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2

2006.04.25

밥 먹을 때도, 아플 때도 ‘언제나 책 곁에’

신하들이 몸 걱정하며 독서 만류했을 정도 … 과학·문학·농학·음악까지 방대한 지식 쌓아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입력2006-04-24 1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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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먹을 때도, 아플 때도 ‘언제나 책 곁에’

    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 중인 세종대왕 어진(御眞, 아래)과 왕자시절의 독서도.

    조선은 왕국이다. 내가 시방 조선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자. 상것 혹은 노비인 나에게 왕이란 무엇인가.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나의 수확물과 노동력을 탈취하지만, 왕은 나에게 무엇을 해준단 말인가. 왕의 얼굴을 본 적도 없고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라, 전근대사회에서의 왕이란 냉정하게 말해 이유 없는 수탈의 거룩한 이름일 뿐이다. 그럼에도 왕에 대한 침착한 평가는 없다. 과거 지배자에 대한 평가의 부재가 오늘날 정치인들에 대한 엄정한 평가의 부재를 낳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왕의 소업(所業)은 정치다. 왕은 오로지 그 소업을 얼마나 충실히 실천했는가에 따라 평가될 뿐이다. 유교국가의 왕은 공자의 인정(仁政)과 맹자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내건다. 인정과 왕도정치는 백성을 위한 정치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일 뿐이다. 아름답고 거룩하지만, 쉽게 현실이 되지는 않는다. 조선의 왕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그런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바로 세종이다. 나머지 왕들은 꿈조차 꾸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수탈자였을 뿐이다.

    책 너무 많이 읽자 태종이 책 감추라고 지시

    ‘세종실록’ 32년 2월17일조는 세종이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에서 사망한 기사를 싣고 있다. 이 기사는 세종을 이렇게 평가한다.

    - 예(禮)를 갖추어 신하를 부렸고, 간언(諫言)을 어기는 법이 없었으며, 사대(事大)를 정성으로 했고, 교린(交隣)을 신의 있게 하였다. 인륜에 밝았고 만사를 잘 살폈으며, 남쪽과 북녘에서 찾아와 복속하고 사방 국경이 편안하여 백성들이 삶을 즐거워한 것이 무릇 30여 년이었다. 성덕(聖德)이 높고도 높은지라 무어라 이름을 붙일 수가 없어 당시 사람들이 ‘해동(海東)의 요순(堯舜)’이라 불렀다. -



    왕이 죽으면 사관은 상투적 미사여구로 그의 생애를 찬양한다. 세종에 대한 이 찬양 역시 같은 것일까. 아닐 것이다. 세종의 집권기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가장 번성하고 안정된 시대였다. 아버지 태종의 힘으로 왕권은 확고했고, 뒷날의 당쟁과 같은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도 없었다. 명(明)과의 관계도 순조로웠으며 조선 조정에는 야인(野人, 여진족)과 일본, 그리고 유구(琉球, 현재의 일본 오키나와제도에 존재했던 국가) 등이 내조(來朝)했다. 야인과 대마도를 정벌할 만큼 무력도 있었다. 시대는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는 활기에 넘쳤고, 백성들의 생활도 안정돼 있었던 것이다. 그를 ‘해동의 요순’이라 일컫는 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과연 무엇이 세종을 성군(聖君)으로 만들었던가. 기사를 좀더 읽어보자.

    - 왕위에 오르자 사경이면 옷을 입고 날이 훤히 밝으면 조회를 받았으며 그 다음 정무(政務)를 보았다. 이어 윤대(輪對)를 행하고, 경연(經筵)에 나아갔는데, 한 번도 게으른 적이 없었다. -

    사경은 밤 1시에서 3시 사이다. 새벽이 아니라 한밤중이다. 한밤중에 일어나 날이 밝을 때까지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등 하루 일과를 준비했다. 동이 트면 신하들의 출근 인사를 받고 중요한 정무를 처리한다. 이어 각 관청의 관원들이 돌아가면서 올리는 보고(輪對)를 받은 뒤 경연에 나아간다. 경연은 신하들과 경전과 역사를 읽으면서 정치를 논하는 자리다. 바쁜 일과다. 이런 일과에서 나태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니 세종은 어지간히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스스로 “손을 거두고 한가롭게 앉아 있을 때는 없다”(‘세종실록’ 5년 12월23일)고 할 정도였다.

    밥 먹을 때도, 아플 때도 ‘언제나 책 곁에’

    세종대왕의 각종 유물ㆍ유적을 보관ㆍ전시 중인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의 세종대왕 기념관 전경과 세종성왕 기념탑.

    이 부지런함 중에서 더욱 특별한 부지런함이 있다. 위 기사의 서두를 읽어본다.

    -상(上, 세종)은 총명하고 슬기롭고 어질고 효성스럽고 결단력이 있었다. 즉위하기 전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싫은 줄을 몰랐으며, 손에서 책이 떠난 적이 없었다. 한번은 여러 달 몸이 편치 않았으나 독서를 멈추지 않았다. 태종께서 걱정하시어 책을 거두어 감추게 하였는데, 그래도 책 한 권이 남아 있는지라 그 책을 날마다 쉬지 않고 읽고 외우니 본디 타고나신 성품이 그와 같았던 것이다. -

    여러 달 병을 앓는 중에도 독서만은 그만두지 않았다 하니, 아버지 태종이 책을 거두어 감춘 것도 이해가 간다. 한데 어쩌다 남은 책 한 권(다른 기록에 의하면 구양수와 소동파의 편지글을 모은 ‘구소수간(歐蘇手簡)’이란 책이다)을 읽고 외었다 하니, 그는 타고난 독서가(讀書家)임이 분명하다.

    독서 때문에 눈병 걸리고도 책 읽기 계속

    오로지 책에 몰입한 독서가 세종은 “즉위하고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수라를 들 때에도 반드시 책을 좌우에 펼쳐놓았고, 한밤중까지 책에 빠져 도무지 싫은 기색이 없었다”(‘세종실록’ 5년 12월23일)고 한다. 밥을 먹을 때도 밥상 좌우에 책을 펼쳐놓고 읽었다고 하니, 독서광도 이런 독서광이 없다. 오죽했으면 태종이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는 그럴 수 있지만, 임금이 되어 어찌 이토록 고생스레 책을 읽는단 말이냐?” 하고 거듭 책 읽기를 금지했을까?(‘세종실록’ 3년 11월7일) 하지만 태종의 충고도 금지도 소용없었음은 물론이다. 독서가에게 책은 마약보다 더한 중독성이 있다. 책에 굶주려본 사람은 세종의 심정을 알 것이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이고, 사대부들은 내심 임금의 스승을 자처한다. 당신은 권력을 쥐고 있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우리에게 배워야 한다는 것이 사대부들의 생각이었다. 임금을 공부하게 하는 곳, 사대부가 임금을 가르치는 곳이 바로 경연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훑어보면 임금은 경연을 빼먹고, 신하는 임금에게 경연에 나오라고 강권하는 풍경이 흔히 보인다. 자발적으로 경연에 몰두한 왕은 드물다. 하지만 세종은 예외다. 그는 즉위 초부터 경연에 부지런했다. 즉위한 지 1년이 지나 경연에서 ‘대학연의(大學衍義)’의 강론을 끝내자 그는 “읽기는 다 읽었으나, 또 읽고 싶다”고 했다(‘세종실록’ 1년 3월6일). 이 지루한 책을 다시 읽고 싶다니! 이 발언은 오직 세종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세종의 책 읽기는 어딘가 과도하게 여겨진다. 그 과도함은 마침내 신체에 이상을 일으킨다. 세종은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편찬을 대제학 윤회(尹淮) 등에게 명하고 그 원고를 날마다 가져오게 하여 자신이 직접 교정을 보았다. 그는 어느 날 윤회에게 이렇게 말한다.

    - “근래 이 책을 읽고 책 읽는 것이 유익한 것인 줄 더욱 알게 됐다. 날마다 더욱더 총명해지고 잠이 아주 줄어들었다.” -

    이 지독한 독서가는 한밤중까지 책을 읽고는 독서의 유익함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거기다 또 잠이 줄어들며 머리가 더욱더 총명해졌다고 한다. 제왕이 학문을 도외시해도 문제가 되지만, 세종처럼 잠을 줄여가면서 학문에 몰두해도 문제가 된다. 윤회 등은 걱정이 됐다.

    - “밤에 잔글씨를 보시고 눈병이 나실까 걱정이 됩니다.”

    “경들의 말이 옳소. 내 조금 쉬리다.”(‘세종실록’ 16년 12월11일) -

    하지만 말뿐이고 세종은 쉬지 않았다. 윤회의 걱정처럼 눈에 병이 났고, 그 눈병은 당뇨병과 등의 부종(浮腫), 임질 등과 함께 말년의 그를 괴롭혔다. 급기야 즉위 24년에는 눈병의 고통이 너무 심해 세자에게 정무를 맡기고 싶다는 말을 내뱉을 정도였다. 이때 자신의 눈병이 10년 묵은 병이라 말하고 있으니, 거슬러 올라가면 윤회가 눈병이 날까 두렵다면서 쉴 것을 권한 것이 거의 10년 전이었다. 눈병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밥 먹을 때도, 아플 때도 ‘언제나 책 곁에’

    집현전 학사들의 연구와 토론 장면을 그린 ‘집현전 학사도’.

    눈병을 초래할 정도로 읽어댄 이 독서왕의 지식은 참으로 넓고 깊었다. 세종은 알려진 바와 같이 문학과 역사, 유학은 물론이고 언어학, 음악학, 천문학, 농학, 기계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지식을 쌓고 있었다. 조선 후기가 되면 극소수 일부 양반을 제외하고는 오직 중인들의 학문이 되었던 수학 역시 그의 관심 대상이었다. 그는 수학책 ‘계몽산(啓蒙算)’을 공부했고 정인지(鄭麟趾)는 질문에 대비하여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산수(算數)는 임금에게는 필요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성인께서 제정한 것이기에 나는 알고 싶다.”(‘세종실록’ 12년 10월23일) 제왕의 수학공부라! 국가 재정을 파악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해주고 싶지만, 사실은 그의 수학공부는 마르지 않는 지식욕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학·중국어 등 분야 구분 없이 읽어

    이뿐이 아니다. 세종은 중국어를 배우는 데도 열심이었다. 그는 주자소(鑄字所)에서 중국어로 번역한 책을 인쇄하게 하고, 중국어에 능한 신하에게 읽게 했다. 신하가 읽는 중국어를 한 번 듣고 완전히 기억하고는 “내가 중국어로 번역한 책을 배우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명나라 사신과 만났을 때 중국어를 알면 대답할 말을 빨리 생각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세종실록’ 5년 12월23일). 또 중국과의 외교에 필요한 중국어의 습득을 위해 베이징(北京)과 랴오둥(遼東)의 학교에 젊은이들을 유학시키려 했다. 중국의 거절로 없던 일이 됐지만, 의주의 젊은이들에게 랴오둥으로 오가는 기회를 자주 주어 중국어를 익히게 하자고 아이디어를 냈으니, 이 젊은 왕의 생각은 정말 크고도 넓었던 것이다.(‘세종실록’ 15년 12월13일)

    밥 먹을 때도, 아플 때도 ‘언제나 책 곁에’

    세종 23년(1441) 세계 최초로 발명된 측우기.

    다시 글의 첫머리에 인용했던, 세종이 죽던 날의 ‘실록’을 보자.

    - 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문사(文士)를 선발해서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였고, 경전과 역사책을 읽을 때면 즐거운 나머지 싫은 줄을 몰랐다. 희귀한 서적과 옛사람의 글을 한 번 보면 잊지 아니하였고, 거기서 증빙할 근거와 원용할 자료를 찾아내어 훌륭한 정치를 하고자 하는 데 정신을 쏟는 것이 시종여일했다. 그 결과 문(文)·무(武)의 정치가 모두 잘 이루어졌고, 예(禮)·악(樂)의 문화가 함께 일어났다. 종률(鍾律)과 역상(曆象)의 법은 우리 동방에서는 예전에는 알지 못하던 것으로, 모두 상(上)께서 직접 발명한 것이다.(‘세종실록’ 32년 2월17일) -

    주지하다시피 조선의 문화란 모두 세종 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화의 대부분은 세종의 두뇌에서 나왔다. 세종은 조선의 법과 제도, 문화를 창조했다. 나는 세종의 그 능력은 타고난 두뇌와 성실성에도 있겠지만, 절대 다수는 그의 쉼 없는 독서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쉼 없는 독서로 축적된 그의 굉박(宏博) 정심(精深)한 지식이 바로 조선의 법과 제도, 문화를 창조해낸 근거였다. 아마도 세종처럼 독서에 몰두했던 왕은 18세기 후반의 정조(正祖)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정조는 사대부의 권력이 더할 수 없이 커져버린 18세기 후반에 임금이 됐다. 그에 비해 확고한 왕권 위에서 문화 창조를 주도했던 세종은 얼마나 행복했던가.

    세종은 유교가 내세운 이상적인 정치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나는 세종을 민족주의 코드로 읽기 전에 굉박한 독서인과 자신의 소업에 충실했던 한 인간으로 보고 싶다. 지금 이 세상에는 정녕 세종과 같은 정치인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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