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4

2004.05.13

해 지고 가시밭길 … 초라한 JP

김용채 前 장관 정치자금 ‘커밍아웃’… 10일 이후 검찰 출두 뜻 밝혀 권력 무상 실감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4-05-06 1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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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 지고 가시밭길 … 초라한 JP

    2004년 4월19일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정계은퇴를 발표하기 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은퇴한 JP(김종필 자민련 전 총재)가 지옥의 문턱으로 불려나왔다. 정치적 위엄도, 카리스마도 잃은 JP를 불러낸 사람은 40여년 정치 여정을 함께해온 김용채 전 건설교통부 장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 기소된 김 전 장관은 항소심 재판부에 2장짜리 탄원서를 제출, ‘문제의 돈을 JP에게 건넸다’며 JP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1980년 신군부의 탄압 뒤 25년 만에 맞닥뜨린 위기에 대해 JP와 청구동 식구들은 연신 입맛을 다신다. 측근 중의 측근이었던 김 전 장관이 ‘덫’을 판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눈치다. 청구동 한 관계자는 “결과적으로 자기가 살기 위해 평생 주군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정계를 은퇴해 민심도, 측근도 떠난 JP는 정경유착과 계보, 변절과 배신 등 한국정치를 지배했던 어두운 화두와 싸우며 초라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정경유착, 변절과 배신 부메랑

    ‘2000년 당시 자민련 총재이던 이한동 국무총리가 나서 한갑수 농림수산부 장관, 정우택 해양수산부 장관, 한국토지공사 사장이던 본인 이렇게 4명이 각각 10억원씩 정치자금을 만들어 당의 어려움을 돕자고 제안했다.’ 김 전 장관이 탄원서에 적은 정치자금 조성 배경은 ‘3김 정치’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정경유착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김 전 장관은 한국토지공사(이하 토공) 사장으로 재직하던 2000년 당시 토공이 시행을 맡은 개성공단 공사와 관련해 시공사인 현대건설로부터 각종 편의제공 청탁을 받고 6억원을 받았다는 것이 검찰의 주장. 토공은 당시 유동성 위기에 처한 현대를 대신해 개성공단 지원에 나섰고, 현대로서는 토공의 적극적인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로비력을 집중했다. 김 전 장관이 6억원의 정치자금을 받을 당시 현대는 정부로부터 엄청난 공적자금을 제공받았다.

    김 전 장관이 탄원서에서 지목한 4인의 고위직 인사들이 만성적자에 허덕이던 ‘자민련 살리기’에 동원됐다는 얘기는 JP, 나아가 3김이 어떻게 정치자금을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볼 수 있다. 특히 JP의 만년 2인자 처세가 결코 ‘속빈 강정’이 아님도 확인시켜준다. 이들은 모두 DJP 연대의 가장 큰 수혜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JP의 도움을 얻어 국민의 정부 시절 고위직에 올랐다. 당시 자민련 소속으로 장관 및 정부투자 기관장 자리를 노린 인사들의 경쟁은 치열했고 대부분 JP의 낙점에 목을 맸다. JP는 이런 인사권을 통해 카리스마를 키웠고 당을 통제했다. JP의 낙점을 받아 정부직에 나간 인사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보은을 해야 한다는 보험 심리가 작용했고, 김 전 장관은 이 추측이 사실임을 확인시켜준 셈이다. 김 전 장관이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주군과의 거래를 입에 올린 것은 자신의 선고형량에 대한 부담 때문으로 보인다. 김 전 장관은 1심에서 징역 6년, 추징금 6억원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나이 72살. 이 형량대로라면 78살이 돼야 빛을 볼 수 있는 그가 이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 전 장관은 4월 중순 면회 온 한 지인에게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40년 동안이나 받들고 모시던 총재님을 총선 직전이라 의리상 밝힐 수 없었지만 돈은 모두 JP에게 전달된 것이 확실하다. 이 돈은 개인적으로 대가를 바란 뇌물이 아니다. 특가법상 뇌물수수가 아닌 정치자금법으로 다뤄져야 한다.”



    김 전 장관은 결심공판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다. 정치자금법 위반은 최고형이 3년. 특가법상 뇌물보다 형량이 가볍다. 내용대로라면 김 전 장관은 3년을 벌기 위해 평생을 모셨던 JP를 끌어낸 것이 된다. 또 한때 정치동지였던 자민련 소속 다른 인사들의 정치자금 모금행위도 공개, 당사자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김 전 장관의 탄원서로 구설에 오른 전직 장관의 한 측근은 “내 살자고 다른 사람을 사지로 밀어넣는 변절과 배신행위”라며 김 전 장관의 행동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김 전 장관은 JP 밑에서 두 번의 장관(정무, 건설교통부)과 토지공사 사장, 당3역 등을 역임한 핵심 가운데 핵심. 그런 김 전 장관의 ‘커밍아웃’은 정치인들의 신뢰와 의리가 얼마나 보잘것없으며, 변절과 배신이 얼마나 손쉬운 생존수단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JP는 김 전 장관의 이런 행동에 대해 일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 한 측근의 전언이다. 지난해 연말 강삼재 의원도 97년 안기부 자금과 관련한 수백억원의 추징금과 높은 형량을 우려, 평생 모셨던 YS(김영삼 전 대통령)를 법정으로 끌어들인 바 있다. 3김시대가 끝나면서 그들을 가장 먼저 덮친 것은 결국 가장 측근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의 변절과 배신인 셈이다.

    해 지고 가시밭길 … 초라한 JP

    2001년 8월 건설교통부 장관 임명 통보를 받고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용채 전 의원.

    검찰은 자민련 전당대회가 끝나는 5월10일 이후 JP를 소환할 예정이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초기 직·간접적으로 가해지는 당내외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본의 아닌 외유에 나섰던 JP는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런 외유도 불가능하게 됐다. 검찰이 출금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JP 측도 검찰의 소환에 응할 뜻을 밝혀왔다고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이 전했다. 사면초가에 몰린 JP 주변은 어느 때보다 썰렁해 덧없는 권력의 속성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있다. JP가 위기에 빠졌는데도 청구동을 찾는 인사들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것이 자민련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당내에서는 “10선에 대한 고집과 욕심 때문에 당을 망쳤다”는 비난 여론이 아직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여론과 언론도 2인자 처신으로 일관해온 그의 말년 악재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 JP 주변에서는 정치탄압 또는 보복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JP 측근 K씨는 검찰의 음모론을 내놓는다. 그는 “박태영 전남지사가 투신자살하자 코너에 몰린 검찰이 국면전환 차원에서 JP 이름을 흘렸다”는 것. 부관참시라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검찰의 입장은 확고하다. 검찰은 “특별히 재력이 있는 것도, 친분관계가 넓은 것도 아닌 분들이 정무직에 있으면서 10억원씩의 돈을 모았다면 대가 있는 돈이거나 정책을 이용한 모금이 아니냐”며 이한동 전 총리 등 전·현직 자민련 의원들까지 소환할 계획이다. 엎친 데 덮친 JP의 말년 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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