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7

2006.01.03

무너진 비닐하우스, 주저앉은 農心

‘망연자실’ 호남 폭설 피해 현장… 집도 축사도 눈더미에 쑥대밭, 농민들 “어떻게 사나”

  • 정승호/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shjung@donga.com

    입력2005-12-28 15: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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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에 구멍이 뚫렸당께. 인자 눈이 징혀요, 징혀.”

    2005년 12월22일 전남 나주시 산포면 덕례리. 국도 1호선 광주-목포 간 도로변에 있는 이 마을은 온통 하얀 이불을 덮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릎까지 차오른 눈 때문에 어디가 논이고 어디가 길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폭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 비닐하우스 수십 동이 눈에 띄었다. ‘설마(雪魔)’가 휩쓸고 간 마을은 한마디로 처참했다.

    “60평생 살아왔지만 이런 눈은 처음이구먼. 녹을 만하면 내리고 한번 쏟아지면 30cm가 넘게 쌓이니 비닐하우스가 어떻게 버티겄소.”

    이 마을 황일준(42) 이장은 “밤새 폭설이 내린 날이면 또 몇 개 동이 주저앉을지 몰라 집을 나서기가 겁이 난다”며 “겨우 세워놓은 비닐하우스가 무너질 때는 복구할 의욕조차 생기지 않는다”고 허탈해했다. 이 마을은 12월4일부터 계속된 폭설로 전체 비닐하우스 400여 동 가운데 110동이 부서졌다.

    하루 50cm 눈에 속수무책 당해



    500평 비닐하우스에 고추를 심은 송야님(54·여) 씨는 이날 오전 마을 사람 세 명과 함께 절반쯤 무너진 비닐하우스에서 고추를 따려다가 포기했다. 온전한 것을 조금이라도 건져볼 생각이었으나 하우스가 언제 주저앉을지 몰라 빠져나온 것. 그는 “이곳에서 고추를 심고 열무와 수박도 재배해 연간 3000만원은 거뜬히 벌었는데 이제 뭘로 먹고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겨울철 난방비가 많이 드는 시설하우스 농가들은 폭설에다 고유가까지 겹쳐 이중고를 겪고 있다. 폭설과 한파로 경유 사용량이 2004년에 비해 20%가량 늘어난 데다 기름값도 2004년보다 30%나 오른 ℓ당 600원대에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호박을 재배하는 서용렬(59) 씨는 “하우스 내 온도를 13℃ 정도로 맞춰야 하는데 기름값이 워낙 비싼 데다 구하기도 힘들어 8℃ 정도로 유지하고 있다”며 “폭설 피해를 본 농가에 대해서는 정부가 면세유를 확대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마을에서 4km 정도 떨어진 문평면 금옥마을 배 과수원. 어른 허벅지만한 배 나뭇가지가 속살을 드러낸 채 부러져 있었다. 꺾인 가지는 40cm 넘게 쌓인 눈 속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과수원 주인 서상기(40) 씨는 “까치 피해를 막기 위해 7년 전 2000만원을 들여 설치한 그물망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바람에 나뭇가지가 꺾였다”며 “부러진 나무를 모두 파내고 싶어도 복구비가 만만치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루 사이에 50cm가 넘는 기록적인 눈이 내린 전남 장성군 황룡면 월평마을.

    1000평 규모의 방울토마토가 간밤 내린 눈에 폭삭 주저앉자 정문갑(48) 씨는 망연자실했다. 내리는 눈을 녹이기 위해 밤새 온풍기를 틀어놓았지만 한꺼번에 퍼붓는 눈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지름 40mm 철제 파이프는 휘다 못해 모두 끊어져버렸다. 12월4일 첫 폭설 때 비닐하우스 중간 부분이 조금 내려앉은 피해를 입었던 정 씨는 “군 장병들이 와서 내려앉은 부분을 일으켜 세워주기로 했는데 이제 복구 손길마저 필요 없게 됐다”며 “하늘이 왜 우리한테 이런 재앙을 내리는지 원망스러울 뿐”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장성군 장성읍에 위치한 전남도 해양바이오산업연구원 산하 내수면 시험장도 말 그대로 ‘눈폭탄’을 맞은 모습이었다. 226평 규모의 철골 패널 구조인 시험연구동 지붕이 전날 오후 4시경 내려앉은 것. 이곳은 철갑상어 27마리와 뱀장어, 연어 치어를 양식하던 핵심 공간이다. 직원 김희중(37) 씨는 “쌓인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양쪽 벽이 기울기 시작하더니 1시간여가 지난 뒤‘우지끈’ 소리를 내며 지붕 한가운데가 폭삭 주저앉았다”고 말했다.

    ‘눈 감옥’에 갇힌 것은 전북도 마찬가지. 축산 단지인 정읍시 덕천면 도계마을은 12월21일 내린 눈이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4일 폭설로 단지 내 26농가 가운데 12농가의 축사 지붕이 무너져 간신히 복구했는데, 이번 눈으로 추가 피해를 입었다.

    “16일까지 멀쩡했던 축사 지붕이 이번 눈으로 완전히 못쓰게 됐습니다.”

    축사 지붕 복구했더니 또 눈에 무너져

    젖소와 한우 300여 마리를 사육하던 축사와 부대시설 3000여 평이 부서지는 피해를 입은 김동규(55) 씨는 “평생 이런 눈은 처음”이라며 “눈의 위력이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젖소 40마리를 키우는 김홍도(44) 씨도 “이번 눈으로 300평의 축사가 붕괴돼 인근 농가 축사에 임시 수용을 했다”며 “착유 등에 어려움이 많아 전량 처분하려고 했으나 물어보는 사람조차 없다”고 한숨지었다.

    이번 폭설로 인한 피해액은 12월22일 현재 전남이 1562억원, 전북 520억원, 광주 84억원 등으로 집계됐다. 여기에는 농작물이나 축산 등 생물 피해가 포함되지 않아 피해조사가 끝나면 전체 피해액은 지금보다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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