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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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점 또 만점 … 神技의 체조 요정

76년 몬트리올서 올림픽 사상 첫 만점 … 여섯 차례 완벽 연기로 3관왕 올라

  •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younlo54@yahoo.co.kr

    입력2004-04-14 17: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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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점 또 만점 … 神技의 체조 요정

    1979년 런던국제체조대회에서 평균대 연기를 하고 있는 코마네치.

    전광판 숫자는 ‘1.0’. 관중석은 술렁거렸다. 순간 항상 9.0 이상의 점수를 받던 소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은 1.0이 아니었다. 만점인 10.0을 표시한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체조에서 ‘만점’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전광판은 최대 9.99점까지 나오게 되어 있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은 한국으로선 잊을 수 없는 대회다. 건국 이후 최초의 금메달 획득, 구기종목 첫 메달 수상 등 결과가 뛰어났던 것. 한국은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에 출전한 양정모 선수가 한국 국적으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차지했고, 여자배구는 구기종목 사상 첫 메달(동)을 땄다. 그러나 몬트리올 올림픽이 역사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유는 체조 종목 최초로 만점 기록을 세운 나디아 코마네치 때문이다.

    올림픽 역사가들은 여자 체조에서 루마니아의 코마네치가 무려 여섯 번이나 만점을 기록하면서 금메달 3개를 차지한 것을 매우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실 체조는 기록경기가 아니라 인간의 눈으로 선수들의 플레이(또는 연기)를 보고 10점을 만점으로 해서 점수를 매기는 경기이기 때문에 9.9점이라면 몰라도 10점 만점을 주기가 어려운 종목이다. 신이 아니고서는 완벽한 플레이를 할 수 없다는 게 그때까지 체조계의 불문율이었던 것이다. 코마네치의 연기는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즉 심판들이 앞으로 ‘이보다 더 뛰어난 플레이는 없다’는 뜻에서 만점을 준 것이다.

    80년 올림픽도 석권 후 84년 은퇴

    몬트리올 올림픽은 14세의 체조 요정 코마네치를 위한 대회였다. 당시만 해도 올림픽 출전에 나이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14세의 요정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153cm, 39kg의 가냘픈 몸매의 코마네치는 10점 만점을 여섯 차례나 기록하며 개인종합 금메달 등 3관왕에 올랐다. 코마네치는 이미 1975년 유럽선수권에서 체조사상 처음으로 10점 만점을 받아 세계무대에서의 만점을 예고했다.



    체조계에는 코마네치 이전에도 요정이라고 불렸던 선수가 있었지만, 코마네치만큼 그 별명에 어울리는 선수는 없었다. 여자체조는 코마네치를 기점으로 여성미를 보여주는 눈요깃거리 스포츠에서 기술이 가미된 ‘예술’로 승화했다. 코마네치는 76, 77, 79년 세계선수권 우승과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2관왕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구가했고, 84년 LA 올림픽을 몇 주 앞두고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코마네치는 루마니아의 유명한 체조코치 벨라 카롤리가 여섯 살 때부터 발굴해 키워온 준비된 선수였다. 코마네치는 61년 11월12일 루마니아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에서 기계공인 아버지와 노동 일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까지는 평범한 소녀로 자랐지만 여섯 살 때 카롤리 코치의 눈에 띄어 ‘카롤리 체조연구원’에 입문한 뒤 하루 4~5시간의 훈련과 음식조절을 해가며 체조 요정의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특히 살이 찌는 음식은 절대로 먹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생선과 사탕, 고기는 금기 음식이었다.

    코마네치가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켰을 때 그를 둘러싼 기자들에게 그가 한 첫마디는 “집에 가서 놀면서 햄버거와 사탕을 실컷 먹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코마네치는 카롤리 코치 휘하에 들어간 지 1년 만인 일곱 살 때 처음으로 국내대회에 출전해서 13위에 그쳤다. 그러자 카롤리 코치는 꾸중하는 대신 에스키모 인형을 사주면서 “다시는 13등을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 이후 코마네치는 경기를 할 때마다 에스키모 인형을 가지고 다녔다. 아니, 그때부터 아예 인형 수집이 그의 취미가 되었다. 200여개의 인형을 모았지만 카렐리 코치가 사준 에스키모 인형을 언제나 들고 다녔다. 물론 이후 국내외 대회에서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코마네치는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할 때도 그 인형을 들고 비행기 트랩에 올랐다. 코마네치는 그 인형이 보이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했다. 마치 그 인형이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도 되는 듯이.

    만점 또 만점 … 神技의 체조 요정

    차우셰스쿠는 체조를 특별 육성해 코마네치 같은 스타를 배출했다.

    코마네치는 뛰어난 체조 실력만큼이나 별명도 많았다. 체조경기장에서는 웃음 짓는 일이 거의 없어서 ‘작은 바위 덩어리’로 불렸고, 가로 10cm의 평균대를 훨훨 날고 이단평행봉에서 공중을 헤집듯이 절묘한 묘기를 연출할 때는 ‘냉정한 작은 벼룩’이라고도 불렸다. 당시 시사잡지 ‘타임’은 코마네치를 “인간의 몸을 빌려 지상에 나타난 요정”이라고 극찬했다.

    코마네치가 몬트리올 올림픽을 끝내고 돌아오던 날 루마니아 공항은 그를 환영하는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들은 ‘코마네치 만세’를 부르며 그 곁으로 밀려들었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내린 코마네치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오히려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그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에스키모 인형의 목이 부러졌기 때문이었다. 역시 14살 소녀였다.

    코마네치는 최근 20세기를 빛낸 최고의 여자선수로 뽑히는 등 체조뿐만 아니라 전체 스포츠 분야에서 최고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코마네치는 89년 헝가리로 망명한 뒤 캐나다 몬트리올로 갔다가 미국으로 가 미국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바트 코너와 96년 결혼했다. 망명 전 코마네치는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 부자의 노리개가 되는 수모를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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