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7

2004.03.25

‘아날로그 기록물’ 보존산업이 뜬다

공공기관 중심으로 종이·사진 등 장기보존 중요성 확산 … 중성지·보관재 등 개발·수입 열기도 후끈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4-03-18 15: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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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날로그 기록물’ 보존산업이 뜬다

    정부기록보존소 직원들이 훼손된 고문서를 복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5일 만인 1950년 6월30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선거위원회 용지 뒷면에 ‘정일권 장군을 육·해·공 3군 총사령관에 임명한다’고 썼다. 전시의 급박한 상황에서 격식을 갖춘 문서를 구하지 못했던 것일까. 떨리는 손으로 빠르게 휘갈겨 쓴 것이 확연히 드러나는 이 약식 ‘임명장’은 대전 정부기록보존소(이하 기록보존소)에 보관돼 있다.

    그러나 5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뒤라 이 기록은 이미 산화작용이 일어나 누렇게 색이 바래져 있다. 기록보존소에서 더 이상의 산화를 방지하기 위한 탈산(deacidification)작업을 거쳐 적정온도(18~22℃)와 적정습도(40~55%)에서 보관하고 있지만 세월의 힘을 이기기가 힘에 부친다. 만약 이대통령이 산성용지가 아닌 중성지에다, 일반 펜이 아닌 보존용 펜으로 썼다면, 그리고 처음부터 이 용지를 보관용 중성상자에 넣어 보관했다면 그 수명은 4배 이상 늘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전국 지자체 기록자료관 설치해야

    중요한 통치 사료는 스캐닝해서 내용물을 디지털 상태로 보관하는 것보다 원본 자체로 보관하는 것이 훨씬 좋다. 그러나 급변하는 정보화시대를 사는 우리는 종이 사진 등 아날로그 기록물의 소중함을 잊고 있다. 정부도 막대한 예산을 들여 기록물을 전자매체 마이크로필름 등으로 전환하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어, 원본에 적힌 과거의 역사가 조금씩 좀이 슬어 우리 곁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기록보존소의 복원 담당자는 “1998년부터 기록물 수복·복원작업을 해오고 있지만 전체 기록물 관리작업 가운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낮아 기반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아날로그 기록물’ 보존산업이 뜬다

    한국전쟁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휘갈겨 쓴 약식 임명장.

    69년부터 정부의 기록문서 관리를 담당한 기록보존소는 98년까지 마이크로필름 촬영작업에 몰두해왔고, 이후에는 디지털 작업에 치중하고 있다. 효과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종이, 마이크로필름 등 이중 매체 이상으로 보존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지만 우선순위에는 밀려나 있었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공공기관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따라 전국 시·군·구 지방자치단체 711개가 기록자료관을 갖춰야 한다. 물론 여기서도 전산관리시스템을 도입해 내부 문서를 전자문서로 변환해 보존하는 작업이 중심이 되지만, 이를 계기로 종이 사진 등 아날로그 기록물 보존산업이 유망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기록물보존 전문업체인 삼흥과학 박인신 과장은 “여러 기관이나 단체에서 오래된 자료들을 제대로 보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문의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며 “기록물 보존시장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전문가들은 문서의 장기 보존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일반 기업, 가족사의 기록인 일기 사진 등을 영구히 보존하려는 일반인들의 관심 등이 더해지면 기록물 보존산업은 수백억~수천억원대 시장으로 확대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김성수 청주대 문헌정보학과 교수(한국기록물관리협회 사무국장)는 “디지털 문화가 발흥하던 초기에는 머지않아 종이 없는 도서관(paperless library)이 등장할 것이라고 예견됐지만 제지산업은 더욱 번창하고 있고, 실제 기록물 관련 기관에서도 종이 기록물이 더 증대되고 있다”며 “기록물 보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고 말했다.

    기록물 보존용품은 중성지, 중성지 상자, 플라스틱 보관재, 마이크로필름 보관재, 보관용 잉크, 프린터 등 1차용품에서부터 이동식 서고, 항균장치, 탈산화장치, 항온·항습장치 등에 이르기까지 무척 다양하다. 펄프를 채워넣는 리프 캐스터(leaf caster)의 경우 5000만원대, 탈산화장치는 수입품의 경우 20억~40억원대에 이를 정도로 고가다.

    ‘아날로그 기록물’ 보존산업이 뜬다

    선진국에서는 기록보존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 일기 사진 등을 보존재료를 사용해 관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시장을 향해 선두 그룹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바이오미스트는 특허받은 천연항균제를 이용한 기록물 및 문화재 소독 장비를 개발해 특허를 획득했으며, 한국보존테크는 지난해 11월 지폐세탁기를 개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삼흥과학 등 일부 업체들은 보관용 상자, 플라스틱 보관재 등을 수입, 공급하는 데 전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국내에는 보존용품에 대한 일정한 기준이 없어 문제가 되고 있다. 장기간 보존하는 기록물에 사용되는 재료·필기구 등의 규격을 정할 수 있는 기록보존소가 ‘보존용품 인증 표시제도’를 추진하고 있지만, 인증시험과 표시 부여 등의 권한을 갖고 있는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과 의견일치를 보지 못해 3년째 ‘의견 조정 중’이다. 전문가들은 “규격이 제대로 만들어져야 국기기관이나 일반인들이 이를 적극 활용하고, 기업은 제품을 납품해 관련 산업을 확대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이런 인식을 하지 못하고 늑장을 부리고 있는 관련 기관들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윤대현 기록보존소 보존과장은 “공무원의 경우 필요한 재료를 조달청을 통해 공급받고 있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며 “민간 수요가 있으면 탄력을 받아 표시제도가 제대로 정착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민간 수요는 아직 미약하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기록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지만 일제시대와 전쟁, 권위주의 정권을 거치면서 문서가 오히려 해가 된다는 인식이 싹터 지금껏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고전적보존협’ 창립 활동 나서

    ‘아날로그 기록물’ 보존산업이 뜬다

    정부기록보존소 보존연구실 내부.항온·항습장치 등을 이용해 문서 보관에 적정환경을 유지하고 있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서고(아래).

    미국 캐나다 유럽 등 외국의 경우 개인들이 일기나 사진첩, 선대의 기록물 등을 적절한 보존용품을 사용해 관리하는 것이 일반화돼 있어 관련 산업도 활발한 편이다. 외국을 자주 다니며 관련 분야를 눈여겨본 오승현 한국보존테크 사장은 “기록물 보존에 대한 관심이 보편적인 외국이 무척 부러웠다”며 보존문화에 대한 관심이 적은 국내 상황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기록물을 관리하는 정부기관이나 도서관, 박물관 등의 관심은 지대하다. 3월8일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등 국내 주요 고전적(古典籍·조선시대 또는 그 이전의 한자 책류) 소장 기관 관계자들은 한국고전적보존협의회(회장 송기중) 창립총회를 열었다. 이들은 열악한 보존시설을 개선하고, 보존업무를 맡고 있는 직원 재교육, 고전적 공동활용을 위한 목록 작성 등의 업무를 추진할 계획이다.

    이귀원 국립중앙도서관 고전운영실 실장은 “그동안 외국으로 반출되거나 전쟁 중에 파괴된 것뿐 아니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유실된 옛 전적은 추정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다”며 “아직도 전국의 도서관과 개인 소장문고에는 500만 점 이상의 옛 서적들이 있지만 대부분 오래지 않아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영구 보존하기 위한 특별한 시설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 수립 이후 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박형규·이하 기념사업회)측도 올해 초 항온·항습장치를 도입하는 등 보존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기념사업회 전명혁 박사는 “어떤 사료는 불과 20~30년 된 것들인데 곰팡이가 슬고 너덜너덜해졌다. 그러나 보존처리과정을 거쳐 중성지 파일박스 등 보존용품에 보관하고 있어 반영구 보존이 가능해졌다”며 “앞으로는 마이크로필름화하는 작업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자료관리에 대한 인식 부족, 책임회피, 관리소홀로 주요 정책 추진 관련 자료 등이 무단으로 파기되거나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가 멸실하는 일이 반복돼왔다. 우리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는 1차 사료의 보존과 관리가 필수적이므로 이에 대한 관리를 좀더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 그런 바탕 아래에서 기록물 보존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인식도 향상될 수 있으며, 기록문화의 부흥도 기대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박지선 용인대 문화재학과 교수(한국기록관리협회 이사)는 “우리는 과거의 기록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메신저이다”라며 “기록 보존은 우리 세대의 의무이므로 원형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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