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0

2016.10.26

박정배의 food in the city

식재료 살리는 전통과 글로벌의 향연

제주 표선면의 맛집

  • 푸드칼럼니스트 whitesudal@naver.com

    입력2016-10-21 18:2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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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사람은 거센 비가 내려야 제주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제주를 찾은 날 제법 거센 비가 내렸다. 오후 4시 서귀포시 표선면에 있는 ‘춘자멸치국수’에 앉아 멸치 국수 한 그릇을 먹었다. 주인 강춘자 할머니는 단골 할아버지와 마주 앉아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다. 다른 할머니가 국수를 말아주는데 양은냄비에 담겨 나온다. 진한 멸치 육수에 공장제 중면이 동글한 모습으로 담겨 있다. 그 위에 붉고 선명하게 뿌려진 고춧가루. 죽음처럼 선명하고 늙음처럼 순한 맛이다. 취기가 살짝 오른 옆자리 어르신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 방언으로 추억을 더듬는다. 멸치국수 값으로 3000원 내고 가게를 나섰다.

    ‘춘자멸치국수’에서 걸어서 20분쯤 가면 해안가에 있는 해비치호텔이 나온다. 이 호텔에 자리 잡은 제주 최초 프렌치 레스토랑 ‘밀리우’는 박무현이라는 젊은 셰프 덕에 유명해졌다. 영국 ‘팻 덕(Fat Duck)’, 남아프리카공화국 ‘더 테스트 키친(The Test Kitchen)’ 같은 세계적인 레스토랑에서 수석 부셰프까지 거친 실력파가 셰프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프렌치 요리를 기본으로 하지만 한국, 미국, 영국, 호주, 남아공 요리를 두루 섭렵해 ‘모던 인터내셔널 퀴진’이라는 이름을 달고 영업 중이다. 제주의 풍부한 식재료가 그의 세련된 기술과 창조적인 레시피를 통해 재탄생하는 공간이다.

    특히 ‘밀리우’는 푸드랩이라는 음식 실험실을 갖추고 있다. 제주산 고등어에 유자와 사과를 곁들여 제주 일출을 재현한 요리, 옥돔 하나만으로 만든 코스 요리 등 다양한 실험과 시도가 멋진 접시 위에 그림처럼 연출된다. 이맘때는 가을에 제맛을 내는 제주 잿방어나 돌문어가 주재료로 사용된다. 제주 고기국수나 흑돼지를 이용한 음식도 맛볼 수 있다.



    표선면 중산간 마을에는 예부터 제주말을 기르던 목장인 녹산장(鹿山場)과 갑마장(甲馬場)이 있었다. 표선면 가시리에는 제주 ‘똥돼지’ 문화가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똥돼지는 사라졌지만 가시리에는 유명한 돼지고기 식당이 몇 곳 남아 있다. ‘가시식당’은 제주의 돼지고기 음식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얼마 남지 않은 식당이다. 제주식 두루치기와 몸국, 수에(순대)가 유명하고 맛도 있다. 제주 사람에게 많이 사랑받는 메뉴들이지만 돼지고기 냄새에 익숙지 않은 외지인은 이 집 수에나 몸국이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다.



    통돼지를 썰어 채소와 함께 볶아 먹는 두루치기 문화는 제주 전 지역에 고르게 퍼져 있다. 두루치기와 함께 나오는 몸국은 모자반과 돼지 내장, 살코기를 넣어 끓인 것으로 제주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국이다. 현지인은 ‘가시식당’의 몸국을 보약 같다고 이야기한다. 진한 맛이 인상적이다. 몸국과 더불어 이 집을 유명하게 만든 또 다른 메뉴는 제주 재래 순대인 수에다. 돼지 피에 메밀과 멥쌀밥을 섞어 속을 만들다 보니 밀도가 높다. 당면 순대나 채소 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강한 식감이 난다. 냄새 때문에 제주에서도 어르신이나 먹을 수 있다는 게 조금 안타깝다. 1960년대 시작한 ‘가시식당’은 요즘 관광객이 제법 찾는다.

    ‘가시식당’ 주변에 있는 ‘나목도식당’도 유명하다. 이분도체 돼지를 사와 직접 해체한 뒤 요리해 파는 곳으로, 돼지갈비가 가장 인기 있지만 일찍 떨어진다는 게 흠이다. 이 집은 삼겹살을 둥글게 말아 썰어주는 것이 독특하다. 삼겹살이든 목살이든 제주 돼지의 특징인 강한 탄력의 식감을 맛볼 수 있다. 작은 면 단위인 표선면에 제법 맛이 좋은 식당이 모여 있는 게 바로 제주의 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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