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2

2006.02.14

고려 향한 일편단심 눈물과 그리움 한평생

무등산 자락에 정착해 정자 짓고 생활 … 조복 입고 통곡하며 송도 향해 절 올려

  •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입력2006-02-13 10: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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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향한 일편단심 눈물과 그리움 한평생
    광주 무등산 자락에서 가장 유서 깊은 동네로 성산계곡을 꼽을 수 있다. 조선시대 정원의 한 전형을 이루는 양산보(梁山甫)의 소쇄원과 임억령(林億齡)의 식영정이 있고 창평, 고읍에 이르면 오이정(吳以井)의 명옥헌, 정철(鄭澈)의 송강정과 송순(宋純)의 면앙정이 있어서 정자 문화가 꽃을 피웠던 곳이다.

    이 정자 문화의 원조가 계곡 가장 위쪽에 자리잡은 독수정(獨守亭)이다. 무등산뿐 아니라, 전라남도에서 가장 오래된 산정(山亭)이다. 정자의 주인은 고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전신민(全新民)이다. 그는 무등산과 특별한 연고가 없었다. 그저 개성으로부터 멀리 떠나와 머문 곳이 무등산 자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향도 아니고, 그의 부모가 살던 땅도 아니고, 처가 동네도 아니었다. 오가다가 눈여겨봐둔 땅도 아닌 듯하다. 지금도 예전의 풍광을 지니고 있을 만큼 산이 첩첩하고 옹색하다. 소쇄원이나 식영정이나 개울가에서 들판을 내려다보며 넉넉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공간이라면, 독수정은 첩첩산중에 자리하고 있다. 전신민은 이곳에 숨어살며, 무등산의 고려 때 이름인 서석산(瑞石山)에서 글자를 취하여 호를 서은(瑞隱)이라고 했다.

    그가 머문 동네는 소쇄원에서 2km 떨어진 담양군 남면 연천리의 산음동이다. 개울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전신민의 신도비가 있고, 그 옆에는 5대(代)에 걸쳐 아홉 효자가 난 전신민의 후손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비석 앞쪽으로 활처럼 휜 길을 따라 오르면 키가 훤칠한 고목들이 산자락을 가릴 정도로 가득하다.

    공민왕 때 병부상서 지낸 무인

    이곳이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된 독수정 원림(園林)이다. 원림에는 오래된 회화나무 3그루와 자미나무·매실나무가 있고,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다.



    원림 안에 또 하나의 비석이 있는데, 이는 전신민의 아들 전오돈(全五惇)을 기리는 기단비(基壇碑)다. 전오돈의 행적을 후손들이 오래도록 잊고 지내다가, 1470년에 작성된 전씨세보(全氏世譜)를 발견하고 그의 행적을 새롭게 확인하면서 세운 비석이다.

    전신민은 무인(武人)이었고, 그의 아들 전오돈 역시 무인이었다. 전신민은 공민왕 때 북도안무사 겸 병마원수를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까지 지냈다. 전오돈은 정오품 벼슬의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는데, 왜적을 무찌른 공로로 우왕(禑王)으로부터 금 50냥을 하사받은 적이 있었다. 그가 곧바로 금 50냥을 사양하자, 도당(都堂)에서 말하기를 임금께서 내린 것은 사양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오돈은 “그러면 이미 내 물건이 되었으니, 청컨대 도당에 올립니다”며 금 50냥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일을 두고 많은 이들이 칭송하였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고려 향한 일편단심 눈물과 그리움 한평생

    전신민은 독수정에 올라 통곡하며 절을 올렸다. 이태백의 시에서 이름을 따온 독수정(왼쪽). ‘서은실기’에 실려 있는 독수정 14경(오른쪽 위). 전신민은 무등산 산음동에 은거하다가 그곳에 묻혔다.

    전신민은 아들 오돈과 함께 무등산에 들어왔다. 처음엔 제계(齊溪)라는 동네에 살다가, 산 하나를 넘어 산음동에 터를 잡았다. 전신민은 재계정(宰溪亭)과 가정(稼亭)을 짓고, 조복(朝服)을 입은 뒤 그 정자에 올라 송도를 향해 통곡하며 절을 했다고 한다. 전신민이 나이 들어 두 정자를 오가는 것이 불편해지자, 전오돈은 아버지를 위해 집 앞에 독수정을 지어드렸다. 독수정은 이태백의 시 ‘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백이숙제는 누구인가, 서산(수양산)을 외롭게 지키다 굶어죽은 사람이라네]에서 따온 구절이다.

    독수정은 북향을 하고 있는데, 이는 송도(개경)를 염두에 둔 것이다. 독수정에서 100m도 안 떨어진 산 안쪽에 전신민이 살고 그 후손들이 대대로 살던 집이 있다. 집은 개축한 일자형 건물이고, 그 옆에 재실을 겸한 연천리 산음동 새마을회관이 새로 들어섰다. 전신민의 묘소는 그 집 뒷산에 자리잡고 있다. 활 한 바탕 거리인데, 누에등처럼 흘러내린 산자락에 자리잡은 묘에는 ‘瑞隱全先生之墓’라고 적힌 비석이 서 있다.

    스스로 ‘미사둔신’이라 칭해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하고 남은 여자를 미망인(未亡人)이라고 부르듯, 전신민은 스스로를 ‘미사둔신(未死遯臣·죽지 못하고 달아난 신하)’이라 칭했다. 독수정을 지을 무렵에 지은 그의 시가, 독수정을 지키고 있다.

    風塵漠漠我思長자욱이 이는 티끌 시름도 깊어라何處雲林寄老蒼어느 구름 숲에 늙은 몸을 숨길-고千里江湖雙雪머나먼 천 리 길에 흰 귀밑머리 나부끼고百年天地一悲凉한평생 천지간에 슬픔 가득 서늘해라 王孫芳草傷春恨임은 이미 가셨어도 한 많은 봄풀 돋고帝子花枝月光꽃가지 두견새는 달빛에 울음 우네卽此靑山可埋骨이 산골 푸름 두르고 백골로 묻힐지라도 誓將獨守結爲堂두 나라 아니 섬기리 홀로 지킬 집을 짓네

    독수정 건물은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후손들이 개축한 탓에 문화재로는 지정되지 못했다. 하지만 지역민들의 아쉬움이 컸는지, 독수정을 둘러싼 숲을 지방 기념물로 지정해 독수정 공간을 보호하고 있다. 독수정 마루에 앉으니 쓸쓸하고 적막하다. 한낮에도 인적이 드물어, 그 옛날처럼 서은공이 찾아와 한바탕 곡을 하고 갈 것만 같다.

    전신민의 후예들

    전신민의 후손은 300명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무등산 산음동에 들어온 뒤 전씨 집안은 간신히 이어져 내려왔다. 무인 집안이라 아무래도 사람을 여럿 해쳤을 테니 그 때문에 손이 귀한 듯하다고 한 후손은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산음동에 살았던 전규환 씨는 조선 명의로 소문나 전국각지에서 찾아오는 이가 많았다. 현재 문중 일은 전기종 씨가 맡고 있다.


    알 림

    。다음 호에는 밀성 박씨와 박익에 관한 글이 실립니다.
    。두문동 72현에 얽힌 얘기를 간직하고 있는 문중과 후손들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휴대전화 016-341-5045, e메일 twojobs@empal.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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