 경비국장으로 발령 났다. 이 밖에도 치안감 2명이 치안정감으로 승진했다.

    최근 퇴임한 전 경찰 고위 간부는 “이번에 치안정감으로 발령 난 치안감 3명과 치안감으로 승진한 경무관급 6명은 대부분 조직 내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비판받던 이들로, 이번 인사가 이철성 경찰청장의 작품이 아니라는 얘기가 파다하다. 그렇다면 청와대가 주도했다는 것인데, 경비 출신의 약진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아직도 대통령이 시국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더욱이 인사권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밝혔다.

    공소장에 대통령을 피의자로 못 박아 법원 및 특별검사 측에 넘긴 검찰 수뇌부와 특별수사본부 소속 검사(검사장급 포함)들은 내년 1월 정기인사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태풍이 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박 대통령이 그때까지 인사권을 행사하든 못하든 실질적 인사는 검찰 대선배인 황교안 총리가 박 대통령의 의중을 담아 할 수밖에 없다는 게 법조계의 예측. 검찰 고위직 출신인 한 법조계 관계자는 “사표 처리된 김현웅 법무부 장관 후임 인선이 쉽지 않아 내년 1월 정기인사는 황 총리가 직접 할 가능성이 높다. 황 총리의 스타일로 봐서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든 말든 박 대통령에게 의사를 물을 것이다. 그리고 특별수사본부 소속 검사들에게 피해가 갈 것이다. 다만 김수남 검찰총장은 수사를 총지휘하고 있음에도 건드리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임기가 아직 1년이 남아 있어 잘못 건드렸다간 엄청난 역풍에 시달릴 것”이라고 밝혔다.

    한 검찰 고위 관계자는 “김 총장이 특별수사본부 소속 검사들에게 좌고우면하지 말고 수사하라고 지시한 것은 맞다. 그리고 수사 과정에서 정말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김 총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할 일을 한 총장에게 보복 인사는 없으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영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지검장 등 특별수사본부에서 일했던 검사 20여 명은 속이 타는 게 사실이다. 과연 김 총장이 대통령이 가진 검사 인사권으로부터 얼마나 보호해줄 수 있을지가 의문이기 때문이다. 검찰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법조인은 “특별수사본부에서 일했던 검사 수와 슈퍼 특검에 파견할 검사 수가 20명으로 얼추 비슷하다. 사실 기존 사례를 보면 성과 없는 특검에 참여하려는 검사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특별수사본부 소속 검사 대다수는 특검 파견을 간절히 원하는 것으로 안다. 표면적으로는 검찰에서 하던 수사를 계속하고 싶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1월 정기인사에서 불 태풍을 특검에 가서 피해보려는 차원이 더 강한 듯하다. 검찰은 특별한 인사 수요가 발생하지 않는 한 정기인사 때 인사를 하기 때문에 특별수사본부 소속 검사에게 특검 파견은 1석2조인 셈”이라고 주장했다.

    법조계에선 이런 바람이 꼭 허황된 얘기는 아니라는 설이 돌고 있다. 슈퍼 특검을 이끌 박영수 특검이 평소 돌출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신중한 스타일이라 수사의 연속성 보장 차원에서 20명의 파견 검사를 대부분 특별수사본부 소속 검사로 채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골프 격언 가운데 ‘장갑을 벗어봐야 결과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18홀을 도는 동안 유리한 때도, 불리한 때도 있지만 결과는 모든 일정이 끝나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샷 또는 한 홀의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의미로 쓰인다. 대통령 탄핵도 마찬가지다. 국민 190만, 아니 1900만 명이 촛불을 들어도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하야를 결심해 대통령직에서 내려오거나, 국회에서 재적의원 절반 이상 찬성으로 탄핵소추안이 발의되고 3분의 2가 탄핵소추안에 찬성해 가결돼야 대통령 직무가 정지된다. 그 전까지 대한민국 대통령은 박근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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