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6

2005.05.24

백팔번뇌 씻어준 ‘佛心 화음’

해인사 1200년 만에 첫 음악법회 … 무거운 산문 열어 현대인 삶 적극 수용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5-05-20 16: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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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팔번뇌 씻어준 ‘佛心 화음’

    해인사 보경당 앞에서 열린 음악법회‘화엄 만다라’. ‘열린 해인사’로의 변화를 상징한다.

    모든 성인들은 음악을 즐기고 좋아하셨습니다.”해인사 수좌 원융 스님의 법문은 1000년 넘게 ‘호국 불교’의 도량으로 꼽히던 해인사의 변화를 상징하는 듯했다. 약간 긴장했던 비구, 비구니들과 관객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원융 스님이 앉아 법문을 내리는 법상(法床)은 해인사가 창건된 뒤 ‘처음’으로 밖으로 나와 그랜드피아노 옆에 놓여졌다. 권위의 상징인 법상이 야외무대의 악기 사이에 지휘대처럼 놓여진 것 자체가 눈으로 보는 ‘파격’이었다.

    경남 합천 가야산 자락 해인사에서 5월8일 열린 음악법회 ‘화엄 만다라’는 이렇게 시작했다. 평상시 예불하고 설법을 듣던 구광루와 보경당 앞 커다란 마당에 조명탑의 울긋불긋한 조명이 밝혀지고, 2000명의 불자와 비불자 관객이 빽빽하게 들어앉았다. 객석 앞쪽에 비구와 비구니들이 자리하고 주한 대사급 외교관들과 그 가족 등 48명이 그 뒤에 앉았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며 불교의 보물, 즉 ‘법보(法寶)’인 팔만대장경을 보기 위해 특별히 해인사의 사찰 체험 ‘템플 스테이’에 참여한 이들은 장엄한 예불 의식과 음악인들의 절묘한 결합에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해인사가 이처럼 많은 외국인이 머무는 ‘템플 스테이’를 연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해인사 스님들의 법고, 법종, 목어, 운판 연주와 화엄 만다라 연주였다. 그것은 세상의 온갖 갈등과 불행을 이겨낸 듯 강력하고 생생했다.



    조화로운 세상 만들기 화엄 만다라 ‘음악 공양’

    비구승의 법고와 전문 음악인들의 즉흥적인 감흥으로 가득한 ‘화엄 만다라’ 속엔 해인사 포교국장인 일감 스님이 “음악 속에 담긴 불교적 깨우침”이라 부른 감동이 들어 있었다.

    “‘산사음악회’가 일반적인 음악회를 산사로 옮겨와 자연 속에서 느끼는 것이라면, ‘음악법회’는 불교와 음악 속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함께 끌어내보자는 것입니다.”

    화엄 만다라를 총연출하고 연주한 피아니스트 임동창 씨의 말이다. 임 씨는 2004년 말 해인사로부터 ‘음악법회’를 제안받아 인도의 음악가 밀란드 다테(다큐멘터리 ‘달라이 라마’ 음악감독), 중국 국가 1급 비파 연주자인 투샨치앙, 일본의 민속 타악기 주자인 마사야 요코야마를 불러모아 음악으로 부처에 공양하는 화엄 만다라를 기획했다.

    백팔번뇌 씻어준 ‘佛心 화음’

    프랑스 여행사 대표단이 해인사에서 템플 스테이를 체험하고 있다. ‘화엄 만다라’에 출연한 해인사 스님들. 팔만대장경을 가진 법보 사찰인 해인사(왼쪽부터).

    음악이 ‘공양’인 것은 해인사 스님 70인이 직접 무대에 올라 좌종(앉아서 연주하는 종)을 연주하는 데서 잘 드러났다. 파르스름하게 삭발한 머리에 장삼 차림의 스님들이 음악가들과 섞여 앉아 연주하는 좌종 연주는 가야산 봄밤을 적신 운무와 어우러져 신비롭기까지 했다.

    화엄 만다라에 참석한 무용가 홍신자 씨는 “나는 불교 신자도 아니고, 사찰에서 열리는 이런 행사에도 처음 참여했다. 매우 불교적이며 동시에 즐거운 경험을 했다. 철학적인 면에서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화엄 만다라’는 사찰에서 열린 음악법회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해인사는 불교 정신의 총화인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호국 신앙의 요람이고, 한국 불교사에서 처음 ‘총림(참선 수행 도량인 선원과 교육기관인 강원과 율원을 가진 사찰)’으로 지정될 만큼 수행과 연구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이 같은 해인사가 1000년 만에 산문을 활짝 열고 법상을 밖으로 내와 음악가들과 대중을 받아들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또 근세엔 한국 불교를 들썩이게 하는 것이 ‘가야산 호랑이’, 즉 해인총림을 이끄는 해인사의 방장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해인사가 한국 불교에서 갖는 영향력이 크다는 뜻이다. 용성, 고암, 성철, 혜암 스님도 모두 ‘가야산 호랑이’였다. 불교계의 큰스님이면서 우리나라 대중에게 정신적 가르침을 주는 ‘스타’인 것이다.

    다른 동물도 아니고 가야산의 ‘호랑이’인 것이 가야산의 기가 워낙 세서 나왔다는 말도 있지만, 항일운동의 근거지였던 해인사의 엄격하고 ‘빡센’ 수행의 전통을 설명한다. 이런 승풍 때문에 해인사의 템플 스테이나 여름 수련회는 다른 대사찰인 송광사나 통도사에 비해 보수적이고 엄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열린 해인사’를 지향하는 요즘 호랑이도 많이 온순해졌다. 일반 대중에게 무거운 산문을 열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온 해인사는 2004년 말 현응 주지 스님이 내려온 뒤 변화에 가속도가 붙었다.

    올해 ‘해인사 발전을 위한 대토론회’ 등에서 제안된 현대적 경영과 마케팅을 받아들여 ‘문화도량’으로 현대인들의 삶에 가깝게 다가선다는 것이다. ‘불교적 철학’을 가진 인구가 500만에 이른다는 프랑스의 대형 여행사 대표들을 해인사가 초청해 ‘팜투어’를 진행한 것도 신선하다.

    이전에 해인사 수련법회는 묵언수행에 1초 단위로 짜여져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혹시 말을 하거나 1초라도 늦으면 참회절을 해야 하고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지만, 요즘은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가능하면 금연해달라’고 지도할 정도다. ‘형식보다 마음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므로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사찰에서 배운다’는 것이다.

    입시와 취직난에, 불경기와 불만족스런 자신 때문에 번민하는 중생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는 해인사의 ‘현대적인 변화’가 불교계뿐 아니라 한국 종교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화엄 만다라가 남긴 흥미로운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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