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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이긴 블레어 “걱정이 태산”

야당, 이라크 침략 문제 삼아 사임 압력 … 의석 수 부족·경기하강 등 난제 줄 이어

  • 케임브리지=안병억 통신원 anpye@hanmail.net

선거 이긴 블레어 “걱정이 태산”

선거 이긴 블레어 “걱정이 태산”

5월6일 노동당의 총선 승리로 세 번째 연속 집권에 성공한 토니 블레어 총리 부부가 영국 런던에 도착해 환하게 웃고 있다.

5월5일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토니 블레어 총리의 노동당이 승리했다. 노동당은 전체 하원의석 645석 가운데 절반이 넘는 356석을 얻었다. 제1야당인 보수당은 197석, 자유민주당은 62석을 각각 획득했다.

토니 블레어는 2001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얻은 413석과 비교해 많은 의석을 잃었지만 어쨌든 3기 집권에 성공했다. 1900년 출범한 노동당에는 지금까지 집권 2기, 8년을 채운 총리가 없었다. 97년 5월 취임한 블레어는 이번 총선도 승리로 이끌어 집권 2기를 다 채운 최초의 노동당 총리이자, 세 차례 연속 집권이라는 기록까지 세웠다.

그런데 벌써부터 블레어가 사임해야 한다는 요구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왜 투표용지에 찍힌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블레어 사임 요구가 거세지는 걸까.

이번 총선에서 이라크 전쟁은 주요 이슈가 아니었다.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건강보험과 공교육 개선이 집권당의 우선 과제로 꼽혔다. 이라크 전쟁은 겨우 여섯 번째의 과제로 지적됐을 뿐이다. 그러나 보수당과 자유민주당은 이라크 전쟁 이슈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블레어가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없는데도 국제법을 무시하면서까지 이라크를 침략했다는 점을 부각한 것이다.

토론 도중 방청객 “거짓말쟁이” 비난



선거 일주일을 앞두고 치명적인 보도가 튀어나왔다. 법무장관이 각료회의에서 이라크 침략전쟁이 국제법 위반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언한 사실이 전해진 것이다. 이라크 침략 전쟁 2주일 전인 2003년 3월 초에 나온 보고서 또한 유엔 결의안이 없을 경우, 이라크 침략이 국제법을 위반한다고 지적했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블레어는 의회에서 이라크 침략이 국제법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며, 이라크가 45분 안에 대량살상무기를 실전 배치할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기까지 했다.

이러다 보니 이라크 전쟁이 블레어에 대한 도덕성과 신뢰의 문제로, 나아가 정권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졌다. 총선 직전 시행된 설문조사에서 투표하겠다고 응답한 노동당 지지자는 60%에 불과했다. 많은 유권자들이 이라크 침략을 이유로 들며 “기권하겠다”고 답했다.

반면 야당인 보수당 지지자들은 80%가 투표에 참가했다. 이라크 침략 반대 및 대학수업료 징수 반대를 분명히 한 자유민주당은 2001년 총선과 비교, 10석을 더 얻는 쾌거를 이뤘다. 특히 대학도시 케임브리지와 리즈 등에서 자유민주당은 노동당의 아성을 깨고 승리를 거뒀다. 물론 이들 대학도시가 노동당에 등 돌린 이유는 이라크 침략에 대한 불만과 블레어에 대한 불신이다.

총선 전, 노동당과 보수당, 자유민주당 당수는 BBC에 출연해 방청객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블레어가 출연했을 때는 한 관객이 “당신은 거짓말쟁이다. 국제법을 위반하고 이라크를 침략했다. 책임지고 물러나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에 블레어는 “이라크 침략은 아주 어려운 결정이었다. 총리로서 책임지고 결정을 내렸다. 사담 후세인이 없는 이라크가 훨씬 좋기 때문에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응수했다.

어쨌든 영국은 현재 ‘이라크’라는 수렁에 빠져들었다.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8000명의 영국군을 언제 철수할 수 있을지 모르고, 또 국제법 위반 혐의로 국제형사법원에 기소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최근 전역한 4성 장군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만약 군 지휘관이 국제형사법원에 기소된다면 블레어 총리도 함께 기소되어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블레어는 선거유세 중 총선에서 승리하면 집권 3기를 모두 채우고 물러나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이는 블레어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시각이 제기되고 있다. 블레어 총리의 1기 내각에서 보건장관을 역임했으며 이라크 전쟁에 반대한 프랭크 돕슨 의원은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블레어는 이제 노동당에 짐이 되었다. 집권 중반에 사임하는 것이 당을 위한 길이다”고 주장했다.

선거 이긴 블레어 “걱정이 태산”

차기 총리감으로 주목받고 있는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 5월6일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 앞에 서서 웃고 있는 블레어 총리와 부인 체리 여사, 아들 레오. 이라크에 파견된 영국군들(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블레어의 3기 정부에 부담을 더해주는 요소는 ‘부족한’ 의석 수다. 반수보다 겨우 33석 많은 의석 수를 얻었기 때문에 신분증 도입 법안 등 노동당 내의 반대가 심한 법안의 경우 하원을 통과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재 356명의 노동당 의원 가운데 50명 정도가 ‘블레어 반대’를 공공연하게 선언하고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매우 큰 문제다.

또 하나의 변수는 유럽 헌법 제정 조약(이하 유럽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다. 영국 정부는 올 하반기부터 6개월 동안 EU의 순회 의장국을 맡게 된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 국민의 3분의 2가 유럽 헌법에 반대하고 있다. 영국은 유럽의 경제통합에는 찬성하지만, 연방국가를 지향하는 정치통합에는 반대한다. 영국은 내년 상반기 안에 국민투표를 할 예정이다. 사안이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아직 날짜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는 5월29일 유럽 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한다. 아직까지 반대 의견이 우세하다. 프랑스 국민이 유럽 헌법안을 거부할 경우 이는 영국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벌써부터 노동당 내에서는 유럽통합에 회의적인 의원들이 보수당과 연대, 유럽 헌법안에 반대하는 범국민적인 운동을 전개할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아울러 경기하강도 점차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영국은 현재 산업혁명 이후 최대의 경제호황을 누리고 있다. EU 최대의 경제대국 독일이 500만명이 넘는 실업과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성장으로 고민에 빠져 있는 것과 달리, 영국은 올해 3%의 경제성장을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 등 유럽 대륙 경제가 서서히 회복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과 다르게 영국 경제는 하강 곡선을 타고 있다. EU 회원국 가운데 유일한 산유국인 영국은 미국 경제 사이클을 따른다. 런던 금융가의 한 전문가도 가계부채 급증과 집값 상승세의 둔화 등 여러 경제지표를 분석하면서 경기가 점차 하강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런 가운데 노동당 내 2인자이자 차기 총리감으로 주목받고 있는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과 블레어의 권력 투쟁이 점차 치열해지고 있다. 두 사람은 총선에서 이기기 위해 휴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총선 직후 개각 과정에서 블레어가 자신의 지지자들을 주요 장관직에 임명하려 하자, 브라운이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번 선거에서 당선되지 못한 많은 노동당 의원들은 “만약 브라운이 당수였다면 선거에서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일부 유권자들은 “블레어는 싫지만 브라운이 곧 노동당수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번 총선에서 노동당을 지지했다”고 말했다.

과연 3기 집권의 위업을 달성한 토니 블레어는 명분과 실리를 갖춘 적절한 시점에 물러나는 정치인의 호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주간동아 2005.05.24 486호 (p46~47)

케임브리지=안병억 통신원 anpy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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