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3

2005.05.03

안암골 호랑이, 글로벌 날개로 비상하다

  • 글·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사진·김형우 기자 free217@donga.com

    입력2005-04-28 1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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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암골 호랑이, 글로벌 날개로 비상하다

    이제는 대학 건물의 상징이 된 고려대 본관과 인촌 동상 앞 풍경. 한국의 근현대사와 함께해온 고려대는 이제 글로벌 대학으로 변신하고 있다.

    “조국을 등지고, 명문을 버리라고?”

    ‘민족사학’의 대명사 고려대학교가 5월5일,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1905년 교육구국(敎育救國)의 꿈이 모여 탄생한 고려대는 우리 민족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으로 겨레의 시련기를 민족과 함께한 믿음직스러운 동반자였다. 23만명에 이르는 동량을 배출한 민족의 대학. 때론 듬직한 아들, 때론 추상같은 시어머니 역할을 해온 막걸리 냄새 풍기는 정겨운 이름이 바로 ‘민족고대’인 것이다.

    그런 존재가 더 이상 ‘민족’이란 이름에 연연하지 않고, ‘고려대’란 이름만 남기고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의 탈바꿈을 선언했다. ‘세계고대 1000년을 향한 글로벌 KU(Korea University) 프로젝트’가 본 궤도에 진입한 것.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허울 좋은 명문의식을 버리고 세계와 경쟁하겠다는 고려대의 이 같은 도전은, 시대정신을 이끄는 대학의 사명을 넘어 한국 사회 전반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국내 유수 대학들이 고려대를 대학 개혁의 모범으로 삼기 위해 눈과 귀를 쫑긋 세웠고, 해외 유명 대학 사이에서도 “한국을 알려면 고려대와 협력하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고려대는 총 49개국 395개교와 학생 교류협정을 맺는 등 단박에 국제적인 대학으로 변신했다.

    49개국 395개교와 학생 교류협정 체결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바로 이런 때 쓰는 말일 것이다. 시큼텁텁한 막걸리 대학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어떻게 최고급 와인 향을 머금은 국제 대학으로 변신했는지는 직접 안암골에 가보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지하철 6호선을 타고 고려대역에서 내려 ‘서울 10대 풍광’으로 손꼽히는 고려대 정문에 당도하면, 불과 몇 년 전까지 근엄하면서도 딱딱한 분위기를 풍기던 캠퍼스는 온데간데없고 고전미 넘치는 옛 건물과 최첨단 시설이 조화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한때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대운동장’은 이제 지하는 주차장으로, 지상은 유럽식 정원으로 바뀌었다. 호텔 수준을 넘어선 고려대 ‘LG-포스코 경영관’과 뉴미디어를 적극 수용한 ‘중앙도서관’은 누구라도 한번쯤 이곳에서 향학열을 불태우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 그러나 이 같은 외형적인 변화는 서막에 불과할 뿐이다.

    안암골 호랑이, 글로벌 날개로 비상하다
    “고대는 세계로, 세계는 고대로!”

    캠퍼스를 누비고 다니는 젊은 호랑이들은 더 이상 고시와 취업공부에 찌든 표정이 아니다. 최루탄 연기 날리던 ‘민주광장’이 미국·러시아 등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아고라(Agora)’로 바뀐 모습을 접하는 순간, 고려대의 대변신을 실감할 수 있다.

    “올해 380명에 이르는 경영대 신입생들 가운데 교환학생과 국제인턴십 등을 통해 뽑힌 270명(약 70%)은 안암골이 아닌 해외 각지의 캠퍼스에서 공부하게 됩니다. 이는 세계 어느 대학도 시도해보지 못한 교육 혁명이라 불릴 만합니다.”(이장로 경영대학장)

    안암골 호랑이, 글로벌 날개로 비상하다
    최근 고려대의 변화를 선도하고 있는 경영대의 모습을 살펴보면 이미 고려대는 국내 수준을 뛰어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영대가 단독으로 확보한 협력 대학만 세계 정상급 43개 파트너 스쿨에 이른다. 이를 위해 자체적으로 600억원에 이르는 장학기금을 마련, 학생들의 세계화를 독려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인 60여명의 전임교수진을 확보한 경영대는 100여개의 강좌를 영어로 진행할 뿐 아니라 학문적 수준도 빛을 발해, 지난해 국제논문 전 세계 4위(미국 제외)라는 실적을 거두었다. 물론 이 같은 변화는 10여년 전부터 준비해온 세계화 프로젝트의 일차적 성과물일 뿐이다. 이두희 대외협력처장(경영학)은 “서울대와 연세대가 경쟁상대가 아니라, 몇 년 안에 아시아 최고의 비즈니스 스쿨로 성장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경영대의 변화는 경영대 출신인 어윤대 총장을 통해 고려대 전체로 퍼져나갔다. 올해만 800명이 넘는 고려대생들이 해외에 마련된 고려대 ‘글로벌 캠퍼스’를 통해 유학생활을 체험하기 시작한 것. 어 총장은 “글로벌 리더의 경쟁력은 국제 문화에 대한 경험과 언어 능력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며 앞으로도 고려대생들은 적극적으로 ‘조국을 등질 것’이라고 단언한다.

    대학 개혁의 목표는 교육과 연구의 질 향상

    ‘글로벌 캠퍼스’란 해외 주요 거점에 마련한 고려대의 교두보. 미국(UC-Davis대학), 영국(RHUL), 캐나다(UBC대학), 호주(그리피스대학), 일본(와세다대학), 중국(런민대학) 등 6개국 주요 대학에 총 5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를 건설해 고려대의 해외 캠퍼스로 활용한다는 발상. 특히 외국어문학 전공생들은 의무적으로 한 학기 학점을 해당 언어국 대학에서 따야 하기 때문에(7+1학기 제도), 전체 학생의 20%가량 되는 1000여명이 매년 외국으로 진출하게 됐다. “고려대에 진학한다는 것은 유학을 간다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고려대 측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대목이다.

    과연 그 많은 유학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 걸까. 또 해외로 빠져나가면 그 빈자리는 누가 채우는 걸까.

    고려대는 해외에서 공부하겠다는 학생에게는 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국제화를 향한 ‘초강수’를 선보였다. 추가 비용 없이도 유학생활을 보장하겠다는 생각인 것. 이는 고려대가 학생 교류협정을 맺은 해외 대학에 학비 조정을 부탁, 협조를 얻어낸 성과이기도 하다.

    해외로 나간 학생들의 빈자리는 ‘편입생’이 아닌 세계 각지에서 오는 유학생들로 채워진다. 올해 경영대만 380여명, 고대 전체로는 600명의 학생들이 ‘고대로 유학 가자’는 모토에 끌려 한국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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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는 전체 강의 가운에 25%를 영어로 진행하고 있다.

    여기서 또 다른 궁금증이 생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제화의 선두주자는 ‘연세대’였는데, 오히려 국제화에 무관심했던 고려대로 외국 학생들이 몰리는 까닭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무엇이 해외의 유수 대학들로 하여금 고려대와 손잡게 만들었을까.

    “이미 한국은 세계 수준의 나라이긴 하지만 한국어 학습만을 위해 유학이란 모험을 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최근 고려대에 영어로 학점을 딸 수 있다는 학칙이 있다고 해 주저 없이 고려대를 선택했습니다.”(미국 교환학생 톰 멜빈)

    외국 학생들이 고려대를 택하는 결정적 이유는 전체 강의의 25%가 영어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경영대학에서 진행되는 영어 강의만 1년에 100여 과목, 전공 강의의 30%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외국 대학생들이 고려대로 몰려드는 것. 이에 학교는 전략적으로 모든 신임 교원을 영어로 강의한다는 조건으로 채용하는 등 국제화 전략을 가속화하고 있다.

    영어 강의는 고려대생에게도 놀랄 만한 변화를 일으켰다. “무늬만 영어 공부인 토플과 토익책을 왜 봐요?”라고 반문하는 경영학과 2학년 김경민 씨는 “지금은 영어 강의를 듣고 외국 학생들과 수시로 대화하기 때문에 따로 영어 공부를 하지 않는다”며 활짝 웃는다.

    물론 이 과정에서 진통이 없지 않았지만 고려대는 2010년까지 영어 강의를 50% 선으로 늘리고, 학생들의 토론과 학교행정까지도 영어로 진행하며, 해외 석학을 초빙한다는 비전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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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고대’를 지향하는 생명환경과학대학의 연구실 풍경.

    “교육은 결국 돈입니다”

    사실 이제껏 진행된 대학평가에서 고려대의 성적이 국내 최상급 수준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고려대는 그 이유를 “사립대학의 한계상, SCI(과학논문 인용 색인) 논문이 절대적으로 많이 차지하는 이·공대와 의대에 집중 투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고려대가 2010년 세계 100대 대학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공대와 의과대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 이를 위해 고려대는 10여년 전부터 시작된 ‘과학 고대’ 프로젝트의 연장선에서 생명환경과학대학, 정보통신대학, 의과대학 등에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의대 교수에겐 매년 2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토록 규정해가며 연구 성과를 독려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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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3월18일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버클리대학의 대니얼 맥퍼든 교수가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에서 강연을 하는 모습.

    지난해 ‘디스플레이 관련 누리사업참여대학 중심학과’로 선정되고 삼성전자 산학협력체결 등의 대외적인 변화에 따라 서창캠퍼스의 정보소자학과는 디스플레이 반도체 물리학과로 이름을 바꾸고 충남지역을 디스플레이 메카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연구에 매진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고려대가 심혈을 기울여 육성하는 ‘한국학’ 분야에도 매년 40억원 이상을 투자해 세계적인 한국학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밝혔다. 안문석 부총장은 “세계와 소통이 가능해야 한국학도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세계화와 한국학의 조화를 이뤄내겠다”며 민족고대의 전통을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국제화 화두 들고 한국 사회 바꾸기 시작

    고려대가 이런 변화를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금이다. 기부금을 끌어들이기 위한 재단과 학교의 헌신적인 노력은 이미 교육계의 전설로 기록된다. 물론 운도 좋았다. 100주년이라는 기회를 고려대는 적극 활용한 것이다.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을 비롯해 대학 총장과 보직 교수들은 주요 기업과 교우들을 수시로 찾으며 100주년을 맞이한 고려대의 발전을 위한 기부 요청을 꾸준하게 펼쳐왔다.

    액수에 관계치 않고 기부자들에게 최대의 서비스를 베풀고자 학교를 방문한 이들을 위해 ‘붉은 카펫’을 깔고 호텔급 대접을 하는 것은 물론, 막대한 기부금을 낸 기부자에게 건물 이름을 선물하기도 했다. ‘LG-포스코 경영관’ ‘CJ인터내셔널하우스’ ‘SK 정보관’ 등이 그것이다. 소액 기부자들을 위해서는 책걸상에 이름을 새겨주는 방법으로 기부 방식의 일대 혁신을 일으켰다. 결국 2002년 637억까지 줄었던 모금액수는 학교의 뚜렷한 변화 의지가 확인되자 이듬해는 870억원, 지난해는 무려 1200억원으로 급증하면서 여타 대학의 시기와 질투 대상이 되기도 했다. 김건 이과대학장은 “사학의 한계를 민족의 힘으로 정면돌파한 셈”이라고 그간의 고충을 요약하기도 했다.

    사실 이 같은 변화에 20만명이 넘는 고려대 교우들의 단결력이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고려대 졸업생들은 뜨거운 애교심으로 유명하다.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기부금의 액수는 절정에 달할 전망이다.

    자유와 정의, 그리고 진리를 외쳤던 고려대인들이 이제는 국제화라는 화두를 들고 한국 사회를 바꾸기 시작했다. “연세대나 서울대와의 비교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고려대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김균 교무처장(경제학과)은 “역시 시대를 이끈 선배들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프로젝트”라며 선배들에게 공을 돌리기도 한다. 이는 고려대가 민족을 대표하는 대학이었다는 것을 입증한 사례가 될 것이다. 5월5일은 민족고대 100주년의 축제일이자, 세계고대 1000년을 알리는 중대한 전환점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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