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8

2003.11.06

5인의 초보 산꾼 ‘깡’으로 ‘꿈’을 이루다

동아일보 기자들 20개월 만에 백두대간 구간 종주 … 길 잃고 다치기 수차례, 고생도 사연도 ‘산더미’

  • 연제호/ 동아일보 편집부 기자 sol@donga.com

    입력2003-10-30 13: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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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인의 초보 산꾼 ‘깡’으로 ‘꿈’을 이루다

    설악산 공룡능선의 운무



    눈 속. 영하 20℃. 살을 에는 칼바람. 눈은 이내 길을 삼켜버렸다. 사위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눈을 이고 있는 나목뿐. 대미산의 설신(雪神)은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혀를 낼름거린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마룻길.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 발을 내딛을 수조차 없다. 쿵! 헛디딘 발에 몸은 지팡이를 꽂아놓은 듯 눈 속에 박혔다.

    “길이 없어. 더 이상 못 가겠어.”

    “나도 죽겠어.”

    “조금만 가면 대미산 정상이 나올 거야. 돌아갈 수도 없어. 이젠 가는 수밖에….”



    서로를 위로하는 목소리엔, 그러나 두려움이 묻어 나왔다. 걷고 걸어도 똑같은 자리. 혹 산을 돌고 도는 링반델룽(ringwandelung)? 순간 아찔하다. 산에 오를 때 7자를 가리키던 손목시계 바늘이 이젠 지친 듯 2자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안 되겠어. 내려가자.”

    “백두대간이고 뭐고….”

    꿀꺽. 말끝이 흐려졌다.

    산행 포기. 우리는 패잔병처럼 길 없는 길을 찾아 산을 내려갔다. 길 잃고 헤맨 지 2시간 뒤였다.

    “집이다!”

    “살았다!”

    체력 일찌감치 바닥 … 급기야 병원행

    5인의 초보 산꾼 ‘깡’으로 ‘꿈’을 이루다

    ‘대간돌이 5총사’ 연제호 홍성돈 최한규 이상훈 이지훈(왼쪽 부터 시계 방향으로).

    안도의 숨을 쉬는 순간 볼엔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린 그렇게 죽음의 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2003년 1월의 겨울. 초보 산꾼들에게 그해 겨울은 너무나도 혹독했다.

    2002년 2월. 세상의 더듬이는 월드컵을 향해 촉수를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동아일보 편집부 기자 5명) ‘주머니 속 송곳’은 이미 백두대간을 넘고 있었다. 직장생활 10년. 쳇바퀴 도는 일상. 새로운 자극, 아니 충전이 필요했다. 첫 출발지 지리산 천왕봉. 출발을 알리는 표식기를 거는 대신 사과 배를 놓고 간단히 대간산신께 신고식을 했다. 그러고는 국토의 등줄기를 향해 첫발을 내딛었다.

    5인의 초보 산꾼 ‘깡’으로 ‘꿈’을 이루다

    설악산 화채봉의 풍광.

    산행은 격주 주말마다 이어졌다. 금요일 오후 근무를 마치고 우리는 배낭을 메고 산으로 향했다. 산행은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 새벽부터 시작했다. 하루 10시간의 산길 강행군. ‘깡다구’ 하나로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한 초보 산꾼 5명에게 백두대간 종주는 ‘엄홍길의 히말라야 14좌’ 등정 이상의 것이었다.

    천왕봉 봉화산 고남산 백운산 영취산…. 목화꽃 같은 하얀 눈이 내릴 때 시작한 산행. 어느덧 산 능선을 넘어 남쪽으로부터 온 바람은 온 산에 붉은 진달래를 피우고 있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땀, 땀, 땀. 타는 목마름. 물도 없는 마루금의 연속. 세상의 무게를 다 진 것 같은 무거운 등짐. 몸은 점점 지쳐갔다. ‘산을 타면 몸이 적응되고 체력도 나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바람은 그저 ‘바람’으로 끝났다. 벼룩의 간만큼도 안 되는 체력을 우린 갉아먹고 있었다. 가장 먼저 이상이 나타난 곳은 무릎. 7시간만 걸으면 무릎이 죽겠다고 안달을 한다. 갈 길은 아직 멀고도 먼데…. 견딜 수 없는 피로감. 산행을 마치고 돌아온 날은 끙끙 앓기도 했다. 회의도 들었다. ‘이러다 종주는 고사하고 무릎이 나가 못 걷게 되는 게 아닐까….’

    끝내 사고는 터지고 말았다. 2002년 4월. 복성이재에서 육십령을 넘는 산행. 도상거리 28km. 그러나 우리들은 ‘종합병동’이었다. 점점 약해지는 체력. 쇠잔해지는 몸. 때 이른 가마솥 더위. 산행구간 반을 지나왔을 때 벌써 ‘10분 걷고 20분 휴식’을 반복하는 상태였다. 해발 900m에서 1200m의 고봉을 낙타등처럼 오르내리는 능선. 해발 601m의 복성이재에서 발길을 내딛은 고바위는 봉화산(919m)-월경산(981m)-중재(600m)-백운산(1278m)-영취산(1075m)을 지나 수많은 암릉을 거친 뒤 깃대봉(1014m)에서 절정을 이루고는 1시간30분 가량을 줄달음쳐야 육십령에 닿는다. 그날 우린 16시간을 걷고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곧이은 덕유산 산행.

    “산에 못 갈 것 같은데….”

    “왜?”

    “병원 갔는데 늑막염이래….”

    대원 중 한 명의 풀죽은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기어나왔다.

    “뭐, 늑막염?”

    “응, 폐결핵성 늑막염이래. 지금 병실 잡았고. 곧 수술 들어갈 것 같아. 최소 2주 입원에 2주 요양이래.너무 무리를 했나봐. 병가를 내야 될 것 같은데….”

    그날 밤.

    주룩주룩 봄비가 퍼부었다. 병실 문을 열었다. 젓가락 같은 몸으로 대원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그는 한 달 이상을 입원했고, 결국 나머지 4명만 산행을 이어갔다.

    주말마다 비 … 그해 여름은 축축했네

    덕유산 대덕산 황악산 속리산 대야산을 지나 이화령으로 가는 길. 소슬바람이 겨울이 다가왔음을 알린다. ‘아마조네스’의 젖가슴처럼 희양산은 명찰 봉암사를 병풍 두르듯 감싸고 있다. 대간의 선답자들은 “희양산은 돌아가라”로 입을 모았다. “도대체 왜?” 의문부호는 이내 느낌표로 바뀌었다. 희양산 지름티재,우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도저히 사람이 올라갈 수 없을 정도의 경사. 그러나 우린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돌격 또 돌격. 80도나 되는 절벽을 반쯤 올랐을까. 바위는 수직으로 이어졌고 밧줄은 끊어져 있었다. 내려가자니 바위가 미끄러워 추락할 위험이 있고 올라가자니 밧줄이 없어 나무뿌리를 잡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엉금엉금 기는 것도 잠깐. 음지엔 얼음까지 터를 잡고 있었다. ‘아, 끝이구나. 이렇게 가는구나.’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마침 맨 뒤에 있던 일행 한 명이 바위를 돌아 육산을 기어올랐다. 손을 자일처럼 연결해 목숨을 연장할 수 있었다. 그날 절벽 위에 쏟은 ‘오줌’이 한 말은 넘으리라.

    5인의 초보 산꾼 ‘깡’으로 ‘꿈’을 이루다

    설악산 단풍과 태백산 숲(오른쪽).

    2003년 여름. 주말마다 내리는 비. 태백산-함백산-두타산-대관령을 지나 오대산을 오르는 구간. 연속 8주째 비가 내렸다. 빗속의 산행은 낭만적이기는커녕 고통이 된 지 오래다. 물속에서도 끄떡없다는 등산화는 30분만 걸으면 흠뻑 젖고 만다. 동해의 푸른 바다와 쪽빛 하늘은 머릿속에서만 존재했다.

    산행에 어찌 고달픔만 있으리. 시계추를 잠시 뒤로 돌려 2003년 4월. 비가 온 뒤의 소백산 풍광은 잊을 수 없다. 흔히들 소백산 하면 철쭉을 떠올린다. 그러나 소백의 철쭉이 아름답다면 소백의 운무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비로봉에서 바라본 끝없이 펼쳐지는 망망대해. 구름이 만든 또 다른 세상은 천국의 모습 그대로이리라. 산이 만든 ‘들꽃공화국’은 또 어떤가. 양강 발원지인 함백산 금대봉에서 들꽃세상을 본 순간, 난 곧바로 ‘함백산공화국’의 신민으로 등록했다.

    한계령서 미시령을 넘는 설악산 구간. 14시간의 사투. 그러나 그곳에서 우린 또 다른 모습을 보았다. 자정을 넘어 시작한 산행. 아무도 없는 산. 홀로 걷는 길. 산꾼을 비춰주는 달빛. 공룡능선서 바라본 구름 속의 용아장성. 그리고 원시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황철봉의 너덜지대. 머릿속에 아로새긴 그 모습은 평생의 비타민이 될 것이다.

    2003년 10월. 마지막 산행. 지리산서 진부령을 잇는 20개월의 대장정 종착역. 미시령을 지나 대간의 마지막 산인 마산으로 향했다.

    “땡~ 땡~ 때~앵.”

    대간의 마지막을 알리는 타종식.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데 우린 무엇을 위해 종을 울렸나. 진부령 표지석에 입을 맞췄을 때도 ‘왜’라는 물음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었다. 누군가 말했다. 산행은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발로 걸으며 느끼는 것이라고. 일행은 산을 오르며 말을 아꼈다. ‘따로 또 같이’하는 산행. 웃고 즐기고 먹고 떠드는 산행을 택했다면 뭉쳐서 다녔으리라. 그러나 우린 침묵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듣기 위해 말을 아꼈다. 같이 가되 따로 가는 산행이었다.

    세상의 길은 돌고 돌아 결국 마음의 길에 닿게 마련이다. 긴긴 백두대간을 걸었건만 결국 그 길의 끝은 마음속으로 와 닿았다. 진리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것이 산행이라고 한다. 또한 산에 오르는 일은 정상이 아니라 ‘높은 삶의 질’을 정복하는 길이라고 한다. 우린 대간을 타면서 그 의미를 얼마나 깨달았을까.

    * 동아일보 편집부 기자 5명의 백두대간 산행기는 ‘아! 백두대간’ (http://donga.com/e-county/mountain/)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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