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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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 수용 수도권 농민들 ”환장하겠소”

농사짓지 않으면 실거래가 기준 양도세 부과‥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4-06-25 16: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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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 아들 아름이를 부탁합니다. 죽어서도 일산 신도시 결사 반대를 외쳐봅니다.” 1989년 9월5일, 경기도 일산읍 마두4리 한지영씨(당시 31살)는 이런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같은 해 4월 신도시개발계획이 발표된 후 일산에서만 다섯 명의 농민과 세입자가 잇따라 자살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생계의 막막함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겼다.

    농지 수용 수도권 농민들 ”환장하겠소”

    김포 신도시 반대 시위 대열에 합류한 촌로.

    15년이 지난 지금, 충청 지역을 포함한 수도권은 여전히 개발 몸살을 앓고 있다. 각종 명분으로 농지가 수용되는 개발지는 전국에 200여곳. 그중 60여곳이 수도권에 몰려 있다. 해당 지역의 중•소농, 소작민들이 처해 있는 상황 또한 갑갑하긴 마찬가지다. 많게는 보상액의 36%에 이르는 양도세를 감면받기 위해, 무엇보다 계속 농사를 짓기 위해 새 땅을 사야 하는 자영농민들의 고민은 오히려 더 커졌다. 보상금만으로는 주변에서 이전 규모의 농토를 도저히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한 평을 뺏어갔으면 최소한 한 평을 달라, 간단히 말해 이거예요. 보상이라는 게 뭡니까. 더 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더 받기는커녕 거지가 되게 생겼어요.” ‘김포신도시 결사반대투쟁위원회’(이하 김포투위) 정광영 위원장의 말이다.

    “김포 장기1지구만 해도 어디 볼까요? 실거래가의 5분의 1, 어떤 곳은 10분의 1밖에 보상을 못 받았어요. 예를 들어 임야다, 그러면 한국토지공사(이하 토공)는 그걸 평당 평균 13만원에 수용해 건설회사에는 340만원에 분양했어요. 인근 아파트 부지 값이 지금 얼만지 아세요? 평당 150만원이에요. 그런데도 토공은 ‘공시지가의 200%나 줬다’며 큰소리를 치고 있는 겁니다.” 현재 수도권과 충청 지역의 신도시 개발지는 대부분 토지투기억제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이는 보상금에도 적용돼 실거래가 기준 양도세를 부과하게 돼 있다. 그러나 대체농지(이하 대토)를 ‘보상 면적 이상’ 또는 ‘보상금의 절반 이상을 들여’ 구입한 뒤 3년간 경작하면 양도세를, 보상금을 받은 뒤 1년 내에 토지를 구입할 경우 취득•등록세까지 면제해준다. 토지가 수용된 농민이라면 당연히 대토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한 평 수용했으면 한 평을 달라”

    아산 신도시 예정지 주민인 김정일씨는 “주변에 보상금으로 살 수 있는 땅이 없다”고 했다. “아산시 선장면 도고면, 당진군 우강읍 합덕읍, 멀리 예산 홍성 지역까지 다 값이 올랐어요. 당연하지요. 바로 코앞에 신행정수도며 대규모 신도시가 들어서는데요. 답답해 멀리 당진, 예산군까지 땅을 보러 다니고 있지만 답이 안 나와요, 답이.” 그래서 개발 지구 인근 부동산 시장에선 예외 없이 ‘대토 특수’가 형성된다. 경기도 대부분 지역, 충청도의 천안 아산 인근 등지가 바로 지금 이 대토 특수에 휩싸여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신도시 예정지치고 ‘개발 백지화’를 외치는 주민대책위가 없는 곳이 없다. 대개 동네 이장이 위원장을 맡는데, 인터뷰에 응한 4명의 ‘위원장’들은 “보상금 좀더 받겠다고 데모나 하러 다니는 사람들로 취급받는 것이 가장 억울하다”고 했다.



    아산시 ‘탕정지역삼성공단 반대투쟁위원회’ 최규섭 위원장도 갈산1구 이장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일이지요. 개발이라는 게 그렇게 좋은 거면 왜 가는 곳곳마다 농민들이 빨간 띠 두르고 데모를 하겠습니까. 막상 닥쳐보면 안 하는 게 최선입니다. 대지주가 아닌 다음에야 농군이 고향 떠나 어디서 뭘…. 그래도 꼭 해야 한다면 현실적인 생계 대책을 마련해줘야지요.” 파주시 원롱면 덕운4리 이장인 박노권씨도 지난해 ‘LG필립스 LCD단지 반대대책위’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60평생을 농군으로만 산 박씨는 “대책위라고는 하지만 별 힘을 쓰지 못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지요. 그냥 사정을 하고 다닌 거예요. 사실 저처럼 집은 수용 안 되고 농토만 수용된 사람들도 기가 막혀요. 주변 땅값은 비싸니 저 멀리 새 논을 구해야 하는데, 그럼 집에서 차를 몰고 농사지으러 다니란 얘기잖아요.”

    “먹고살 길 막막 … 갈 곳이 없어”

    김포투위 정광영 위원장은 “더 큰 문제는 남의 땅 도지해서 먹고살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노인 분들이 많지요. 쥐꼬리만한 이주비로 어디 천막집이라도 얻을 수 있겠나. 붙여먹을 땅 없으면 당장 굶어야 하는 이들을…. 토공은 ‘딱지 팔면 될 것 아니냐’고 하는데, 그럼 정부가 지금 딱지 장사를 조장하겠다는 겁니까? 또 그걸 팔면 평생이 보장되기라도 하나요?” ‘전국개발지역주민단체 총연대’ 이중택 공동의장은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공시지가가 실거래가보다 한참 낮다는 건 다 아는 일이지요. 시가대로 책정해 세금을 매겼다 땅값이 떨어지면 조세 저항이 생기니까요. 감정평가연구원에선 공시지가가 실거래가의 70~ 80% 수준이라고 하지만 그건 도심지 이야기예요. 임야나 절대 농지는 그렇지 않죠. 임야는 소득이 없고, 절대 농지는 어차피 죽으나 사나 농사짓는 땅이고. 그런데 이게 개발지구로 지정된단 말입니다. 당연히 값은 천정부지로 뜁니다. 주변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요.”

    농지 수용 수도권 농민들 ”환장하겠소”

    경기 파주시청 앞에서 열린 파주 운정택지개발 예정지구 백지화 투쟁을 위한 시민결의대회 모습.

    이의장은 “이런 상황에서 토공은 공시지가를 기준 삼아 얼마를 더 보태는 형태로, 그러니까 200% 더 줬다, 500% 더 줬다 하는 식으로 보상금을 책정한다”며 “그런데 주변 땅값이 그렇게 가만히 있느냐, 게다가 무지막지한 양도세는 또 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민들은 가만있는데 자기들 맘대로 신도시 개발 지구로 정하고 또 토지투기억제지역으로 정하고. 보상금은 공시지가 기준으로 주면서 세금은 실거래가 기준으로 내라는 거예요. 건설교통부는 공시지가, 국세청은 실거래가. 부처 간에도 손발이 안 맞는 것 아닙니까. 일본에 판례가 있어요. ‘한 평을 수용할 경우 인근 유사 토지 한 평을 살 수 있는 것이 정당보상’이라고. 우리도 그걸 원하는 겁니다. 돈이 아니라 차라리 땅을 달라고요.”

    “보상금으로는 갈 곳이 없다”는 농민들의 하소연에 대한 토지공사 측 답변은 간단하다. “상실감은 이해하나 요구를 다 들어주다 보면 서민들을 위한 신도시 조성이 불가능하다”는 것. 재정경제부 관계자도 “공시지가의 2배 이상 보상을 받았으면 세금도 그만큼 더 내야 한다”는 원칙론만 되풀이했다. 지난 5월 초 파주시 원롱면에서는 흉사가 있었다. 산업단지 지정 후 보상을 받았지만 미처 새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노부부가 있었다. 집을 뱅 둘러 흙더미가 쌓여가자 노인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시청 등을 쫓아다니며 “안 나가겠다는 게 아니라 준비가 늦어져서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큰비가 온 이틀 뒤, 할아버지가 농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 원롱면 주민 박용재씨는 “억울해서 정말 이대로는 못 나간다. 버틸 수 있는 한 끝까지 버텨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힘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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