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7

2005.03.22

“영화 하면 부산, 부산 하면 영화지요”

  • 입력2005-03-17 17: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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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하면 부산, 부산 하면 영화지요”
    1996년 9월13일,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개최될 당시만 해도 영화계의 많은 사람들은 과연 영화제가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워했다. 아시아권에서는 이미 도쿄국제영화제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서울도 아닌 부산에서 국제영화제 개최가 가능할지 회의적이었던 것. 그러나 지금, 전 세계 영화인들은 세계 10대 영화제에 부산국제영화제를 포함시키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98년 3회 때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부산국제영화제를 ‘아시아의 칸’이라고 불렀고, 99년 버라이어티지는 ‘지난 주 당신이 아시아 지역으로 건 전화에 아무 응답이 없었다면, 그건 아시아의 거물들 대부분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재치 있는 표현을 했다. 그때부터 일본의 니카타 신문도 ‘급격한 변모와 그 열기, 일본을 위협하는 존재로,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힘’이라고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적 개최는 한국 영화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한국 영화가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데 중요한 길을 열어주었으며, 영화제작자와 감독, 평론가, 관객들이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

    부산시 관계자들 설득하고 영화계 냉소 극복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10회를 맞이하게 된다. 2월 말 부산국제영화제 총회가 개최되었고 10주년 행사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발표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올해, 어느 때보다도 성대하게 치러질 계획이다. 그렇다면 부산국제영화제는 어떻게 출발하게 되었을까.

    95년 무렵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던 영화평론가 이용관, 김지석(당시 경성대 영화과 교수) 씨 등은 칸이나 베니스처럼 바다를 끼고 있는 부산에서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를 만들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이를 부산시에 건의했다. 처음에는 황당해하던 부산시에서도 그들의 열의에 감복하고 청사진을 이해하기 시작하자, 김지석 씨 등은 문화부 차관을 거쳐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역임했던 김동호 씨를 위원장으로 영입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부의 따가운 시선이었다. 우선 영화계에서도 부산국제영화제를 개최한다는 소식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해외 게스트를 초청하는 것도 어려웠고, 작품을 받기는 더욱 어려웠다. 부산이라는 도시가 한국의 어디에 있는지부터 설명해야 했고, 영화제의 성격이나 방향 등에 대해 수없이 반복해서 이해를 시켜야만 했다. 그렇게 힘들게 치러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에는 모두 27개국 170편의 작품이 초청되었다. 9회 영화제에 초청된 작품이 61개국 243편이니까 외형적으로도 지난 10년의 변화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산국제영화제를 성공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은, 관객이다. 1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한 관객은 18만4000여명. 이 숫자는 지금까지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 1회 영화제가 시작되자 부산 남포동 영화의 거리에는 주최 측이나 해외 게스트들의 입을 다물게 할 만큼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다. 영화의 거리에 서 있으면 걷지 않아도 저절로 움직일 만큼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빼곡했다.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부딪치는 어깨에서 어깨로 전해져갔다.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밤새도록 영화인들과 관객 사이에서 토론이 이어졌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한 해외 게스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서, 혹은 다른 해외 영화제에서 만난 세계의 영화인들에게 부산의 이 놀라운 영화 열기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회가 될수록 영화제 사무국에서는 더 이상 해외 작품들을 초청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게 되었다. 이제 누구나 부산국제영화제를 알고 있다. 오히려 참가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정중하게 거절해야 하는 형편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해외 영화인들이 자비를 들여 비행기표를 끊고 호텔을 예약하면서 부산에 오고 있다.

    “영화 하면 부산, 부산 하면 영화지요”

    수영만 야외특설상영관에서 개막작으로 선정된 '2046'이 5000여명의 관람객이 모인 가운데 상영되고 있다. 하재봉, 김지석씨 (왼쪽사진 오른쪽)

    부산국제영화제의 산파역을 담당했고, 현재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 영화 프로그래머로 있는 김지석 씨는 누구보다도 영화제의 핵심 인물이다. 김동호 집행위원장, 이용관 부집행위원장과 전양준 월드시네마 프로그래머, 김지석 아시아 영화 프로그래머, 허문영 한국 영화 프로그래머, 홍효숙 와이드앵글 프로그래머 체제로 되어 있는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에서 유일하게 부산에 거주하며 영화제 사무국에 상주하고 있는 사람이 김지석 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정체성을, 아시아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확립시킨 사람이다.

    -국제영화제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관객들에게 평소 접하기 힘든 영화들을 지속적으로 소개해야 한다. 영화를 만드는 처지에서 보면 주류 영화 이외에는 대중과 접하거나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는데, 영화제는 그런 기회를 제공한다.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는 일도 중요하다. PPP 운영 목적이 완성된 영화를 대중에게 소개하고 그것이 팔릴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 외에, 재능 있는 작가들이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문화적 차원에서의 소임과 산업적 차원에서의 소임을 다 같이 해야 한다. 일정한 규모 이상의 영화제는 그런 산업적 규모를 갖춰가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초창기에는 검열 문제 때문에 말썽이 나기도 했는데.

    “그때는 배급사가 알아서 문제 장면을 삭제했다. 그리고 그 뒤로 그런 문제는 없었다. 지금까지 제한상영을 두 번 했는데(신상옥 감독의 ‘탈출기’, 왕자웨이 감독의 ‘해피 투게더’)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국내에 새로운 영화제 문화 일궜다는 데 가장 큰 의미”

    -지난 10년을 정리한다면?

    “영화제 문화가 전무했던 상황에서 새로운 문화를 일궈냈다는 것이다. 한국 영화의 세계화에 기여했고, PPP를 통해 아시아 영화산업 발전에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생기기 전에는 해외 영화제에 어떻게 참여하는지, 어떻게 홍보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부산에 오는 해외 영화인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그런 노하우를 축적한 것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부산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높여주고, 부산 시민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자긍심과 문화적 긍지를 높여준 측면이 있다. 지역 내 새로운 산업을 일궈내고 그 산업이 성장할 수 있게 모티브를 제공했다.”

    -10주년 기념 사업으로는 어떤 것이 계획되고 있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10월6일 개막식을 치른 다음 날, 영화제 숙원이었던 부산 영상센터 기공식이 열린다는 것이다. 해운대 센텀시티 내 9500평 부지에 영상센터가 만들어지면 영화제 전용관을 갖추게 된다. 현재 남포동 지역의 극장과 해운대 극장으로 이원화되어 관객들이 양쪽을 오갔는데, 이제는 이런 불편이 해소된다. 460억원 예산으로 건립되는 영상센터는 전 세계 어느 영화제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환경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현재 영상센터의 설계는 완성되었는가?

    “설계 지침서는 완성되었다. 국내외 건축가 10명에게 지명 공모전을 실시해서 6월 말이면 당선작이 발표될 것이다. 영상센터는 2008년 완성되며, 13회 영화제부터는 영상센터 내의 영화제 전용관에서 개최된다.”

    “영화 하면 부산, 부산 하면 영화지요”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 관련 인사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지석씨는 영화제에 프로그래머로 참여했다. (왼쪽에서 세번째가 김지석씨).

    -부산국제영화제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김동호 위원장님과 프로그래머가 동력이다. 나는 부산에 거주하기 때문에 시 당국과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다. 그래서 97년 말부터 부산국제영화제의 발전을 위한 연구 모임을 만들었다. 부산시 공무원과 부산발전연구소, 그리고 김지석이 참가하는 이 모임에서, 어떻게 영화제가 성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토론했다. 어젠다는 내가 만들었다. 98년 당시 안상영 시장이 취임 직후 칠레 등 자매결연 도시를 순방했는데, 이용관 부위원장이 같이 갔다가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있는 필름 커미션 기구를 보고 돌아와서 만든 게 부산영상위원회다. 박광수 감독이 위원장을 맡아 부산 영화산업과 관련된 구체적인 것은 영상위원회에서 계획, 집행하고 있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상 1년에 영화 800편 관람”

    -그동안 부산국제영화제가 성장한 만큼 함께 성장한 감독들도 많다.

    “대표적으로 중국의 지아장커 감독을 들 수 있다. 그 외에 홍콩의 프르투 첸, 싱가포르의 로이스톤 탄, 태국의 논지 니미부트르와 펜엑 라타나루엥 감독은 데뷔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왔다.”

    -왜 필름 마켓을 만들지 않는가?

    “마켓이라는 용어는 영원히 쓰지 않을 생각이다. 홍콩이나 도쿄, 방콕영화제 등이 부산영화제에 밀려서 자꾸 마켓을 만들고 있는데, 마켓은 잘못 만들면 실패한다. 도쿄영화제에서 마켓을 만들었다가 크게 실패했다. 부산영화제는 현재 마켓은 없지만 그 기능은 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언제가 가장 힘들었는가?

    “물론 1회 때가 가장 힘들었다. 그리고 IMF 당시 부산국제영화제도 초긴축 예산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예산에서 3억원을 줄였는데도 5억원 정도 적자가 났다. 관객이 감소한 것은 아닌데 후원자가 줄어들고, 기타 경비는 올라가고, 이렇게 이중고를 겪으며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부천의 경우에서 보듯 지자체와 보조를 맞추는 일이 어려울 것 같다.

    “우리는 사공이 많이 없어서 배가 산으로 갈 걱정은 별로 없다. 부산의 경우, 영상위원회가 큰 흐름을 잡고 시행해나가고 있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많은 영화를 봐야 하지 않겠는가?

    “단편을 포함해서 1년에 800편 정도 본다.”

    -개인적으로 영화제를 맡고 난 뒤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대학교수를 그만두었다. 지금 내 직업은 영화제 프로그래머다. 3회 영화제 세미나를 했을 때 유지나 교수가 영화제 프로그래머는 겸직해서 할 일은 아닌 것 같다고 질문했다. 나는 그 다음 해 대학교수를 사임하고 영화제에 전념하고 있다. 그리고 집행위원장은 외교력이 필요한 자리다. 행정관료 출신으로 관료 사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동호 위원장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큰 마찰 없이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가장 위험한 순간은 그 행사가 잘될 때다. 관료들은 행사가 잘 치러지면 그들이 없어도 잘될 거라는 환상을 갖는다. 부천의 경우가 그렇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장기 비전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지금 여러 아시아 국가들이 필름 아카이브 개념이 없어서 소중한 영화가 사라지고 있는데, 그 자료들을 수집 보존하고 싶다. 아시안 필름 아카이브를 만들 부지는 있다. 부산시에서는 이해를 한다. 이런 모든 것이 이미 97년도에 세운 장기 계획 로드맵에 들어 있다. 로드맵을 따라주는 시가 고맙다. 김동호 위원장에게도 그것까지는 만들고 은퇴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 단계에서 더 도약할 수 있는 로드맵도 존재하는가?

    “영화제의 정체성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다. 내실을 기하고 내부 인프라를 다지는 쪽으로 도약해야 될 것이다. 영화제의 성격이나 방향은 이미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한다. 대신 운영상의 미숙함이라든가, 인프라가 부족해서 생겨나는 불편함 등을 점진적으로 개선해나가야 한다. 궁극적인 목표는 부산이 아시아 영화 문화와 산업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영화제에서 상영된 좋은 작품이 일반 보급망을 통해서 대중에게 공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서 지난해부터 시작한 게 CJ 컬렉션이다. 부산영화제가 추천한 작품 중에서 CJ엔터테인먼트가 판권을 구입한 다섯 편은 올해 안에 CGV를 통해 공개될 것이다. KBS에서는 주기적으로 아시아 영화를 방송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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