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4

2004.05.13

고위층 잇단 자살 … 검찰도 죽을 맛

“그렇게 조심했는데 또” … 박태영 지사 자살에 대한 책임론·수사 시스템 문제제기에 ‘곤욕’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4-05-06 13: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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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위층 잇단 자살 … 검찰도 죽을 맛

    4월27일 국민건강보험공단 인사 및 납품 비리 등의 혐의로 서울남부지검에 소환된 박태영 전남지사.

    ”사실 그는 누가 봐도 위태로웠다. 그래서 정말 신경 써서 수사했고 수사진들에게도 누차 조심하라고 당부했는데….”

    4월29일 한강에서 투신자살한 박태영 전남도지사(63)를 수사한 서울남부지검의 태도는 그야말로 유리그릇 다루듯 조심스러웠다고 한다. 심지어 “‘강압수사’가 아닌 지나친 ‘예우수사’가 박지사의 모멸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극진한 배려가 이뤄졌다는 게 남부지검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박지사가 검찰의 ‘국민건강보험공단 납품비리’ 수사에서 받았다는 특권 아닌 특권이란 무엇일까.

    우선 검찰은 박지사에게 상시적인 변호인 접견권을 보장했다. 게다가 비교적 무거운 혐의를 받고 있는 박지사를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함으로써 차가운 구치소가 아닌 집에서 출퇴근하며 조사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호남 출신인 이준보 차장검사가 직접 피내사자 신분인 박지사와 환담을 나누기도 했으며, 언론에 혐의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수사 내용에 대해 함구로 일관했다. 대검의 한 관계자는 “박지사의 경우 변호인이 입회해 장시간 조서까지 수정해가며 조사했다”며 “강압적인 내용은 절대 없다”고 말했다.

    출퇴근 조사에 변호인 접견권 보장 ‘배려’

    검찰수사를 받던 지도층 인사들의 연이은 자살사태(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안상영 부산시장,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 이후 수사관행에 변화가 생겼다는 게 검찰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하지만 검찰이 박지사에게 준 그 어떤 ‘특권’도 국회의원과 산업자원부 장관을 역임한 그의 실추된 자존심을 회복시킬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박지사는 제3차 소환에 따라 검찰로 가던 중 한강에 뛰어들어 불명예스러운 자신의 과오를 죽음으로 속죄했다.



    이번 사건으로 고위 인사들의 추락한 도덕성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충격도 적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쪽은 수사에 소심함을 내비친 검찰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동부그룹과 ㈜부영 등 비리관련 수사에 차질이 생길 것 같다. 이 상황에서 어떤 검사가 의욕을 가지고 고위 인사에 대한 사정작업을 벌이겠는가. 나부터 당장 수사를 그만두고 싶다.”

    박지사의 자살 소식을 접한 대검 한 고위 관계자의 한탄이다. 사건 직후 검찰 수뇌부는 긴급회의를 열어 당일 예정됐던 자민련 이인제 의원에 대한 강제구인 방침을 보류했다. 이후 박지사에 대한 강압수사가 없었다는 점을 확인한 검찰 수뇌부는 “수사 시스템을 재점검해 문제가 있다면 과감하게 바꾸겠다”는 담담한 반응을 보였지만 잇따른 자살사태에 대한 ‘검찰책임론’에서 한동안 자유롭지 못할 전망이다. 이로 인해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종결하고 공직자 비리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에 돌입하려던 검찰의 제2기 사정계획에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박지사의 혐의는 무거운 편이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재직시 납품비리와 관련한 수뢰(1억1000만원), 전남지사 출마 때 수뢰한 불법 정치자금(3000만원), 그리고 도지사 재직시 직원들한테서 인사 청탁으로 받은 돈(5000만원) 등이 검찰의 표적이었다. 공공기관 납품비리는 오랫동안 묵인된 관행이었다는 감싸주기식 반론도 없지 않지만 과거 민주당 출신들로, 이번 비리에 연루된 건강보험공단 측근들이 전남도청까지 박지사와 함께 자리를 옮긴 점이나, 박지사가 자살 직전까지 전남도청의 인사비리를 감추려 했던 사실 등은 이런 반론을 무색케 한다. 수사 도중 박지사는 자신의 수뢰를 입증하는 측근들의 검찰 진술에 큰 배신감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그는 사법적 처벌과 사회적 비난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른바 ‘사무라이식 자살’을 선택했다. 죽은 자에 대한 수사는 바로 종결되기 때문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안상영 부산시장과 마찬가지로 박지사가 죽음으로 정치적 탄압에 항거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대 법대 하태훈 교수는 “연이은 고위 인사 자살사태는 정치적 타협에 머물러온 과거의 수사관행을 탈피한 검찰의 개혁의지와 이에 호응하는 국민의 높아진 의식에 대한 부담감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이는 1980년대 일본에서 고위 공직자 뇌물 스캔들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하자 자살이 속출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투명성이 높아가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진통이라는 것.

    4월27일 불법 대선자금 모금 혐의로 기소된 한나라당 김영일 의원은 결심공판에서 “구구한 변명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안상영 시장의 용기가 부러워 하루에도 여러 번 자결 충동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부패에 연루된 지도층들이 현재의 사정정국, 나아가 시대변화에 느끼는 충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발언이다.

    하지만 검찰이 부정부패에 연루된 사회지도층 인사들에 대해 ‘부드러운’ 수사를 벌였다고 연이은 자살에 대한 검찰의 책임이 줄어들 수 없다는 반론도 없지 않다. 검찰이 뼛속까지 안고 있는 수사관행 또한 ‘자살 바이러스’유포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검찰수사와 검찰에 만연해 있는 고질적인 병폐란 무엇일까.

    1970년대 정을병의 소설 ‘육조지’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형사는 때려 조지고, 검사는 불러 조지고, 판사는 늘려 조지고, 죄수는 먹어 조지고, 마누라는 팔아 조지고….”

    이런 상황은 2000년대 들어 ‘개털’들에게 별반 달라진 게 없고 ‘범털’인 고위층 인사 역시 이런 상황을 쉽게 피해갈 수 없다는 게 법조계 주변의 얘기다.

    민주사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사무처장인 김인회 변호사는 “아무리 국민의 높은 지지 속에서 이뤄지는 정당한 수사라 할지라도 인권을 유린하는 검찰수사의 고질적인 병폐가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사회 투명성 높아가는 과정에서의 진통”

    2월 안상영 부산시장을 자살로 몰고 간 직접적인 원인은 부산구치소와 서울구치소를 무리하게 오가게 만든 검찰의 무원칙한 수사관행에 있었다. 당시 서울지검은 안시장을 이른 새벽 서울로 불러놓고도 조사는커녕 하루 종일 기다리게 했다. 이른바 모멸감을 주는 수사방식으로 ‘기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해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수사기법이다. 정몽헌 회장도 대검 중수부에 소환되기를 반복하며 자백을 강요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정회장은 자신의 12층 집무실에서 몸을 던짐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박지사의 경우에도 밤 12시까지 하루 14시간의 검찰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변호사는 “증거에 의한 과학수사가 아닌 자백에 의한 수사에 의존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강압수사 모양새를 띨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계좌추적이 불가능하고 돈의 사용처가 불확실한 현금수수의 경우에는 자존심 건드리기 방식과 사전형량조정제도(plea bargain·수사협조 대가로 형량을 감해주는 것)이 널리 활용된다는 것.

    문제는 연이은 자살이 검찰의 수사 와중에 생긴 일이지만 원인이 한 번도 속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동안 ‘강압수사’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된 까닭은 조사과정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2002년 발생한 서울지검 특조실 내 피의자 구타 사망사건 때 CCTV가 작동하지 않았던 점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오래 전부터 인권단체에서는 “검찰이 ‘인권보호’에 자신이 있다면 수사기록을 녹음해 공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법무부는 이를 받아들여 조사 도중 물리적ㆍ언어적 폭력을 없애기 위해 ‘검찰수사과학화 추진단’을 결성했으며, 5월부터 전국 10개 지청의 조사 및 수사 과정에서 녹음ㆍ녹화제도를 실시키로 결정했다. 그러나 녹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피의자의 동의를 구해야 하기 때문에 일선 수사관들 사이에서 활용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고위층 잇단 자살 … 검찰도 죽을 맛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안상영 부산시장,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 영결식 장면(왼쪽부터).

    그러나 검찰이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는 검찰과 피의자 사이의 정치적 타협, 이른바 플리바겐이 빈번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라는 게 법조계 주변의 전언이다. 말하자면 가벼운 것을 고백하는 대신 무거운 죄를 눈감아주는 정치적 거래인 셈.

    결국 관심의 초점은 여태껏 원칙조차 제대로 확립되지 못한 ‘피의자의 변호인 접견권’에 모아진다. 이것이 명확한 권리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검찰의 적극적인 태도 변화가 필수적이다. 최근 1심에서 7년형을 선고받은 송두율 교수 사건 역시 검찰의 심문에서 변호인의 입회가 허락되지 않아 비난 여론이 쏟아지기도 했다.

    한편 서울지검에 근무하는 한 중견검사는 “온갖 배려 속에 진행된 검찰 수사를 마다한 박지사의 자살은 시대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자신의 명예만을 위한 비겁한 선택이었다”고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박지사가 부여받은 상식적인 권리를 ‘배려’나 ‘특권’으로 생각한다면 제2의 박태영 안상영 사건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많은 법조인들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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