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6

2006.03.14

세계는 지금 잡종 상위시대… 순종주의는 가라

인종·문화·산업 등 전 분야에서 잡종강세… ‘저급한 것’ 편견은 시대착오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06-03-08 14: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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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는 지금 잡종 상위시대…  순종주의는 가라

    잡종강화의 미덕이 두드러지는 분야는 영화계다. 영화 ‘게이샤의 추억’과 ‘무극’.

    미국 최대의 스포츠 축제, 슈퍼볼의 MVP 하인스 워드. 스스로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한국계 혼혈인 그가 우리 사회에 던진 파장은 컸다. 언론의 발빠른 ‘영웅 만들기’가 빚어낸 워드 열풍은 한국 내 혼혈인 차별에 대한 때 늦은 자성으로 이어졌고, 한편으론 세계 유일의 단일민족이라는 혈통적 자부심에 바탕을 둔 우리의 배타적 민족주의가 과연 국경이 해체되는 글로벌 시대에도 합당한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하인스 워드, 타이거 우즈, 지단 등 출중한 혼혈인 대표사례

    그러나 실상 그와 같은 논란의 근저에서 엿볼 수 있는 좀더 근원적인 명제는 바로 ‘잡종강세(雜種强勢)’다. 생물학적으로 잡종강세는 종(種) 혹은 품종 간의 잡종이 그들의 양친보다 월등히 강건한 경우를 뜻한다. 암말과 수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노새, 수사자와 암호랑이의 교잡으로 탄생한 라이거(liger), 불독과 테리어의 혼혈로서 ‘맹견 중 맹견’으로 꼽히는 아메리칸 핏불테리어 등이 대표적인 본보기다.

    인간 사회도 다르지 않다. 최근 우리 드라마와 CF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는 혼혈 탤런트 다니엘 헤니와 데니스 오만 봐도 그렇다. ‘골프 천재’ 타이거 우즈는 또 어떤가. 전문가들은 그의 ‘출중한 능력’의 비결 중 하나로 그린베레 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태국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타고난 신체적 강점을 꼽는다. 강한 어깨와 탄력 있는 허리, 튼튼한 허벅지 근육의 조화가 폭발적인 에너지 분출에 안성맞춤이라는 것이다.

    ‘58년 개띠’로,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프랑스계 캐나다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마돈나는 데뷔 이후 가수이자 작곡가·영화배우로 20여 년을 승승장구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양성애자로도 알려져 있다.



    ‘아트 사커’의 주인공,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은 상당수 선수가 혼혈이다. 이른바 ‘톨레랑스 정신’에 입각한 다인종 융합정책을 취해 백인이 아니어도 프랑스 국민 자격을 주는 덕분이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혈통을 지닌 지단과 남아메리카 프랑스령 가이아나 출신인 앙리가 대표적이다.

    이들에게서 공통분모로 뽑아낼 수 있는 잡종성(hybridity)은 우리 생활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루의 일상을 되새김질해보자. 아침에 깨어난 당신은 스포츠웨어 정장을 입고 출근한 뒤 ‘짬짜면’으로 점심을 때운다. 퇴근 후엔 중국 배우 장쯔이가 주연한 할리우드 영화 ‘게이샤의 추억’을 관람하거나 하이브리드형 스포츠인 이종격투기 프로그램을 본 뒤 한옥 스타일로 리모델링한 아파트에서 잠든다. 거실은 향토적 서정이 깃든 장독으로 장식돼 있다. 현대는 바야흐로 잡종문화가 살아 숨쉬는 ‘하이브리드 사회(hybrid society)’인 것이다.

    세계는 지금 잡종 상위시대…  순종주의는 가라

    잡종강세는 인간 사회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왜 하이브리드인가.

    “새로운 모든 것은 잡종화 과정을 거쳐야 탄생한다. 그 대상이 동식물인 경우 잡종강세의 형태로 나타나고, 인간 사회라면 ‘잡종강화’의 성격을 띠게 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잡종화를 자신의 ‘창조적 진화’로 이끄는 인위적 관리가 수반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잡탕’이 되고 만다.”

    한국항공대 최봉영 교수(한국학)는 “각국이 무한경쟁을 펼치는 세계화 시대에서 개인, 집단, 국가의 발전은 잡종강화를 구현해내는 능력에 달려 있기 때문에 명분이나 따져가며 기존 권력관계를 고착하려 하는 정치계를 제외하곤 문화 등 다른 분야에서는 필연적으로 잡종화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최 교수는 ‘잡종 천국’인 미국이 세계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끊임없이 잡종강화를 거듭해온 덕분으로 풀이한다. 때론 고립주의 전략을 택하면서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잡종강화를 위한 개방화 정책을 펴는 혼성적 태도가 미국의 ‘잡탕화’를 막을 수 있었다는 것. 이는 결국 철학적으로 ‘실용주의’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하이브리드는 이처럼 ‘이것 아니면 저것’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를 배격한다. 바로 여기서 ‘잡종=저급’이라는 편견은 산산이 부서진다.

    잡종강화의 ‘미학’이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는 단연 대중문화계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선두에 서 있다. 철학과 사이버펑크, 홍콩 누아르와 무협 등 갖가지 이질적 장르를 맛깔나게 버무린 ‘매트릭스’ 시리즈는 말할 것도 없고, 2005년 12월 현지 개봉 당시 중국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 신기록을 세운 첸 카이거 감독의 영화 ‘무극’ 또한 장동건 등 한류스타와 중국·일본을 대표하는 톱스타들이 출연해 탈국적성을 보였다. 영화 OST에도 독일 작곡가의 곡들을 담았다.

    영화제작사 ‘아이필름’ 마케팅실의 임승희 대리는 “최근 아시아 각국이 공동으로 만든 대작 영화들은 각기 자국의 강점, 예컨대 한류스타, 홍콩(중국)의 제작시스템, 일본의 마케팅 등을 결합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데 이는 할리우드 영화에 대적하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며 “단순히 흥행성적만을 노린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두 개체 이상이 한데 어우러지는 조류는 산업계에서도 돋보인다. 휘발유와 전기를 모두 연료로 사용하는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조만간 세계 자동차시장을 주도할 전망이고, 휴대성과 공간 이용의 극대화를 꾀한 각종 디지털 기기는 ‘디지털 컨버전스’란 이름 아래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종교배’의 효율성은 기업 경영 면에서도 나타난다. 세계 초일류 기업 중 하나인 삼성그룹. 삼성맨들은 자신이 몸담은 조직의 강점이 어디에 기원한다고 믿고 있을까. 행정고시 출신으로 10년간 감사원에 근무하다 삼성에 스카우트됐던 현명관 전 전경련 상근부회장의 분석이다.

    세계는 지금 잡종 상위시대…  순종주의는 가라

    국제결혼 인구가 늘면서 한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는 깨지고 있다.

    “삼성의 강점은 정통 삼성맨이든 외부에서 영입한 인물이든 (양자를) 융화·융합시키는 환경과 능력이 탁월하다는 점이다. 순혈주의는 개인·기업·국가 등 어떤 조직을 살펴봐도 혼혈주의보다 경쟁력이 떨어진다. 이는 이미 지난 세기(20세기)에 증명된 바 있다. 여러 종류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화학적 융화를 이룬 국가와 기업이 국제적으로 탁월한 업적을 쏟아냈다. 미국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외국의 어떤 문화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그들 식으로 재해석해 세계에 전파한다. 삼성도 이런 혼혈주의적 문화에 있어 뒤처지지 않는다.”

    순혈주의(純血主義)로부터의 탈피가 급변하는 대내외적 환경 속에서 조직을 키워온 ‘삼성 신화’의 한 밑거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보수적’ 성향이 강한 학계에서는 순종주의의 틀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짙다. 물론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자연과학 범주 내의 다양한 분과학들 간의 경계는 점차 낮아지고 있다. 학제 간 연구나 공동연구에 대한 시도도 조금씩 늘고 있는 추세다. 한국학술진흥재단 관계자는 “우리 재단의 지난 3년간 연구비 지원 규모를 따지면 단독연구 대 공동연구의 비중이 4대 6 정도다”고 밝힌다.

    그럼에도 대학사회의 잡종강화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2월27일 정년퇴임한 이훈구 전 연세대 교수(사회심리학)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경우 교수의 10%를 타 대학 출신으로 충원해야 한다는 원칙을 정해놓고 있지만, 서울대는 95%의 교수를 모교 출신들로 채운다”며 “이는 곧 ‘그들만의 기득권’을 재생산해내는 배타적 구조를 공고히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이브리드 세상읽기’ 등 잡종학 관련 저서들을 출간한 바 있는 서울대 홍성욱 교수(과학기술사)는 스스로 ‘잡종적 지식인’임을 표방한다. 그는 하이브리드의 미덕을 극과 극의 경계를 허무는 ‘소통’에서 찾는다.

    “20세기 후반부터 나와 나의 밖, 자연과 사회, 진보와 보수 등으로 모든 대상을 이분화하는 근대성(모더니티)이 무너지면서 양극적 구분은 무의미해졌다. 중요한 것은 창의성이다. 창의성은 무에서 창조되지 않는다. 용이나 봉황 같은 전설 속 동물도 이미 존재하던 동물들의 이미지를 조합한 것 아닌가. 유리수와 실수가 있으니 무리수와 허수의 개념도 생겼다. 진정한 창의성은 ‘있는 것’들을 얼마나 잘 섞어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내는가 하는 능력이다. 결국 하이브리드는 양극단의 단절과 폐쇄를 깨뜨려 소통시키는 창의성의 근원이다.”(홍성욱 교수)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 … 잡종강화에 유리한 입지”

    그의 말대로 잡종이 ‘미천한 것’이나 ‘순수하지 않은 것’ ‘회색분자’쯤으로 폄훼되던 시대는 지났다. 실제로 한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도 깨지고 있다. 현재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70만명. 전체 인구의 1.5%에 이른다. 국제결혼 인구도 2004년 기준으로 3만5000쌍에 달할 만큼 늘었다.

    잡종강화가 경쟁력이라면, 우리는 그에 걸맞은 조건들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것일까. 이와 관련, 한국이 잡종강화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췄다는 반가운 주장이 있다. 동아대 차성수 교수(사회학)는 “인문학적 시각에서 볼 때 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와 그에 기인한 기질은 순종만 강조하는 이분법적 경계의 시대를 넘어 새 시대를 이끌어가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내다본다.

    만물신을 숭상한 반도국가 이탈리아가 유대 종교인 기독교를 변형·수용해 로마 기독교문화를 형성했고, 동서양의 접점인 터키 반도에서 양대 문명이 통합된 독특한 문화가 형성됐듯이 대륙과 섬, 육지와 바다를 연접한 한반도의 공간적 특성은 유입되는 다양한 문화를 융합시켜 독창적인 잡종문화를 재창조하는 데 적합하다는 것이다.

    잡종은 아름다운가, 아닌가. 잡종은 우수한가, 그렇지 않은가. 아름다움과 우수함은 지고지선인가, 아닌가.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이미 잡종강세가 21세기의 화두로 우리 곁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는 점이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는다.

    사족 하나. 그런데 편가르기를 일삼는 우리 정치권은 언제쯤 순혈주의를 털어내고 잡종강세를 이뤄낼 수 있을까.

    분단 이후 남북 문화는?

    개방화 南=잡종, 고립화 北=순종


    한국항공대 최봉영 교수는 2002년 12월 ‘본과 보기 문화이론’이란 저서를 통해 인간과 문화를 이해하는 새로운 이론틀로 ‘본과 보기 구조’라는 개념을 제시한 한국학 전공 학자다.

    ‘순종’과 ‘잡종’의 구분에 관한 그의 견해에 따르면, 대륙적 기질을 특징으로 한 중국의 문화는 본질적으로 잡종이다. 그 때문에 중국은 세계에서 잡종강화가 매우 광범위하게 이뤄지는 국가 중 하나다. 제국은 잡종성을 잃을 경우 제국으로서의 지위 또한 잃기 때문이다.

    반면 왕국의 경우 순종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에서 이미 영향력을 상실한 유교문화가 조선시대를 거쳐 아직껏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것이 그 한 예다. 그렇다면 분단 이후의 남과 북은 어떨까. 최 교수에 의하면 남한을 더 이상 순종 사회로 부르기는 힘들다고 한다. 열린 사회가 되면서 생활 전반에서 잡종화가 더욱 활발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여전히 고립화를 택하고 있는 북한은 역설적으로 ‘순종적’이다. 강력한 정치권력이 기득권을 고착화하고 있는 만큼 잡종강세가 끼어들 만한 여지가 없는 닫힌 사회구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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