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7

2006.01.03

국화꽃 그녀, 연기 날개를 달다

  • 입력2006-01-02 08: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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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화꽃 그녀, 연기 날개를 달다
    청연’의 첫 시사회가 있던 날, 장진영은 영화 속에서 그녀가 맡았던 배역인 박경원처럼 파마 머리에 버버리의 체크무늬 원피스를 입고 등장했다. 그녀에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사람만이 갖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다. 나도 오늘 처음 보기 때문에 매우 설렌다”라고 말하긴 했지만 ‘소름’으로 이미 인연이 있는 윤종찬 감독에 대한 강한 신뢰 때문인지, 작품성에 의문을 갖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장진영이 배우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윤 감독의 데뷔작 ‘소름’부터다. 물론 그 이전엔 그녀가 배우가 아니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장진영이 한 사람의 연기자로서 자신만이 지닌 독창적인 색깔과 무늬를 보여주기 시작한 첫 작품은 의심할 나위 없이 ‘소름’이다.

    1974년생인 장진영은 올해 32살이다. 예전 같으면 여배우로서의 전성기가 지난 나이지만, 그녀는 뒤늦게 연기자로 빛을 본 경우다. 1992년 미스 충남 진을 거쳐 상명대 의상학과를 다니면서 TV 탤런트로 활동하며 ‘순풍산부인과’ 등에 출연할 때만 해도 그녀를 한 사람의 진정한 배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영화 데뷔작은 이광훈 감독의 ‘자귀모’(1999년). 그 다음 해인 2000년에 ‘싸이렌’에 출연했지만 깊은 인상은 남기지 못했다. 그녀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반칙왕’(2000년)부터였다. 송강호의 첫 주연작이기도 한 이 작품에서 그녀는 체육관장의 딸인 민영 역을 맡았지만 연기력은 기대 이하였다. 하지만 어설프면서도 무엇인가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소름’(2001년)을 찍었다. 섬뜩한 공포에, 피가 사방에 낭자하고 깜짝 놀라게 하는 음향으로 뒤통수를 후려치는 그런 공포영화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는 것 같은 심리적 공포를 윤 감독은 뛰어나게 형상화했다. 장진영은 ‘소름’의 선영 역으로 청룡상 여우주연상, 스페인 시체스 영화제 여우주연상, 포르투칼의 판타스포르테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연이어 차지했다.

    한국 최초 민간 여류비행사 박경원 역할에 올인

    ‘오버 더 레인보우’(2002년) 같은 범작을 거쳐 ‘싱글즈’(2003년)에서는 유쾌한 싱글 나난 역으로 연기력의 확대를 꾀한다. ‘싱글즈’는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연출력에서는 미흡한 작품이었다. 그 부분을 보완해준 것이 배우들의 연기력이었다. 특히 장진영의 경쾌하면서도 깊이 있는 연기는 작품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범상한 멜로 ‘국화꽃 향기’의 민희재 역을 거쳐 그녀는 ‘청연’을 찍는다.

    ‘청연’은 장진영 단독 주연 작품이다.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로 알려진 박경원의 일대기를 기록한 이 영화는, 시사회를 마치고 개봉을 앞두고 있는 현재, 박경원의 친일 행적 논란에 싸여 있다.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도 박경원보다 앞서 중국에서 중국군으로 입대해 항일투쟁을 했던 권귀옥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박경원은 한국 최초의 민간 여류비행사라는 말이 정확하다.

    국화꽃 그녀, 연기 날개를 달다

    한국 최초의 민간 여류비행사 박경원의 일대기를 기록한 영화 ‘청연’에서 장진영은 거의 혼자서 극을 이끌어간다.

    ‘청연’은 순 제작비만 100억원 가까이 투입된 블록버스터다. ‘태풍’의 제작비 150억원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의 2배 이상이 투입된 이 영화는 중간에 제작비가 원활하게 조달되지 못해서 제작이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박경원이 사랑했던 한지혁 역에 김주혁이, 박경원과 최고의 여류비행사 자리를 놓고 경쟁관계에 있었던 일본인 기베 역에 유민, 그리고 한지혁을 사이에 두고 애정싸움을 벌이는 이정희 역에 한지민 등이 출연하지만, 영화 전체에서 박경원 역의 장진영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다.

    장진영과 김주혁은 이미 ‘싱글즈’에서도 연인 사이였다. 약간 공주병 증세가 있지만 상상력이 풍부하고 엉뚱한 나난 역의 장진영은 매우 귀여운 이미지로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괜찮은 싱글의 삶을 만끽하고 있는 그녀에게 멋진 남자 수헌(김주혁 분)이 프러포즈를 한다. 시사회에서 김주혁이 말한 대로, 장진영은 박경원 역에 ‘올인하는’ 느낌을 준다. 당연한 일이다. 여배우로서는 평생 한 번 만날 수 있을까 말까 하는 큰 역이기 때문이다.

    ‘청연’에서는 수없이 많은 비행 장면이 나오지만 장진영은 “실제로 비행할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비행 작동법이 그렇게 어렵지 않기 때문에 완벽한 이론 공부로 실제처럼 연기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1901년생인 박경원이 열 살 되던 해인 1910년부터 시작되는 영화는 비행사의 꿈을 안고 일본 비행학교에 입학한 1925년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수많은 난관을 뚫고 최고의 여류비행사로 인정받기까지의 힘겨운 과정이 선 굵으면서도 섬세한 연출력과 장진영의 뛰어난 연기에 힘입어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처음 ‘청연’의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눈물을 흘렸다. 나보다 훨씬 이전에 살았던 여자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그녀의 열정은 지금 여성들이 꿈꾸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우 현대적인 여성이었다. 한 가지 꿈을 위해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다는 것, 나와는 상당히 다른 부분이다.”

    국화꽃 그녀, 연기 날개를 달다

    그녀를 대중적으로 알린 영화 ‘소름’과 ‘싱글즈’.

    김주혁과 호흡 맞춰 … 실제 비행은 안 해

    윤 감독의 장점은 결코 상투적으로 연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름’에서 장진영은 인간 한계의 극한까지 가는 경험을 했다. 찍고 또 찍고, NG를 수없이 내면서 감독은 계속 배우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했다. 장진영은 “결코 이전까지는 어떤 연출자도 그런 요구를 한 적이 없다” 말했다. 그런 힘든 과정을 거쳐 장진영은 비로소 한 사람의 연기자로 거듭났다. 그런 통과제의가 ‘청연’을 제작할 때 부딪힌 난관을 극복하는 힘이 되어주었다.

    “결국 연기란 혼자 하는 거다. 다른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는 없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해결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수없이 NG가 나고, 체력이 바닥나는 상황에까지 가도 다시 힘을 내게 된다.”

    ‘청연’은 박경원의 친일 행적 논란과 별도로 영화 자체로만 생각한다면, 상당히 잘 만든 드라마다. 비행사가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이루어가는 박경원의 집념이 잘 살아 있다. 윤 감독은 강약의 리듬과 흐름의 완급을 조절할 줄 아는 감독이다. ‘청연’에 묘사된 사건은 실제와 많은 부분 차이가 난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픽션이 추가되었다. 하지만 윤 감독은 “박경원의 친일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그 부분은 결코 각색하지 않았다. 다만 영화로서 봐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경원의 친일 행적을 두고 논란이 증폭되면서 가장 안타까운 마음을 갖는 사람은 장진영일 것이다.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박경원 역을 연기했다. 부천에 1930년대 초반의 도쿄 거리를 만들었고, 일본 비행학교와 댄스홀은 중국 창춘 스튜디오에서, 그리고 공중촬영은 미국 LA 부근 사막에서 찍었다. 일본 로케까지 모두 4개국을 넘나들며 11개월 동안 찍었고, 8개월 동안 후반 작업을 하며 CG와 미니어처 촬영을 보탰다.

    ‘소름’ 이후 장진영 연기의 분수령이 될 ‘청연’이 친일 시비에 휩싸이는 것은 영화의 상업적 흥행을 위해서는 결코 청신호가 못 된다.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의 경우, 영화적 구성을 위해 현실을 어디까지 각색할 수 있을 것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아무리 허구적 구조를 갖는 영화라 해도 역사적 현실이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어느 경우라도 장진영의 울림 있는 연기는 오래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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