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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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줌마 팬들 준상 발자취 따라 ‘감동 속으로’

‘겨울연가’ 투어 동행기 …남이섬·춘천 명동 등 가는 곳마다 장면 재연하며 ‘환호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4-12-23 10: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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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아줌마 팬들 준상 발자취 따라 ‘감동 속으로’

    남이섬 메타세콰이어 길에서 ‘겨울연가’ 주인공 사진을 보고 있는 일본인 관광객들.

    금세 비를 뿌릴 듯 하늘이 잔뜩 찌푸린 12월15일 경기 가평군 남이섬 선착장. 오전 10시가 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인데도 100여명의 관광객들이 남이섬으로 들어가는 배를 기다리며 발을 종종거리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40, 50대 일본인 여성 관광객들로 TV 드라마 ‘겨울연가’의 ‘광(狂)팬’들이다.

    남이섬 배용준·최지우 사진 설치 장소 ‘인기만점’

    이들은 짧은 파마머리와 낮은 통굽 구두, 무릎까지 내려오는 두툼한 코트에 핸드백을 다소곳하게 든 영락없는 중년 아줌마들이지만, 표정만큼은 짝사랑하는 남학생을 우연히 만난 열일곱 살 여고생처럼 잔뜩 설레 보였다. 후쿠시마현(縣)에서 온 와타나베 미에코씨(48)는 ‘겨울연가’를 몇 번이나 보았느냐는 질문에 뺨을 붉히며 “세보질 않아서…”라며 수줍어했다. 이들에게 나이는 숫자에 지나지 않았다.

    2박3일 일정으로 ‘겨울연가’ 투어에 나선 미에코씨 일행 16명은 모두 같은 생명보험회사에 다니는 보험설계사들. ‘겨울연가’의 선풍적인 인기를 체감한 회사가 직원 사기 진작 차원에서 여행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한국 방문이 처음이라는 사토 레이코씨(50)는 “아주 오래 전부터 한국에 다녀오고 싶다고 누누이 말해와 남편도 말리지 않았다”면서 “용사마가 남이섬에서 느꼈던 기분을 나도 느껴보고 싶다”며 활짝 웃었다. 이들 일행의 가이드를 맡은 ㈜롯데관광 차현숙씨(50)는 “겨울연가 관광객들은 투어 내내 수다스럽고 화기애애해 마치 수학여행 나선 여고생들 같다”면서 “이들과 잘 어울리기 위해 배용준 최지우 권상우 이병헌 등 한류 스타들의 최신 연예 뉴스를 수시로 업데이트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이섬은 ‘겨울연가’의 시작과 끝을 추억하는 공간이다. 두 주인공 준상과 유진이 고등학생 시절 사랑을 키운 장소이자, 마지막 회에서 오랜 세월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한 준상과 유진이 재회하는 장소다.



    드라마 장면과 출연배우 사진 등으로 꾸며진 이 섬의 곳곳에 다다를 때마다 미에코씨 일행은 감격의 탄성을 터뜨렸다. “여기가 준상과 유진이 뽀뽀한 자리야!” “이 나무 앞에서 준상이 서 있었어” “드라마에선 이 물가가 꽁꽁 얼었는데…” 실물 크기의 배용준과 최지우 사진이 설치된 곳은 가장 인기 있는 기념촬영 장소. 모두들 최지우 사진을 가리고 서서 마치 배용준과 단 둘이 다정한 포즈를 취한 듯한 흉내를 냈다. 가장 유명한 겨울연가 촬영 장소인 메타세콰이어 길에서는 유진처럼 고목에 올라 두 팔을 벌리고 한 발로 서본다. 이 일행의 청일점인 일본여행사 직원은 아줌마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못 이겨 사진 찍을 때마다 ‘용사마’ 대역을 소화해야 했다. 이들은 사진 찍어달라는 부탁을 할 때 공손한 한국어를 구사하기도 했다. “이 뒤가 나오게 찍어주세요. 감사하므니다.”

    두 시간에 걸친 남이섬 투어를 마치고 일행은 강원 춘천시로 향했다. 춘천 명동에서 유진은 준상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모른 채 하염없이 그를 기다렸고, 춘천고에서는 준상의 등을 밟고 담벼락에 올라가 걸터앉았다. 중도유원지는 함께 자전거 타던 추억이 아로새겨져 있는 곳. 대만이나 중국 관광객들은 남이섬만 둘러보고 떠나지만, 일본 관광객들은 이들 촬영 장소마다 찾아다닌다는 게 주변 상인들의 설명이다.

    일본 아줌마 팬들 준상 발자취 따라 ‘감동 속으로’

    준상과 유진이 식사하는 장면을 찍었던 드라마 세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일본인 노부부와 일본인 관광객들이 한글로 쓴 방명록, ‘겨울연가’ 두 주인공의 교복을 입고 사진 촬영을 하는 일본인 신혼부부(왼쪽부터).

    촉박한 일정 탓에 관광버스는 일행을 내려주고 태우기를 다급하게 반복했지만, 이들 표정은 여전히 즐겁다. 분주한 아줌마들의 발목을 붙잡는 것은 촬영지마다 늘어선 기념품 가게. 최지우 모자가 2만원, 배용준 목도리가 2만5000원, 배용준 달력이 1만5000원…. 품질에 비해 고가이지만, 이들은 사탕가게에 놀러 온 어린아이처럼 두 눈 크게 뜨고 가장 마음에 드는 상품을 고르는 데 여념 없다. 벌써 몇몇은 배용준 목도리를 구입해 그와 같은 방식으로 목도리를 맸다. 춘천고 담벼락 옆에서 행상을 벌이고 있는 이주영씨(20)는 “7월부터 장사를 시작했는데 많이 팔릴 때는 하루 매상이 130만원에 달한다”며 즐거워했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춘천의 촬영 장소는 소양로2가에 위치한 ‘준상이네 집’이다. 오래된 가옥이 다닥다닥 붙어선 좁은 골목길에 자리한 이곳에는 준상이가 사용했던 탁자와 피아노, 책상, 소파, 전화기가 그대로 놓여 있다. 이곳에서 만난 68세의 할머니 나베타니 루이씨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준상이 방을 둘러보았다. 그는 “일본 드라마는 전개 속도도 너무 빠르고 연인이든 부모 자식이든 쉽게 사이가 갈라지는 데 반해, ‘겨울연가’ 주인공들은 어떤 갈등이 있더라도 서로를 포기하지 않아 너무 순수해 보였다”고 말했다. 그의 남편 이누이 야스히로씨(70)는 “가족끼리 서로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자식이 부모를 존경하는 것은 일본 가정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어서 매번 감동을 느꼈다”고 거들었다.

    드라마 속 호텔 방·카페 등서 유적 탐방객처럼 하나씩 고증

    이 집은 본래 개인 소유로 현재 춘천시가 임대해 관광코스로 개발했다. 통역 안내를 맡고 있는 김소영씨는 “한 일본인이 집주인에게 ‘당신은 어느 대통령이나 장관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해낸 민간 외교사절’이라며 감사의 엽서를 보낸 적 있다”고 귀띔하면서 “준상이가 유진에게 사랑 고백하기로 약속했던 12월31일에 한번 더 찾아오겠다는 일본인들이 많다”고 말했다. 관광객이 준상이의 피아노로 드라마 배경음악을 연주해 일본인 아줌마들을 온통 감동의 눈물바다에 빠뜨리는 일도 자주 벌어지는 풍경이라고.

    12월16일 강원 평창 용평리조트에서 만난 40대 가정주부 쓰키타마에 쓰네미씨는 한시도 흥분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오후 3시경 일행 30명과 함께 용평리조트에 도착한 쓰네미씨는 ‘20분간 호텔 방에서 휴식하라’는 가이드 말도 무시한 채 짐을 풀자마자 카페 ‘처음’으로 달려갔다. 이곳은 ‘겨울연가’에서 두 주인공이 자주 들렀던 카페를 복원한 것은 물론, 주인공들의 교복 가방 피아노 등을 재연해둔 곳. 쓰네미씨는 유진의 교복을 입고 배용준 사진 옆에서, 피아노 앞에서 연신 사진 촬영을 해댔다.

    “어제는 남이섬에서 온몸으로 차가운 바람을 느끼면서 자전거도 탔어요. 용사마가 촬영할 때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올 것 같더라고요.”

    쓰네미씨 뒤를 이어 카페를 찾은 다른 일행도 감탄을 연발했다. 준상과 유진이 식사했던 자리에 앉아 똑같은 포즈를 취해보고, 십수번 반복해 보았을 텐데도 ‘겨울연가’를 틀어놓은 TV에 눈을 떼지 못했다. 카페 한쪽 벽면에 장식해둔 방명록은 대다수 일본인 관광객들이 쓴 것으로 겨울연가와 용사마, 그리고 한국에 보내는 애틋한 연가(戀歌)로 가득하다.

    ‘한국과 일본이 좀더 사이좋게 되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놀러 올 수 있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한국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거예요! 유키’

    ‘겨울연가 덕분에 처음으로 한국에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굉장히 행복한 시간 보내고 갑니다. 또 오고 싶어요. 히데코.’

    일본 아줌마 팬들 준상 발자취 따라 ‘감동 속으로’

    ‘겨울연가’ 세트와 소품을 전시해놓은 용평리조트의 카페 ‘처음’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들과 카페의 실내 전경, 춘천 ‘준상이네 집’을 찾은 일본인 여성들(왼쪽부터).



    ‘강준상 만나고 싶어요…. 게이코.’

    이들 일행이 이어서 찾은 곳은 준상이 묵었던 호텔 방.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아줌마들 사이에서 드라마 이야기가 쏟아져나왔다. “그래, 준상이가 이렇게 걷다가 유진이랑 맞부딪친 거야!” “이 소파 자리에 준상이가 앉아 있던 거 맞지?” 등등 마치 진지한 역사 유적 탐방객들처럼 드라마 장면을 하나씩 ‘고증’한다. 이들 일행의 가이드를 맡은 한비여행사 김숙현씨는 “어느 촬영 장소를 가나 드라마 장면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어 나도 가끔 놀란다”고 말했다.

    이들은 드라마 주인공들이 먹었던 것과 똑같은 메뉴로 저녁식사를 한 뒤 다 함께 ‘겨울연가’를 시청하기도 했다. 다음날 새벽에는 유진과 민형(기억을 잃은 준상)이 하루를 함께 보낸 발왕산 정상에 오를 계획이다. 대사를 다 외울 정도로 보았는데 한국까지 와서도 드라마를 또 보고 싶냐는 질문에 딸 나이의 회사동료와 함께 여행 온 50대 여성 다케타니씨는 “직접 드라마 촬영 현장을 보니 드라마 속에 들어온 듯 기분이 너무 좋다”며 “이 좋은 기분을 가지고 드라마를 한 번 더 보고 싶다”고 답했다.

    ‘겨울연가’ 투어 수차례 참가하는 마니아도 생겨

    10대인 딸과 함께 온 쓰키모토 도미코씨(42)는 “여행 오기 전 겨울연가 전편을 다시 보면서 한 장면씩 마음속에 새겨두었다”면서 “남이섬, 춘천, 용평 모두 감동의 연속”이라며 즐거워했다. 쓰네미씨와 동행한 그의 어머니(70세)는 “나는 지금까지 ‘겨울연가’ 투어에 수차례 참석한 마니아”라면서 “다음달에 또 올 것”이라고 말했다. 올 때마다 계절도 바뀌고 촬영 장소 시설물들도 바뀌기 때문에 늘 새로운 기분이 든다는 것. 그는 “한국에 와본 적 없는 가족이나 친구를 데리고 와 내가 직접 설명해주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라며 “‘겨울연가’ 촬영 장소를 둘러본 다음 일본으로 돌아갈 때마다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고도 덧붙였다.

    ‘겨울연가’의 무엇이 중년의 일본인들을 매료시킨 것일까. 이들은 한결같이 ‘순결한 사랑과 착한 사람들’ 때문이라고 답한다. 자신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위하고, 갈등의 벼랑에 섰을지라도 완전히 등 돌리지 않는 드라마 주인공들을 통해 젊은 시절의 꿈과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는 것이다.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겨울연가 덕분에 달라지고 있다. 사토 레이코씨는 ‘겨울연가’를 접하기 전에는 한국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요즘에는 ‘대장금’ ‘천국의 계단’ 등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인들의 생활습관이나 문화를 흥미롭게 익히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아줌마 팬들 준상 발자취 따라 ‘감동 속으로’

    춘천시 소양로2가에 있는 ‘준상이네 집’ 골목 입구. 하루 평균 600여명의 일본인 관광객이 찾고 있다.

    통역 가이드 이유원씨는 “봄, 여름에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두세 번째 또 왔다고 자랑하는 일본인들을 자주 만난다”면서 “가끔 한국어를 배워 한국 사람이 되고 싶다는 사람까지 있다”고 전했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겨울연가’ 관광객을 안내하고 있는 차현숙씨는 “과거 한국인에게서 나는 마늘 냄새가 싫다던 일본인들이 이제는 용사마가 먹는 김치에 환호하는 것이 달라진 점”이라고 설명했다.

    “과거 일본인 관광객들은 가이드에게 ‘곤니치와’라는 인사말 이상을 건네지 않았어요. 그런데 ‘겨울연가’ 때문에 찾아온 일본인들은 다릅니다.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고, 사진 찍을 때도 ‘하나, 둘, 셋’ ‘김치’ 등 한국 말을 즐겨 쓰지요. 가이드와 ‘겨울연가’ 등 한국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도 굉장히 좋아해요. 요즘처럼 일본인 관광객들이 친숙하게 느껴진 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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