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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멕시코도 지금 ‘과거사 청산 중’

민주화운동 단체들 ‘68년 대학살’ 책임자 처벌·의문사 진상규명 등 촉구

  • 멕시코시티=한동엽 통신원 boracap@hanmail.net

멕시코도 지금 ‘과거사 청산 중’

멕시코도 지금 ‘과거사 청산 중’

1968년 10월2일 ‘제3광장’에 집결한 시위대

잊지 말라! 10월2일!(No se olvide! Dos de Octubre!)”

10월2일 오후 4시를 조금 넘긴 시간, 멕시코시티 틀랄텔롤코 제3광장. 8000여명의 시위대는 대통령궁이 있는 소칼로 광장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68위원회’를 선두로 하여 1968년 당시 학생운동의 주역이었던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 국립공과대학, 국립농업대학 등의 학생들이 뒤를 이었다. 이들을 기다리던 시민들 또한 행진에 합류했다. 행진이 진행되는 동안 연사들은 번갈아가며 이번 집회와 행진의 의의를 구호로 외쳤다.

“붉은 피는 죽지 않는다. 너의 죽음은 살아 있다!”

집회에 나선 이들은 △68년과 71년 대학살의 책임자인 루이스 에체베리아 전 대통령과 관련자 구속 △개악된 의료보험법 폐지와 의료의 질 개선 △교육 개혁 △정치범(양심수) 석방 △의문사 진상규명 등을 촉구했다.

당시 학생 중심 시위대 수백명 사상



68년 당시 투쟁위원회 지도자였던 ‘68위원회’ 라울 알바레스 가린은 기자회견을 통해 “대법원은 자신의 역사적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며 “학살의 주범 루이스 에체베리아 정권(1970∼76)에 맞서 싸웠던 수많은 양심수를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멕시코인들에게 68년 10월은 의미가 크다. 제3세계 국가 가운데 최초로 올림픽대회를 개최한 해이자, 멕시코혁명(1910∼40) 주축세력이었으나 혁명 이후 국가 부정부패의 핵심세력이 된 제도혁명당(PRI) 일당 독재체제의 억압에 대항하여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민세력이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낸 해이기도 하다.

68년 7월 말 지식인층의 민주주의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프라하의 봄’으로부터 시작되는 반체제 운동의 자극을 받은 국립자치대학교, 국립공과대학 등의 학생들은 ‘대학의 자치와 학생의 권리’를 구호로 내세우며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7월29일 정부 측의 발포로 수백명의 부상자와 수십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많은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됐다. 당시 현장에 있었다 나중에 경찰에 구속된 살바도르 사르코는 “정부는 도시에서의 학생운동을 ‘공산주의자’ 음모로 몰았지만, 이 학살을 통해 저항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첫 발포 이후 시위대는 더욱 조직화됐다. 8월2일 전국투쟁위원회를 발족시켰으며 4일 성명을 통해 △정치범의 자유 △학생의 정치활동을 제한한 헌법 조항 폐지 △경찰 책임자 파면 △사망자의 가족과 부상자에 대한 보상 △발포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했다.

이후 가속화된 민주화 투쟁에 참가한 인원은 8월13일 15만여명, 27일 30만여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9월13일에는 25만여명의 학생과 교수, 노동자가 침묵시위에 참여했다.

멕시코도 지금 ‘과거사 청산 중’

시위 학생들을 체포한 군경

이에 정부는 9월18일 투쟁위원회의 주요 거점이었던 국립자치대학교에 군대를 투입해 점거하고 대학 안에서의 모든 활동을 중지했다. 당시 국립자치대학교의 하비에르 바로스씨에라 총장은 시위대 선두에 서서 항의했지만, 군대는 9월 말까지 12일간 캠퍼스를 점거했다.

8월27일부터 다시 시작된 제3광장에서의 집회는 10월2일에 이르러 정점에 달했다. 이날 제3광장에 모인 수천명의 학생들은 ‘살인과 납치, 고문과 박해’를 자행한 공권력에 맞서 거리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루이스 에체베리아는 군과 경찰을 보내는 것으로 학생들의 외침에 답했다. 이날 발포로 5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일주일 동안 200여명의 학생과 노동자가 연행됐다.

이 가운데 80여명은 재판도 받지 못한 채 71년 12월까지 수감됐다. 살바도르 사르코는 당시 상황에 대해 “집회는 오후 5시30분에 시작됐다. 그리고 6시10분경 첫 발포를 시작으로 사방에서 조명탄이 날아들었다”고 기억했다.

현재까지 민주인사들 실종·암살 계속

10월9일 투쟁위원회는 ‘올림픽이 개최되는 12일부터 28일까지 어떠한 집회도 열지 않는다’는 데 합의, 온 세계는 ‘평화의 올림픽’만을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12월4일 학생들이 학교로 복귀함으로써 68년 학생운동은 ‘미완의 투쟁’으로 끝을 맺었다. 내무부 장관으로서 무력진압을 주도했던 루이스 에체베리아는 70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는 민주주의 세력과 그들의 투쟁을 ‘더러운 전쟁(La Guerra sucia)’으로 불렀을 만큼 악명 높은 탄압과 학살을 자행했던 인물이다.

‘68년 대학살’ 30주년을 맞으면서 각계각층에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 나섰다. 68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디아스 오르다스는 “당시 무력진압은 외국 세력이 개입된 내전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밝혔으며, 루이스 에체베리아는 “전화로 발포와 관련한 보고를 받았을 뿐, 당시 발포명령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발뺌했다.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진상규명을 위한 특검이 구성됐으나, 정부의 철저한 정보 통제로 아무런 성과도 얻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날, ‘68위원회’를 비롯한 수많은 민주화운동 단체들은 “정확한 사망자 수조차 밝혀지지 않은 채 수백여명이 실종자로 처리된 68년과 71년의 대학살, 그리고 에체베리아 통치기간 동안 실종되거나 사망한 사람들에 대한 진상규명”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에체베리아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디아스 오르다스에게 책임을 떠넘긴 채 ‘과거사 진상규명 특별위원회’의 질의에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50년에 걸친 일당 독재체제 속에서 대중집회를 불가능한 것으로만 여겼던 멕시코인들에게 ‘68년 학생운동’은 큰 의미를 갖는다. 이를 기점으로 정부 여당에 대한 저항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2000년 정권교체를 이룰 때까지 진행된 민주화 투쟁은 이 ‘68년 학생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폭스 정부가 들어선 오늘날에도 멕시코에서는 여전히 학생운동 지도자, 인권운동가, 민주 인사들에 대한 실종과 암살이 계속되고 있는 형편이다. 자살로 발표된 인권변호사 오초아의 죽음, 4월23일 실종된 지점에서 차로 1시간가량 떨어진 야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국립자치대학교 학생운동가 파벨 곤살레스 등 멕시코 민주주의 운동은 물음표투성이다.

실종자진상규명위원회 로사리오 위원장은 “수백명의 실종자가 존재하는 현실에서는 민주주의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며 실종자들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양심수석방위원회는 현재 수배 중이거나 구속된 정치사상범이 400명에 달하며, 그 가운데 다수가 실종됐거나 살해됐다고 밝히고 있다.

1968년 당시 투쟁위원회 위원이었으며, ‘자유는 결코 68년의 기억을 잊지 않는다’의 저자 구스타보 니에블로는 “학살 책임자에 대한 규명과 처벌 없는 이곳에는 진실도 정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이미 36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학살의 주범’은 도서관 구석에 놓인 논문의 ‘가설’로만 존재하는 멕시코 민주주의의 현실. 기약할 수 없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는 함성은 내년 10월2일에도 다시 멕시코 거리에 등장할 것이다.



주간동아 456호 (p62~63)

멕시코시티=한동엽 통신원 boraca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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