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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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듣고 싶다! 김·광·석

순수하고 강렬했던 ‘통기타 정신의 파수꾼’ … 우리를 웃고 울리던 그 명징한 울림

  • 강헌/ 대중음악평론가 authodox@empal.com

    입력2005-12-07 14: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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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듣고 싶다! 김·광·석

    고 김광석 씨의 사망 10주기가 다가왔지만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했던 가수에 대한 기억은 점차 대중으로부터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가 수집했던 악기들은 현재 제대로 보관돼지 못해 기념사업에 차질을 빚고 있다.

    이미 이뤄놓은 것보다 앞으로 이룰 것이 더 많은 이가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버리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다. 우리 대중음악사의 70년대를 아로새겼던 김정호가 그러했고, 80년대 중반엔 유재하가 그러했으며, 90년대가 막 시작하는 시점엔 김현식의 묘비명이 있었다. 그리고 소극장의 영원한 황태자 김광석을 떠올린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12월로 꼭 10년이 된다.

    김광석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기

    3주일쯤 전 나는 홍대 앞의 ‘블루스 하우스’에서 그를 인터뷰하고 있었다. 물론 그보다 10년쯤 전부터 그와 난 알고 있는 사이였고, 또 노찾사라는 울타리 안에서 어정쩡한 동료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마이크 없이 노래를 불렀어!”

    왜냐하면 나는 그가 뛰어난 대중적 친화력을 가졌지만 90년대 한국 포크음악의 계승자이자 수호자가 되기에는 포크 아티스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인 작사·작곡 능력이, 그리고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통찰력의 깊이가 좀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계속 비판해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마지막 정규 앨범이 된 네 번째 앨범의 머리곡인 ‘일어나’가 일본 뮤지션 츠요시 나가부치의 노래를 표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에 분위기는 냉랭할 수밖에 없었다.



    낮부터 술 한잔씩을 곁들이면서 시작된 인터뷰 분위기는 저녁으로 접어들어 점점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바에 앉은 그의 옆모습이 피곤해 보였다. 그는 문득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시 듣고 싶다! 김·광·석

    생전 그가 남긴 다이어리와 각종 앨범들. 그의 유일한 혈육인 딸 사진이 보인다.

    “형, 나 포크뮤지션 아냐. 그냥 가수야.”

    못 살게 구는(?) 어설픈 평론가에 대한 섭섭함보다는 80년대의 한복판을 관통해온 그의 내면적 고뇌가 느껴졌다. 이 말을 내뱉을 때 그의 표정은 너무나 간절했다.

    물론, 무대에 선 김광석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음은 말할 것도 없다. 싱싱한 예지로 충만한 그의 따뜻하면서도 지적인 목소리의 울림, 순식간에 극장 안을 소박한 공동체로 묶어가는 놀라운 호소력. 그는 진정으로 통기타를 든 카페의 마이스터였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나와 그 시대의 동반자들은 더욱 그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말했다.

    다시 듣고 싶다! 김·광·석
    “… 나의 무대를 찾는 관객들은 제각기 다른 기대를 가슴에 안고 무대를 지켜본다. 특히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하는 소극장 무대에선 눈빛만 마주쳐도 알 수 있다. 그 각각의 기대를 얼마나 만족시켜 줄 것인가가 관건이다.

    그럴 때 나는 광대다. 무대의 나와 객석의 관객이 혼연일체가 되어 고양될 때 우리는 모두 잠깐이나마 해방을 맛본다. 나의 많은 노래들 중에서 ‘이등병의 편지’를 부를 때가 특히 그러한데, 장교로 복무하다 돌아가신 형님에 대한 기억 때문에 나의 감정은 더욱 고조되고, 와이셔츠를 입은 관객들이 또한 이 노래의 동심원 속으로 합일되는 저릿한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렇다. 결국 무대는 ‘놀’ 장소다. 닫힌 마음이 열리지 않는 무대는 양쪽 모두에게 의미가 없다. 이 이외의 목적이 무대에선 존재하면 안 된다. 최근의 일이다. 중구청 구민회의 초청을 받아서 무대에 섰는데, 그만 앰프가 다 타버렸다. 주최 측은 사인회나 하고 가라고 했다.

    앰프가 없다고 노래 못하는가? 나는 관객들에게 앞쪽으로 좁혀 앉으라고 부탁하고 마이크 없이 노래를 불렀다. 스피커를 통해 증폭된 소리가 울려 퍼질 때보다 관객들과의 교감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고, 어쩌면 이것이 진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기타야말로 저 70년대의 청년문화의 융기 이후 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청년 인텔리겐치아가 세상과의 음악적 의사소통을 꾀했던 가장 훌륭한 영매였다. 통기타 음악, 곧 포크 음악은 기술적인 세련됨이나 사운드의 화려함보다는 그것을 노래하는 인간의 진실됨을 더욱 요구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갈증이 시간이 더할수록 뜨거워져간 70년대와 80년대의 청년 지식인들이 이 음악을 자신의 대표적인 문화로 택한 것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었다.

    대학가와 동숭동의 소극장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온 김광석의 짧지 않은 음악적 연대기는 광주로부터 북상한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으로 뜨거웠던 80년대 전반의 대학에서 시작된다. 대학의 저항가들을 담은 비합법 노래책을 통해 대안의 음악에 눈뜬 그는 서울 지역 대학 연합노래패 ‘메아리’라는 모임에 참가하게 되고, 그 활동은 막 나래를 펼치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창단으로 이어진다.

    ‘다시 부르기’ 두 장의 앨범 큰 성과

    김광석의 이름이 공식적으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4년 김민기가 대학가의 노래운동의 주역들을 규합하여 만든 합법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의 ‘남자들’의 목소리의 일원으로서였다. 그러나 그의 비범한 가창력은 그 이후 노래운동의 공연장에서 곧바로 증명되었고(가령 비합법 실황음반 ‘또다시 들을 빼앗겨’에 수록된 ‘이 산하에’ 같은), 87년 6월항쟁 직후 기독교 백주년기념회관에서 열렸던 노찾사의 첫 번째 공식 공연에서 그는 ‘녹두꽃’으로 가득 찬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다시 듣고 싶다! 김·광·석

    생전 그가 직접 만들었던 악보들.

    그러나 그가 본격적인 직업 음악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노찾사가 아니라 80년대 대학가의 또 다른 감수성을 형상화한 그룹인 ‘동물원’이었다. 김창기, 유준열, 박기영 등 재기 넘치는 청년들이 결집한 동물원은 88년의 데뷔 앨범과 그것의 성공을 이어간 이듬해의 두 번째 앨범을 통해 정치적 전복의 감수성이 닿지 못한 서정성의 빈 곳을 채웠다.

    동물원 시절의 이 ‘작은 아름다움’의 노선은 그가 솔로로 전향한 이후 그의 음악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는다. 따라서 80년대를 마감하는 해에 솔로로 데뷔한 뒤의 그의 음악적 과제는 결국 노찾사와 동물원의 음악적 이념을 발전적으로 결합하는 작업이 될 것임은 거의 자명하다고 할 것이다.

    의욕적으로 여섯 곡의 자작곡을 수록한 그의 데뷔 앨범은 그러나 어정쩡한 것이었고, 비제도권과 제도권을 통틀어 질주해온 그의 여정은 잠시 점검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슬픈 우연’은 평범한 주류 문법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았고, ‘내 꿈’은 아직 찾아지지 않았으며, ‘내 마음의 문을 열어줘’는 열림의 에너지를 분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초로 닥쳐온 이 시련을 걷어버리는 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91년 두 번째 앨범의 ‘사랑했지만’을 내세워 이른바 스타덤에 올라섰고 쉴새없는 소극장 공연을 통해 ‘통기타 정신의 파수꾼’으로서 트레이드마크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성공은 이미 많은 후퇴를 전제하는 것이었다. 이 앨범의 대부분을 다른 작곡가의 것으로 채웠고, ‘사랑했지만’의 뒤를 잇는 ‘꽃’(‘광야에서’의 작곡가 문대현의 곡) 역시 앞의 곡과 균형을 이루진 못했다. 다만 뒷면의 머리곡이자 유일한 자작곡인 ‘슬픈 노래’만이 희망을 유예시키는 데 기여했을 뿐이다.

    두 번째 앨범의 상업적 성공을 바탕으로 그는 모던포크의 핵심을 향해 신발끈을 조여맨다. 세 번째 앨범에 임한 김광석의 전략은 김민기의 후예들이자 70년대 말의 대학가 노래운동의 숨은 주역들인 한동헌과 한돌의 소박하고 건강한 미의식을 되살려내는 것이었다. 행진곡의 리듬과 과격한 정치 선동으로 무장한 저항가의 원심력에 밀려 ‘소시민적’이라는 딱지를 받고 밀려나 있었던 ‘나의 노래’와 ‘외사랑’, 그리고 ‘나무’는 김광석에 의해 새로운 옷을 입고 무대에 다시 나타난다.

    통기타와 하모니카, 그리고 음유시인적 이미지가 완전히 정착한 것도 이 지점이며, 서구 대중음악의 영향 아래 때마침 일기 시작한 ‘언플러그드 붐’은 기존의 언더그라운드 이미지에 더욱 빛나는 훈장을 그에게 달아주었다.

    바로 이때 그는 ‘다시 부르기’라는 이름의 리메이크 기획을 시작한다. 어쩌면 그의 오리지널 정규 앨범보다도 더 큰 음악적 성과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 두 장의 ‘다시 부르기’ 앨범은 붕어빵 찍어내듯이 쏟아지고 있는 작금의 리메이크 앨범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순수하고 강렬한 향기가 감돈다.

    다시 듣고 싶다! 김·광·석

    그룹 동물원 시절의 김광석 씨 모습.

    그는 93년에 리메이크로 전곡을 채운 ‘다시 부르기1’로 공전의 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생애에 마지막이 된 95년의 ‘다시 부르기2’로 그 성공의 맥을 이어나갔다. 그는 정규 앨범 사이에 라이브 앨범 대신 한국 모던포크 역사의 명장면들을 반추함으로써 폭넓은 수용의 계기를 제공하는 데 성공했다.

    윤도현의 음악적 출발점이었던 파주의 포크그룹 종이연의 리더 김현성이 만들고 김민기가 기획한 겨레의 노래 프로젝트에서 들국화 출신의 전인권이 불렀던 ‘이등병의 편지’를 김광석 특유의 명징하고 촉촉한 톤으로 새롭게 탄생시켜 대중의 귀에 안전하게 착륙시킨다.

    특히 뛰어난 편곡 감각과 연주력, 그리고 연주자들의 하모니로 숱한 명반을 남겼던 조동익과 그의 세션 동료들이 만든 ‘다시 부르기2’는 조동익이 참여한 숱한 걸작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앨범의 하나로 손꼽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리메이크는 단순한 동어반복이 아니다. 게다가 쉴새없이 새로운 노래들로 대체되는 이 속도 경쟁의 문화 상황에서 그것은 음악을 하고 있는 바로 자신의 역사성을 규명하려는 작업이고, 수용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즐기고 있는 음악의 근원을 추적할 수 있는 다리를 놓아주는 중요한 작업이며, 이와 동시에 양쪽 모두에게 음악적 감수성을 다양하게 변주하는 스타일의 실험무대인 것이다.

    김광석이 떠난 빈자리는 10년이 지나도록 채워지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그의 후계자를 기다렸지만 지난 10년 동안 새로운 목소리는 출현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가 깨달은 것은 그의 노래는 어느 누구로부터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로서 족한 것이다. 그는 죽어서도 우리를 따뜻하고 슬프게 만들어줄 것이다. 특히 다종다양한 고통으로 어지러운 이 겨울에.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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