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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1일 밤 진실 밝혀다오

인민군 총공세 제보 홍윤희씨 … 전쟁史 고쳤지만 ‘이적행위’ 억울한 재판기록은 여전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1950년 9월1일 밤 진실 밝혀다오

1950년 9월1일 밤 진실 밝혀다오

“50년 한을 풀어주오.” 낙동강전투 때 인민군 총공세를 알려주고도 이적행위를 한 혐의로 투옥됐던 홍윤희씨. 홍씨는 각고의 노력 끝에 6·25 전사가 잘못됐다는 것을 밝혀냈다.

서울에서 낙오한 뒤 적군에 몸을 의지했다가 적군이 총공세를 준비한다는 것을 알고 아군 진영으로 도주해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는 곧 아군에 원대복귀했는데, 얼마 후 아군 헌병에게 체포돼 군사법정에서 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구사일생으로 5년형을 살고 난 그는, 인생 황혼기에 그가 알려준 대로 그날 적군의 총공세가 있었음을 알아냈다. 공식 전사(戰史)에는 이 정보를 준 이를 항복한 적군 장교로 기록돼 있으나 이 장교는 포로교환 때 적군으로 돌아간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 장교는 ‘북한군이 총공격한다’는 정보를 제공한 사실이 없다. 그렇다면 적군이 총공격한다는 정보를 알려주고도 간첩으로 몰려 실형을 산 사람의 인생은….

재미동포인 홍윤희씨(73)는 이렇게 기구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의 삶이 왜 이렇게 꼬였을까?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초 20세이던 홍씨는 중사 계급장을 달고 육군본부(이하 육본) 감찰감실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이왕이면 장교로 군생활을 하겠다는 생각에 육사 10기생 모집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육군 중사→의용군→인민군→한밤 귀순

육사 10기생은 최초로 4년간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하기로 한 기수로 ‘생도 1기’로 불렸다. 그런데 당시 육군은 한 달간 군사교육을 한 후 소위로 임관시키는 ‘갑종장교’ 체제도 운영하고 있었다. ‘군대를 아는’ 그는 같은 소위를 다는 데 4년간이나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육사를 자퇴했다. 그리고 갑종장교 시험에 합격했는데, 갑종장교 교육 입소일은 7월3일이었다.



이 와중에 그는 한국전쟁을 맞았다. 이승만 대통령과 육본이 철수한 6월28일, 서울에 있던 그는 새카맣게 밀려오는 인민군을 보고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그가 국군이었다는 것을 아는 누군가가 인민군에게 밀고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7월이 되자 북한은 남쪽으로 진출한 인민군 지원을 위해 ‘의용군’을 뽑는다는 공고를 붙였다. 숨어 지내던 그는 친구들과 상의한 끝에 의용군에 지원했다. 의용군으로 나가면 ‘안전하게’ 남쪽으로 내려갈 수 있고, 틈을 봐서 국군 쪽으로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7월10일 의용군에 입대한 그는 인민군을 따라 남하, 8월17일 경북 군위까지 내려왔다. 이때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1950년 9월1일 밤 진실 밝혀다오

미 육군 전사편찬위를 찾아가 한국전쟁사를 뒤질 때의 홍윤희씨.

이날 북한군은 ‘의용군 해산령’을 내리며 의용대원을 인민군에 편입시켰는데, 그는 인민군 1사단 직할 위생대에 배치돼 보다 전선 가까이 접근하게 되었다. 8월31일 그는 우연히 인민군 군관이 “오늘밤 낙동강 서쪽을 맡은 인민군 1군단이 총공격을 하고, 9월2일에는 대구 북쪽에 포진한 2군단이 총공격한다”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국군에게 이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9월1일 밤 10시 총 한 자루를 들고 무작정 도주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어른거리는 사람에게 “나는 국군이다. 쏘지 마라”고 외쳤다. 그러자 저쪽에서 “누고? 오지 마래이~” 하는 당황한 듯한 경상도 사투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달려가 총을 내팽개치고 “중요한 소식을 알리려고 왔다”며 귀순했다.

홍씨는 곧 달성군청에 있는 육군 정보국으로 호송돼 심문을 받았는데 여기서 그는 인민군이 2일 북쪽에서 총공세를 한다고 알렸다. 정보국 요원은 그가 감찰감실에 근무했던 사실을 확인하고, 감찰감실로 원대복귀시켜 주었다. 그는 이어 대구의 유엔군사령부로 가 인민군의 의도와 상황에 대해 정밀 보고를 했다.

그런데 9월11일, 헌병들이 그를 체포했다. 헌병들은 “무슨 지령을 받고 위장귀순했는가? 네가 말한 날 인민군 총공세는 없었다”며 이른바 통닭고문과 물고문을 가했다. 그리고 9월20일 간첩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그러나 그가 간첩행위를 한 증거를 갖고 있지 못했던 군검찰은 재판과정에서 홍씨가 국군을 향해 사격한 이적행위 혐의가 있다는 쪽으로 공소 내용을 변경했다. 재판장이 이를 인정해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국선 변호사였던 허향 변호사가 “무슨 소리냐”고 이의를 제기했고, 재판장은 ‘무기형’으로 선고를 정정했다.

그 뒤 5년간 형을 살고 1955년 석방된 홍씨는 어렵게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좌익 전과 때문에 번번이 직장에서 쫓겨났다. 1973년 12월 편법으로 여권을 마련해 미국으로 이민 간 그는 영어를 웬만큼 구사하게 되고 미국 생활도 안정을 찾은 뒤인 1990년대 후반 필생의 의문을 푸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가 가장 궁금해했던 점은 당시 헌병이 “그날 인민군의 총공세는 없었다. 너는 아군을 교란하기 위해 내려온 간첩이다”고 말한 대목이었다. 전사를 뒤진 그는 8월31일과 9월2일 인민군이 총공격을 감행했음을 확인했다. 이어 그는 9월1일 미 1기병사단 8기병연대에 항복한 인민군 13사단 19연대의 김성준(金成俊, 영어 표기는 Kim Song Jun) 소좌가 ‘인민군 총공세 정보를 아군에게 제공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김성준의 행적을 추적한 그는 김성준이 전쟁이 끝난 후인 1953년 8월7일 포로교환 때 북한으로 돌아간 사실을 확인했다. 김성준은 반공포로 석방 때 도망치지 않고 남아 있다가 포로교환 때 북한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와 함께 홍씨는 미 국립문서보관소를 뒤져 비밀 해제된 김성준 심문조서도 찾아냈다. 김성준은 이 조서에서 인민군 총공세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홍씨는 이 조서를 들고 한국의 군사(軍史)편찬위원회와 한미연합사의 전사실, 미 육군의 전사편찬위원회 등을 찾아가 “왜 공식기록이 틀렸는가”고 따졌다. 한국과 미국이 인정하는 한국전쟁에 관한 최고의 전사는 미 육군 전사담당관인 로이 애플만(사망)이 쓰고 미국 육군 전사편찬위에서 펴낸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원제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다.

5년 실형후 渡美 … “당시 국군 꼭 만나고 싶어”

1999년 노근리 사건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이 책을 근거로 학살 여부를 조사했을 정도로 이 책은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데, 이 책 50쪽에는 ‘항복한 김성준이 인민군 총공세를 제보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김성준 조서를 검토한 한국과 미국의 전사 기관은 “애플만이 실수를 했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에서 나온 한국전쟁사는 모두 애플만의 책을 인용했기에 김성준이 낙동강 전선에서의 인민군 총공세를 제보한 것으로 잘못 기록하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홍씨는 이후 자신에 관한 기록을 찾아 나섰다. 그는 부산의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불명예제대’로 기록돼 있는 그의 병적 기록과 무기형을 선고한 재판 판결문을 찾아냈다. 그러나 국군으로 넘어온 후 그의 언행을 기록한 심문조서와 재판기록은 찾지 못했다. 관계기관에서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이로써 홍씨의 신원(伸寃) 노력은 한국전쟁사를 고쳐 쓰는 데서 멈춰야만 했다.

홍씨는 “진실을 캐면 캘수록 오히려 가슴속에서는 답답함과 의분이 솟구친다”며 “당시 유엔군은 인민군 총공세 정보를 알려준 사람이 하찮은 의용군 출신이란 점에 실망해 김성준이 정보를 준 것으로 꾸미고 나는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고 말했다.

홍씨는 이어 “9월1일 밤과 2일 새벽 사이 진한 경상도 사투리를 써가며 나를 체포했던 경상도 병사, 나를 심문했던 육본 정보국 요원, 그리고 다시 나를 심문했던 유엔군 요원이 살아 있다면, 꼭 만나 그들로부터 진실을 듣고 싶다”고 덧붙였다.

군사편찬위의 양영조 연구위원은 “홍씨의 노력으로 애플만의 실수를 수정할 수 있게 되었다”며 “그러나 홍씨의 제보로 유엔군이 인민군 총공세를 예측해 막아냈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홍씨가 귀순하기 전인 8월31일부터 낙동강 서부 전선에서 인민군이 공격하고 있었고, 홍씨가 귀순한 9월2일 0시부터는 북부전선에서도 총공세를 펼쳤다. 결국 홍씨는 인민군 총공세와 함께 넘어온 것이므로 그의 제보에 의해 유엔군이 인민군 공세를 예상하고 방책을 마련했다는 부분은 받아들일 수 없다. 당시 유엔군은 적황 파악을 통해 인민군이 총공세를 펼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홍씨가 이적행위를 한 죄로 ‘억울하게’ 실형을 산 부분은 ‘유감스럽지만’ 군사편찬위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홍씨는 한국전쟁사를 수정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자신의 재판 부분을 수정하는 데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홍씨는 과연 이적행위를 한 사람일까?



주간동아 402호 (p44~45)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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