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7

2004.10.28

‘2046’의 왕자웨이 감독

“내 영화 속 모든 배우를 사랑한다”

  • 입력2004-10-22 02: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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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46’의 왕자웨이 감독
    밤에도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세상으로부터 숨고 싶거나,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거나. 왕자웨이(王家衛) 감독은 언제나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다닌다. 상투적이고, 수없이 해온 질문이겠지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왕자웨이 감독은 자신을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그는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자신은 검은 안경 속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사람들에게 훨씬 노출되기 쉽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을까? 이제 검은색 선글라스는 그의 일부분이 되어서, 대중 앞에서는 절대 벗은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한다. 마치 김기덕 감독의 모자처럼.

    영화 ‘2046’은 10월7일 저녁 8시부터 부산 수영만 야외상영장에서 제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공식 상영되었다. ‘화양연화’의 숨 막히는 아름다움과 사랑의 상처를 생각하면서 나는 숨을 죽이고 영화를 지켜보았다. 폐허가 된 앙코르와트 사원의 틈 사이로 사랑의 비밀을 몰래 말하고 밀봉해버린 그들의 아픈 사랑이 생각난다.

    주인공뿐 아니라 단역에게도 애정 각별 … “내 영화엔 엑스트라 없다”

    왕자웨이의 ‘2046’은 월드 프리미어(세계 최초의 시사회)가 아니다. 이미 지난 5월 칸영화제에서 공개되었던 필름이다. 그러나 칸영화제가 끝난 뒤 CGF 작업을 보완하고 일부 장면을 다시 찍어 지금의 영화를 완성했다.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이기도 했던 ‘화양연화’의 속편 격이다. 그때 장만위(張曼玉)가 묵었던 방 번호가 2046이었다. 또 2046은 1996년 중국에 반환된 홍콩이 50년간의 유예기간, 1국가 2체제를 거쳐 완벽하게 중국에 귀속되는 해이기도 하다.

    ‘2046’에는 왕자웨이의 많은 영화들이 파편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열혈남아’부터 ‘아비정전’을 거쳐 ‘중경삼림’과 ‘동사서독’ ‘화양연화’에 이르는 왕자웨이의 모든 작품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추억 속의 이미지들을 반추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술에 취한 루루를 호텔방으로 데리고 간 차우는 침대에 쓰러진 그녀의 구두를 벗겨준다. ‘중경삼림’에서 진청우(金城武)가 린칭샤(林靑霞)의 구두를 벗겨준 것처럼. 또 차우가 머리를 손으로 빗어넘기는 장면에서는 ‘아비정전’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2046’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화양연화’의 많은 장면들, 즉 두 남녀가 닿을 듯 스쳐 지나가던 좁은 복도나 앙코르와트 사원 틈 사이로 무언가를 말하던 사람들의 이미지를 찾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다.



    영화가 끝난 뒤 왕자웨이가 모습을 나타냈다. 함께 온 사람은 량차오웨이(梁朝偉). 몇 년 전 량차오웨이를 처음 보고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키가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화면 속에서는 거인이다. 반면에 왕자웨이는 저우룬파(周潤發)처럼 체구가 크다. 1958년생. 머리는 지금의 나와 똑같다. 2cm 정도 길이의 짧은 스포츠형이다. 흰 셔츠에 검은 셔츠를 받쳐입고 그 위에 검은 가죽 재킷을 입었다. 한국의 10월은 홍콩 날씨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겨울 날씨와 같다.

    ‘2046’은 ‘화양연화’와 짝을 이루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많은 것들이 다르다. 촬영 첫날 왕자웨이 감독은 량차오웨이에게 주문했다. ‘화양연화’와 똑같은 인물이지만 전혀 다르게 연기해달라고. 량차오웨이에게 그 주문은 매우 어렵고 도전적인 것이었다. 같은 인물이니까 연속성은 있는데 전혀 다르게 표현해야 하는 것이 배우로서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사람들이 당신을 낭만주의적 감독이라고 말하는데, 거기에 동의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웃으면서 “나는 사실 낭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오히려 그는 허무주의자이며 비극주의자다. 그의 영화에는 인생에 성공한 사람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왕자웨이의 인물들은 자꾸 도망친다. 그들은 스스로를 소멸시키려고 한다.

    ‘2046’의 왕자웨이 감독
    “나 자신도 ‘2046’이 처음에는 사랑 이야기인 줄 알고 찍었다. 그러나 찍다 보니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즉흥적 촬영 많아 배우도 전체 내용 몰라

    왕자웨이는 그의 선글라스만큼이나 촬영 방법도 독특하다. 그의 영화는 시나리오가 없다. 대략적인 시놉시스만 가지고 촬영을 시작한다. 현장에서의 즉흥적인 촬영도 많다. 감독의 아이디어에 따라 촬영이 수시로 바뀌기도 한다. 더구나 그는 대인기피증이 아주 심해서, 다른 감독들처럼 멋진 의자에 앉아 큰소리로 ‘레디, 액션’을 외치지도 않는다. 그는 숨어 있다. 배우들이, 촬영 장면을 지켜보는 관객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카메라와 연결된 모니터로 현장을 확인하고 지시한다.

    그의 이런 촬영방법 때문에 때로는 배우들도 자신이 무엇을 찍었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영화 촬영이 차례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파편적으로 찍힌 신들이 헤쳐 모여서 시나리오 차례대로 편집되는데, 그것도 애초의 시나리오가 없는 상황이면 배우들은 그날그날 감독의 지시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신이 무슨 이야기 속의 어떤 역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중경삼림’ 첫 시사를 본 뒤 린칭샤가 했다는 유명한 말이 그래서 생겨난 것이다. ‘아, 저 영화가 저런 내용이었구나’. 금발의 가발을 땅바닥에 집어던지고 도시의 어두운 뒷골목으로 사라지던 린칭샤는 자신이 연기한 장면을 부분적으로, 파편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을 뿐 그것이 영화 전체의 줄거리와 어떻게 씨줄 날줄로 연결되는지 촬영이 다 끝날 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2046’을 찍기 위해 일본의 대표적 아이돌 스타인 기무라 다쿠야를 만났을 때 일본 측 스태프들은 모두 그런 작업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촬영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무라가 적극적으로 왕자웨이 감독과 함께 영화하고 싶다고 해 출연이 이루어졌다.

    “우리 제작자가 기무라 다쿠야의 팬이다. 그가 출연한 모든 영화의 비디오테이프를 나에게 한아름 안겨주면서, 얼마나 멋진 배우인지 한번 보라고 해서 출연 섭외가 시작되었다. 기무라는 노래, 춤, 권투 연기 모두 잘한다. 카메라 앞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끌어낸다. 오히려 그를 진정시키면서 다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게 해야 할 정도로 에너지가 많다. 그런데 이제 우리 제작자 취향이 많이 바뀌어서, 한국 배우들에게 눈을 돌렸다. 다음 영화를 찍을 때면 장동건이 나온 비디오테이프를 나에게 주면서 출연을 푸싱할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모든 배우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카메라 앞에 서는 모든 배우들에게 애정을 갖는다. 내 영화에는 엑스트라가 없다. 모든 배우들을 하나하나 소중하게 생각한다. 때로는 스태프들을 카메라 앞에 세우기도 한다. 내가 익히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가 필요할 때면 스태프들을 배우로 세우기도 한다.”

    ‘2046’의 왕자웨이 감독

    대표작 ‘화양연화’(왼쪽)와 그 속편 ‘2046’.

    ‘2046’은 1966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69년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3년 동안에 이루어진 슬픈 사랑과 이별을 담고 있다. 포스터에는 영화의 중심 배경인 오리엔탈 호텔(Oriental Hotel, 東方酒店) 옥상을 배경으로 양복 조끼를 입은 량차오웨이의 목에 팔을 두르고 고개를 45도 각도로 치켜세우며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장쯔이의 얼굴이 드러나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차우는 항상 망설이거나 무엇을 할 시기를 놓치고 후회한다.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상상하면서 왜 그때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하는 것이다. 현재의 자기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를 보지 못하고, 과거나 미래만 생각하고 살다가는 많은 것을 놓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사랑. 그렇다, 그것이 문제다. 거장들의 질문은 항상 단순하다. 왕자웨이는 같은 질문을 수없이 반복한다. 새로운 형식에 대한 그의 집착은, 고전적 내용을 극복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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