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1

2006.01.31

죽음으로 지켜낸 ‘가문의 절개’

형조판서 벼슬 받으러 가던 중 태재서 자결 … “비석 세우지 말라” 대대손손 강직 이어받아

  •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입력2006-01-26 11: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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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으로 지켜낸 ‘가문의 절개’

    묘비를 세우지 말라 하여 뉘어놓은 신도비. 원래는 땅에 묻어두었는데 근자에 땅 위로 올리고, 새로 비석을 만들어 세워놓았다.

    두문동 72현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는 죽음에 이르러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않고, 비석을 눕혀두었다. 김자수 묘는 경기도 분당 서현역에서 광주시 오포읍으로 넘어가는 태재마루 근처 오포읍 신현리 상태마을에 있다.

    고려 향한 충절 목숨 바쳐 실천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은 태종 13년(1413) 11월14일이다. 태종으로부터 형조판서로 부임하라는 전갈을 받고, 고향 안동에서 한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아들 근(根)이 초상 치를 준비를 갖추고 뒤를 따랐다. 김자수는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독약을 준비한 상태였다. 벼슬을 받으면 고려를 향한 충절을 저버리는 일이 되고, 벼슬을 받지 않으면 집안이 풍비박산 날 진퇴양난의 처지였다. 그가 추령(秋嶺, 현재의 태재로 추정)에 이르렀을 때 “나는 지금 죽을 것이다. 오직 신하의 절개를 다할 뿐이다. 내가 죽으면 바로 이곳에 묻고, 비석을 세우지 말라”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平生忠孝意 평생토록 지킨 충효 今日有誰知 오늘날 그 누가 알아주겠는가 一死吾休恨 한 번의 죽음 무엇을 한하랴만은 九原應有知 하늘은 마땅히 알아줌이 있으리라.

    김자수가 남긴 절명사(絶命詞)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태재에서 맞이한 것은 눈앞으로 한양 땅이 펼쳐지고, 등 뒤로 포은 정몽주(鄭夢周) 묘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 물러설 수 없는 선택의 시간이 온 것이다. 한양이냐, 정몽주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정몽주의 길을 택한다. 태재에서나, 그가 묻힌 곳에서나 직선거리로 4km 떨어진 곳에 정몽주의 묘가 있다.



    有忠有孝難 충이 있으면서 효가 있기는 어렵고 有孝有忠難 효가 있으면서 충이 있기도 어려운데 二者旣云得 이 두 가지를 이미 다 얻었건만 況又殺身難 하물며 살신의 어려움까지야.

    그의 죽음을 두고 황희(黃喜)가 지은 만사(輓詞)다. 그는 충신이면서도 지극한 효자였다. ‘삼강행실록’에 효행이 전할 정도로 효자의 표본이었다.

    김자수는 고려 충정왕 3년(1351)에 태어났다. 10세 때 아버지를 잃었고, 20세 되던 공민왕 19년(1370) 생원시에 합격, 개성 성균관에 입학한다. 당시 성균관 책임자는 대사성 이색(李穡)이었고, 선생으로 박상충(朴尙衷)·정몽주(鄭夢周)·김구용(金九容)·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이 있었다. 김자수는 성균관에 머문 지 1년이 안 되어, 편찮은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고향 안동으로 내려간다. 한겨울 얼음장 밑에서 잉어를 잡고 눈 덮인 대밭에서 죽순을 캐어 드렸지만 어머니의 수명을 연장시키지는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주자가례’에 따라 3년 시묘살이를 한다. 그때의 정경을 문익점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죽음으로 지켜낸 ‘가문의 절개’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에 있는 김자수의 묘. 산을 넘으면 정몽주의 묘가 있다(왼쪽 사진). 조선 후기 김자수 어머니 묘 앞에 세운 정자, 추원재.

    始見安東居堊子 처음에 안동에서 악차(堊次·무덤 옆의 뜸집)에 있는 사람 보았는데 剖氷求鯉自恢恢 얼음 깨고 잉어 구하여 무척 기뻐하더구먼. 筍生雪裏誠心厚 눈 속에서 죽순이 난 것은 참으로 효성이 지극함인데 雉下苦前孝烈開 거적자리 앞의 꿩이 내린 것은 효열(孝烈)의 열림이지.

    훗날 김자수의 효행과 시묘살이한 묘소 주변을 ‘시묘동(侍墓洞)’이라 부르고, 그가 살던 안동 남문 밖에 ‘孝子高麗道觀察使金自粹之里(효자고려도관찰사김자수지리)’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후 비석은 어머니 묘소가 있던 시묘골인 안동 월곡면 노산리로 옮겨졌다가, 월곡면이 안동댐으로 수몰되자 어머니 묘소와 정자 추원재(追遠齋)와 함께 1973년 안동시 안기동 정자골로 이전한다.

    명필 추사 김정희가 15대孫

    안기동으로 이전했을 때 앞에 하천이 흐르고 논밭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천이 복개되고 아파트가 들어서 주택가가 되었다. 김자수의 동네라고 칭해준 효자비 비각 안에는 순조 18년(1818)에 김노경(金魯敬)이 짓고 그의 아들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직접 쓴 글을 새긴 현판이 있었는데, 2005년에 누군가가 훔쳐갔다. 김정희는 김자수의 15대손으로 아버지와 선조의 묘를 찾은 것이었다.

    죽음으로 지켜낸 ‘가문의 절개’

    안동댐이 생기면서 안동시 안기동으로 옮겨진 김자수의 효자비와 비각.

    1374년 김자수는 문과에 장원급제, 사간원 정언(正言) 벼슬을 하다가 여수 돌산도로 귀양 가기도 했지만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형조판서를 지내다 고려가 망하자 안동으로 낙향한다. 그에게 아들 하나와 손자 넷이 있었다. 아들 근(根)은 평양소윤을 끝으로 아버지를 따라 벼슬을 버린 듯하다. 손자 넷은 조선 왕조에 합류, 벼슬길에 올랐는데 넷째 김영유(金永濡)가 대사헌과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김자수 고손자인 김세필(金世弼)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변론하다 유배되었고, 그의 아들 김저(金儲)는 을사사화 때 사사(賜死)되었다. 김자수 무덤에 차마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비석을 눕혀서 묻어둔 후손은 8대손인 김홍욱(金弘郁)이다. 김홍욱은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때 소현세자 강빈(姜嬪)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달라는 응지상소(應旨上訴·임금의 요청에 응해 올린 상소)를 올렸다가 효종이 직접 지휘한 심문을 받던 중 매 맞아 죽은 인물이다. 김홍욱은 죽음에 이르러 “언론을 가지고 살인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고 말할 정도로 대찼다. 김홍욱 자손 중 정승이 8명, 왕비가 1명이 나왔는데, 김정희도 그 자손이다. 추사 또한 지조가 강하고 타협하지 않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이상은 주로 경주 김씨 족보와 신도비에 기록된 행적을 중심으로 기술한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동국여지승람’에는 그가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그가 조선에 들어와 벼슬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는 때로 ‘조선왕조실록’의 진위 논란까지로 확대되는데, 대체로 1665년 영동의 초강서원에 김자수가 배향된 이후에는 가전(家傳)되어 오는 이야기가 우위를 확보한다.

    알 림

    *다음 호에는 천안 전씨와 전신민에 관한 글이 실립니다.
    *두문동 72현에 얽힌 얘기를 간직하고 있는 문중과 후손들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휴대전화 016-341-5045, e메일 twojobs@empal.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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