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7

2006.01.03

고향에 묻혀 인재 양성 한평생

고려 멸망 2년 전에 낙향 … 성리학 학통 이으며 조선 사림의 씨앗 뿌려

  •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입력2006-01-02 09: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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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에 묻혀 인재 양성 한평생

    구미시 도량동 밤실 사당에 있는 길재의 신위와 초상화.

    고려 말을 대표하는 충신으로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꼽는다. 여말 3은인 이들은 두문동 72현에 들지만 광덕산 두문동에 들어가지 않았다. 두문동 72현이 고려 말의 충신 집단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쓰이다 보니 벌어진 현상이다.

    길재(1353~1419)는 고려가 멸망하기 2년 전인 1390년(공양왕 2년) 봄에 낙향했다. 그의 나이 38세로 벼슬은 종사랑(從事朗) 문하주서(門下注書)였다. 종칠품이었으니 나이에 비해 한미한 직급이었다. 낙향의 명분은 “고향에 계신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고려 왕조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는 길에 황해도 장단현에 살던 이색(1328~96)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의 전경을 이색은 ‘목은집’에 남겨두었다.

    “경서에 능통한 태학의 선비/ 귀밑털 새파란 급제(及第) 주서(注書)가/ 가족을 이끌고 고향 가면서/ 내 말을 듣자고 거듭 다지네/ 글을 읽으면 옛사람 따라갈 거고/ 책(策) 지으면 조정에 오를 걸세/ 벼슬은 뜬 것이니 서두르지 말게/ 저기 저 날아가는 기러기 보게나.”

    영조 때 길재의 충절과 학덕 기려 채미정 건립



    고향에 묻혀 인재 양성 한평생

    길재의 묘소 앞쪽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지주중류비가 있다.

    이색은 젊은 길재에게 기러기를 가리켰고, 그 기러기에 마음을 실은 길재는 경상북도 선산에 위치한 금오산에 들어가 금오산인(金烏山人)이 되었다.

    지금은 구미가 선산보다 커서 구미시 선산읍이지만, 1978년까지만 해도 구미는 선산군 안에 있는 구미읍이었다. 금오산도립공원 어귀에는 채미정이 있다. 길재가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채미정은 길재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조선 영조 44년(1768)에 건립됐다. 중국의 백이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캐 먹던 고사에서 빌려와 ‘채미정(採薇亭)’이라 이름 지었다.

    채미정 아래 지금의 금오산 저수지에는 길재를 홀로 배향하는 금오서원이 있었다. 금오서원은 1570년에 건립돼 1575년(선조 8)에 사액서원이 됐고 임진왜란 때에 불타버렸다. 1602년 복원되었는데, 위치를 많이 옮겨 선산읍에 가까운 낙동강과 감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는 선산읍이 선산의 중심이었고, 선산의 선비들이 서원을 많이 출입했기에 그들의 편의를 위해 옮긴 것이었다.

    “조선 인물의 반은 영남에서, 영남 인물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두 길재의 영향 때문이다. 그 씨앗은 채미정에서 뿌려졌다. 김숙자(金叔滋, 1389~1456)는 선산 사람인데, 12세 때부터 길재에게서 ‘소학’과 경서를 배웠다. 김숙자는 그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에게 성리학의 학통을 이어주었고, 이 학통은 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정붕(鄭鵬)·박영(朴英)을 거쳐 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으로 내려가면서 거대한 영남 사림파를 형성하게 된다. 조선 중기 사림파의 뿌리는 길재에게서 비롯됐고 선산에서 싹텄다.

    고향에 묻혀 인재 양성 한평생

    길재가 11세 때 들어가 공부했던 도리사. 도리사를 창건한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내려다보고 있다. 금오산 자락에 있는 채미정. 길재의 고향 마을에 세워진 삼강정려각 안의 비석(왼쪽부터).

    길재가 살던 봉계리(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 마을 어귀에는 그를 기린 삼강정려각이 있다. 삼강정려각에는 봉한리 출신의 충신 길재, 효자 배숙기(裵淑綺), 조을생(趙乙生)의 처로 열녀 약가(藥哥)의 비와 현판이 있다. 봉한리 마을 안쪽, 죽림사 위쪽에는 근자에 건립한 길재 유허비가 있다. 길재는 외가 동네인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길재가 여덟 살 때 이 동네에서 가재를 잡다가 지은 시가 있다.

    “가재야 가재야/ 너도 어미를 잃었느냐/ 나도 어미 잃었다/ 내가 너를 삶아 먹을 줄은 알지만/ 네가 어미 잃은 것이 내 처지와 같아/ 너를 놓아주노라.”

    이색·정몽주 등에게서 학문 배워

    길재는 11세 때 냉산(지금의 태조산)의 도리사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도리사는 신라 불교가 처음 싹튼 곳으로, 아도화상(일명 墨胡子)이 수행했다는 좌선대가 있는 곳이다.

    길재는 18세 때에 벼슬살이하는 아버지를 찾아 개성으로 갔다. 그는 개성에서 이색, 정몽주, 권근(權近)에게서 학문을 배우게 된다. 길재는 학문에 임하는 자세가 남달랐다. 권근은 “내 뒤를 이을 학자는 몇 있을 터지만 길재보(再父는 길재의 자)가 독보(獨步)다”라고 했다.

    길재의 아버지 길원진(吉元進)은 보성대판과 금주(지금의 충남 금산)지사를 지냈다. 길재와 금산의 인연은 1383년에 길재가 금주지사로 있는 아버지를 찾아가면서 시작된다. 그때가 그의 나이 31세로 노총각이었다. 길재는 그곳에서 중랑장(中郞將·정오품 벼슬의 무관) 신면(申勉)의 막내딸과 혼인하게 된다. 신면은 현재 청풍사(淸風祠)가 있는 곳에서 2km가량 떨어진 토골에서 살았는데 땅을 많이 소유한 부호였다.

    길재가 혼인한 이듬해에 아버지 길원진이 근무지인 금주 관아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길재는 아버지를 고향으로 모셔가지 못하고 관아에서 장례를 치렀고, 묘소도 금산에 마련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묘 앞에 초막을 치고 삼년상을 지냈다. 불교식 장례가 널리 행해지고, 길어야 백 일이면 탈상하던 시절에 ‘주자가례’에 따른 것이다.

    현재 해평(海平) 길씨가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이 충남 금산인 것도 이런 인연 때문이다.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 해평 길씨 집성촌에 가면 길재를 기리는 사당 청풍사가 있다. 동네 이름이 부리면 불이리로, 발음이 같은 단어가 중복되어 있다. 부리(副利)는 삼한시대 때부터 전해오던 지명이고, 불이(不二)는 불사이군(不事二君)에서 따온 말이다. 길재가 살던 마을이라, 길재의 불사이군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런 지명을 조선시대에 붙였다.

    야은 길재는 고려의 충신이지만, 조선 왕조와 선비들에 의해 시대의 충신이자 효자로 추앙받았다. 조선의 통치이념이 된 성리학을 투철하게 실천했고, 조선 사림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받은 대접이었다. 길재 개인은 고려에 충실했지만, 그의 정신은 조선의 충실한 표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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