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1

2004.04.22

손에는 ‘총’ 가슴엔 ‘反美’

이라크인 파벌 떠나 대결집 … 미군 공격에 민간인 사상 속출·재건 약속도 안 지켜 ‘분노 최고조’

  •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4-04-14 15: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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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최악의 상황입니다. 바그다드의 사드르시티는 미군으로 둘러싸여 진입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인터넷에 문제가 생겨 4일간 외부로 연락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어둠이 깔리는 밤이 되면 도시 전체에 폭음이 울려퍼집니다. 탱크와 헬리콥터가 진주해 이라크인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를 제외한 이라크인 어느 누구도 미군의 주둔을 더 이상 원하지 않습니다.”

    국제 NGO(비정부기구) ‘굿 네이버스’의 이라크인 활동가 자밀씨(45)는 4월9일 요르단 암만에 거주하는 동료에게 현지 상황을 알리기 위한 긴급 이메일을 보냈다. 자밀씨는 5년간 사담 후세인의 핍박을 피해 인근 국가에 머물다가 지난해 NGO를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라크 바그다드로 들어간 인물이다. 그의 글에는 언제 끝날지 모를 미군 폭격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가 담겨 있다.

    바그다드 함락 1주년이 되는 4월9일을 전후해 이라크에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4월2일 바그다드와 카르발라의 시아파 사원에서 연쇄 폭탄 공격으로 180여명이 숨지는 참사가 빚어졌고, 미국 민간 경호회사 요원 4명이 피살된 팔루자 지역에서는 4월4일 이후 미군과 저항세력의 대립으로 12일 현재 적어도 600여명이 숨지고 1700여명이 다쳤다. 시아파와 연합군 간의 분쟁이 이라크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이라크는 사실상 ‘제2차 이라크전’에 돌입했다. 이라크의 최대 종파인 시아파 저항세력이 4월11일 이슬람 최대의 성일(聖日) ‘아르엔비야’를 맞아 3일간의 휴전을 선언하고, 미군 주도 연합군과 팔루자의 수니파 저항세력도 12시간 휴전에 합의해 큰 고비를 넘겼으나, 바그다드와 발라드 등 이라크 곳곳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진행되고 있다.

    시아파 민병대, 교전 일주일 만에 남부 3개 도시 점령

    이라크 위기의 핵심은 이라크인들 사이에 들불처럼 번지는 ‘반미(反美)정서’다. 수니파는 물론이고 미국에 호의적이던 시아파의 과격 무장세력마저 미국에 저항하면서 상황이 악화됐다. 저항의 선봉에 선 인물은 30살의 과격 시아파 지도자 알 사드르. 그는 4월4일 메흐디 민병대를 앞세우고 길거리로 나서 ‘반미투쟁’을 선언한 뒤 교전 일주일 만에 나자프와 쿠트, 쿠파 등 남부 3개 도시를 점령했다. 스페인군 우크라이나군과 차례로 교전을 벌인 뒤 “이라크 주둔군은 이슬람의 적”이라며 성전(聖戰)을 독려하고 나선 데 이어 바그다드의 사드르시티와 이슬람 성지인 카르발라 등으로 교전지역을 확대했다. 1년 전 사담 후세인의 동상이 서 있던 바그다드의 중심가에, 이제는 알 사드르의 얼굴 사진이 걸려 있다.



    카타르의 알 자지라 방송은 4월8일 “수니파와 시아파가 함께 (미군에 대해) 슬픔과 분노를 느낀다”고 보도했다. 사담 후세인 지지세력이었던 수니파와 사담 후세인의 탄압으로 인권을 유린당했던 시아파가 이제는 미군에 대해 한목소리로 저항하고 있는 셈이다.

    수니파인 자비르 핫산씨는 지난해 미군의 바그다드 공습으로 아들과 두 조카를 잃었다. 두 조카는 불에 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고, 아들은 병원에 옮긴 지 하루 만에 숨을 거뒀다. 핫산씨의 슬픔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장례식에 미군의 폭탄이 떨어져 숨진 아들이 누워 있던 관조차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미군의 무차별 포화가 이들의 삶의 터전을 모두 짓밟았다. 그는 지금도 미군의 폭격을 두려워하고, 미군을 증오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시아파인 하이다르 가필씨는 미군의 폭격으로 세 형제를 잃고, 반미주의자로 돌아섰다. 지난해 미군이 바그다드 빈민촌의 시장에 떨어뜨린 폭탄으로 가필씨의 세 형제를 포함해 50명의 이라크인이 숨졌다. 결혼도 포기한 그는 현재 알 사드르의 무장 투쟁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 1년 전만 해도 다른 행보를 걸어온 두 사람은 이제 “미국을 무찌르기 위해선 남은 가족을 희생할 수도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서방 언론 역시 시아파와 수니파의 연대를 앞다퉈 보도했다. AFP통신은 4월8일 “수천명의 수니 및 시아파 무슬림들이 식량과 의약품을 실은 차량 90대와 함께 바그다드에서 60km 떨어진 수니파 도시 팔루자까지 도보행진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이라크인들은 수니와 시아는 한 형제라는 의식을 갖고 시위, 기부 등을 통해 점령군에 저항하고 있다. 이날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지 역시 “바그다드에서는 시아파 사원들이 나서서 팔루자에 보낼 헌혈·자금지원 및 저항을 촉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시아파의 정신적 지도자인 온건성향의 알 시스타니(75)의 추종자들마저 미군에게 반감을 표출하는 실정이다. 알 시스타니는 성명을 통해 미군과 강경 시아파, 양측의 자제를 촉구한 바 있다. 반전운동단체인 이라크평화팀(IPT) 소속으로 바그다드에 머물고 있는 다르 자마일씨는 4월8일 홈페이지 글을 통해 알 시스타니 추종자들과 나눈 대화를 전했다.

    “우리는 미국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넉 달 만에 쿠웨이트를 재건했으나, 우리에겐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죠. 미국은 우리를 사담 후세인으로부터 해방시켜준 것 외에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고 있습니다.”(아부 자하르)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총을 뽑아 들 겁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하게 느끼고 있습니다.”(아부 두하)

    “미군은 해방군 아닌 점령군 … 잇속만 챙겨”

    다르 자마일씨는 온건 시아파인 두 사람이 미군을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여긴다고 묘사했다. 이들에게 미군은 민주주의를 심어준 친구가 아니라, 자기의 이익만 챙기는 불청객이었다.

    이라크인들의 분노에 불을 붙인 것은 바로 ‘미군의 이슬람 사원 폭격’이다. 미국인의 시신이 처참하게 훼손되는 것을 목격한 미국은 4월7일 팔루자 지역의 이슬람 사원을 폭격해 이날만 최소 40여명이 숨졌다. 이라크 주둔 미군 대변인 마크 키밋 준장은 4월7일 CNN과 한 인터뷰에서 “제네바협약에 의해 사원은 보호받지만 군사상 필요할 때는 공격대상이 될 수 있다”며 사원이 저항세력의 근거지나 무기 은닉장소로 사용될 경우 계속 공격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NGO ‘굿 네이버스’의 김상홍 이라크 지부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미군의 공격에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이라크와 요르단 암만을 오가며 이라크 구호활동을 해왔다.

    “이라크인들은 ‘사원 공격’을 이슬람 문화의 근간을 흔들겠다는 미국의 도전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의 사원만은 공격하지 않았죠. 현재 미군과 연합군에 대한 저항이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는 곳은 이라크에서 가장 빈촌으로 꼽히는 사드르, 카드미에, 나자프, 카르발라 지역입니다. 이곳은 사담 후세인의 탄압 정책에 의해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된 지역이죠. 과거 이라크 민중을 탄압해온 것은 사담 후세인이었으나, 현재 이들 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인권을 침해하는 것은 미국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급증한 외국인 대상의 납치사건은 점령군에 대한 이라크인들의 불만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미군과 연합군에 경고함으로써 자주권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출하는 것으로 보인다. 4월11일 이라크 무장단체는 팔루자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지 않으면 납치한 미국 민간인 토머스 해밀씨를 살해하겠다고 협박하는 등 미국인과 외국인을 지속적으로 위협해왔다. 납치된 해밀씨는 알 자지라 방송을 통해 이라크 국기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비춰지기도 했다. 그는 전후 복구 건설에 참여하고 있는 회사 소속으로, 연료 수송작업 중 바그다드와 팔루자 사이의 도로에서 무장괴한에 게 납치됐다.

    순교자 ‘셰이크 아흐마드 야신 여단’이라고 자칭하는 이라크 무장단체도 한국인과 일본인, 미국인 등 외국인 30명을 인질로 잡고 있다며 미군이 이라크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이들을 살해하겠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인질 모습을 공개하지 않아 실제로 인질이 억류돼 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4월7일 요르단에서 바그다드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에서 차를 타고 달리다 무장세력의 총격을 받고 숨진 독일인 2명의 시신이 공개되기도 했다. 당초 4월11일 석방 예정이었던 일본인 인질 3명 역시 석방되지 않아 일본인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한국인도 이러한 상황에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지구촌나눔운동’의 한재광 부장 등 2명이 4월6일 나시리야 지방에서 시아파 민병대에 억류된 것을 비롯해 4월8일 한국인 목사 7명이 라마디 지역에서 이라크 무장세력에게 납치됐다가 풀려났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한국인들이 시아파의 중심지인 라마디, 카르발라, 나자프 등의 지역에서 재건 복구 활동을 벌여와 긍정적 이미지를 쌓아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6월로 예정된 한국군의 파병이 이들의 정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안심하기 어렵다.

    4월10, 11일 연휴를 맞은 이라크는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김규식 KOTRA 바그다드무역 관장은 전운이 감도는 바그다드 풍경을 이렇게 전했다.

    “바그다드에 머무는 이라크인과 외국인들은 외출을 삼가며 알 자지라, 알 아라비아 방송을 통해 급변하는 소식을 접하고 있습니다. 사담 후세인 동상을 무너뜨렸던 중심가, 알사둔 스트리트에는 도로 한복판에 미군이 철조망을 쳐서 차량과 사람의 통행을 막고 있죠. 하루에도 6~8차례 로켓포가 발사돼 폭음이 울려퍼집니다. 공포의 소리가 울려퍼진 지 3~4분이 지나면 어김없이 미군헬기가 저공비행을 합니다. 이라크 저항세력은 4월13일까지 상가를 열지 말고 출근하지 않도록 전단지를 돌리고 있습니다. 학교와 관공서도 모두 문을 닫았지요.”

    이라크에 머무는 외국인은 더욱 안전하지 않다. 외국인의 경우 육로를 통해 암만에 나갈 수 없기 때문에 항공편으로 이동해야 한다. 하루 두차례씩 운항하는 항공편의 경우 예약이 모두 찬 상태라서 4~5일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다. 암만과 바그다드를 왕복하는 45인승 CPA전세기가 있으나 비행기가 중도에 회항하는 일이 잦다.

    요르단 암만에서 바그다드로 통하는 고속도로는 4월4일 팔루자와 라마디 지역에서 벌어진 무장세력과 미 해병대의 교전으로 폐쇄됐고, 물류의 흐름조차 원활하지 않다. 전기는 하루에 12시간 정도 공급될 뿐이고, 유선전화의 상태도 좋지 않다. 미군이 보급한 MCI 전화기조차 제대로 말이 들리지 않는다.

    미국이 지명한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의 위원과 각료들조차 미국의 팔루자 공세를 비난하며 잇따라 사임하는 등 반미대열에 합류했다. 영국의 일간지 더 타임스는 4월10일 누리 바드란 내무장관과 압둘 바시트 투르키 장관이 사임하는 등 과도통치위원회 장관 2명이 연속으로 사임했으며, 가지 알 야웨르 위원 등 4명의 과도통치위원들도 미군이 유혈진압을 중단하지 않을 경우 사임하겠다고 위협한 것으로 전했다. 마지막 보루였던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마저 미국에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 미국은 명분을 찾지 못한 전쟁의 한계를 다시금 절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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