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5

2003.07.31

‘평온 속 긴장’ 민통선 마을의 반세기

정전협정 50주년 맞는 철원 양지리 … 규제 줄고 대남 방송 끊겼어도 지뢰 공포는 여전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사진/ 김형우 기자 free217@donga.com

    입력2003-07-24 10: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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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온 속 긴장’ 민통선 마을의 반세기

    월정리역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대만 관광객들, 양지리는 관광객용 펜션을 짓는 등 ‘철새마을’로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마을 주민 백종한 최근배 안승욱씨(왼쪽부터). 민통선 안에서 30~40년씩 거주한 이들은 “민통선 마을에는 더 이상 규제도, 특혜도 없다”고 말했다. 월정리역 안에 보존되어 있는 폐허가 된 기차(사진 왼쪽부터).

    마을은 조용했다. 아침부터 줄기차게 내리고 있는 비 때문인지도 몰랐다. 강원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철원군청에서 북쪽으로 20여분 차를 달리면 닿는 이 마을은 주민 350여명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길은 깨끗하고 논에 촘촘히 심어진 벼는 빗줄기 속에서 더 푸르러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을 곳곳에 서 있는 초소들이 눈에 띈다. 더 자세히 보면, 한길가나 숲 근처에 빨간색의 역삼각형 표지들이 달려 있는 게 보인다. 가까이 가 표지에 씌어진 글자를 읽어본다. ‘지뢰(MINE)’. 선명한 글씨는 마을의 한가함에 갑자기 쉼표 하나를 찍는다. 여기는 휴전선 바로 밑, 민간인통제선(이하 민통선) 안의 마을이다.

    DMZ 내 총격사건에도 주민들 무덤덤

    양지리로의 출발은 사실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장대비가 줄기차게 내린 데다가 취재 전날인 7월17일, 경기 연천 비무장지대(DMZ) 내에서 아군과 북한군 간의 총격사건이 터졌다. DMZ 내의 총격사건은 2001년 11월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 했다. 18일 새벽에는 동해안을 따라 북한 주민 한 명이 귀순한 일까지 있었다. 양지리를 관할하는 6사단측에 공문을 보내 취재 허가를 받아둔 상태지만, 과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민간인’인 기자 일행이 민통선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공보장교는 “(DMZ 총격사건은) 취재와는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서 외부인이 민통선 안 마을을 아무 제약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전에 신고를 하고 군부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양지리로 향하는 민통선 입구 양지리 통제소에 도착하자 헌병 하나가 취재 차량에 탄다. 민통선 안에 조상의 묘소가 있는 성묘객들이 들어올 때도 이처럼 사병이 탑승한다고 했다. “성묘객들 차량에 승탑하면 일꾼이에요. 벌초하고 나무도 베어야 해요.” 제대가 3개월 남았다는 헌병이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민통선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군인들은 무섭고 어려운 존재이기보다는 ‘마을청년’ 같아 보이는 듯했다.

    통제소를 거쳐 들어간 마을은 꿈같이 조용한 정적 속에 싸여 있다. 사람 하나 찾을 수 없는 길거리를 한참 헤매다 들어간 집은 주민 백종한씨(57)의 집이다. 다른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농사를 짓는 백씨는 겨울이면 양지리를 찾는 수많은 겨울 철새들에게 먹이를 주는 환경운동가이기도 하다. “새들이 몇 만 마리나 양지리로 날아와요. 9월 중순 기러기를 시작으로 10월이면 재두루미, 10월 말이면 독수리가 저수지로 날아오죠. 독수리는 한 600여 마리 되는데, 그놈들 먹성이 대단해서 먹이 마련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백씨의 거실 벽에는 각종 새들의 사진이 빼곡하니 걸려 있다. 새 사진을 찍기 위해 백씨의 집을 찾은 사진가들의 흔적이다.



    ‘평온 속 긴장’ 민통선 마을의 반세기

    철원 노동당사와 양지리 이장인 윤창희씨. 양지리 마을 곳곳에서 눈에 띄는 ‘지뢰’ 표지(왼쪽부터).

    양지리에서도 다른 농촌 마을과 마찬가지로 젊은이들을 찾기 어렵다. 이장인 윤창희씨(47)가 젊은 축에 속한다고 했다. 마을 내에 있는 양지초등학교는 학생수가 줄어 2년 전 폐교하고 말았다. 양지리에 있는 16명의 초등학생들은 스쿨버스를 타고 동송읍에 있는 오덕초등학교에 다닌다.

    양지리 주민들은 전날 총격사건이 벌어진 것 때문에 불안하지 않을까? 구릿빛으로 그을은 그들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정말 비상사태가 일어나면 군부대에서 먼저 행동을 취하겠지요. 군부대가 조용하면 우리도 조용한 겁니다. 군대를 믿지 않고서는 이곳에서 못 살아요.” 한 주민의 말이다. 그러나 다른 주민은 “사람인 이상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다만 익숙해졌을 뿐”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이웃 마을인 정연리에서 잠시 백씨의 집으로놀러 왔다는 최근배씨(57)와 안승욱씨(58)는 모두 철원에서 태어나 자란 이 고장 토박이다. ‘6·25 당시를 어렴풋이 기억한다’는 최씨는 전쟁이 나자 온 식구가 전남 나주까지 피난 갔다가 57년 민통선 안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57년에야 이 지역이 수복되어서 사람이 살 수 있게 됐죠. 그때는 이 일대가 모두 갈대밭이었는데 천막을 치고 살았어요. 경계도 삼엄했죠. 통제소에서 주민 10명이 모여야 출입증을 끊어줬으니까. 밤이면 통행금지가 있는 건 물론이고 군인들이 주민들을 점호까지 했지. 군부대처럼 말이야.”

    박정희 대통령 시절까지만 해도 민통선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간첩이 넘어왔다’며 군인들이 뒷산에 올라가 총격전을 벌이는 일이 예사였고 들에는 실탄과 탄피가 널려 있었다. 논을 개간하려다 지뢰를 밟아 목숨을 잃거나 다리를 잃은 주민도 있다. 들에서 일할라치면 북한군의 대남 방송이 시도 때도 없이 들려왔다. ‘귀가 따가워서 일을 못할 지경이었던’ 이 대남 방송은 6·15 남북공동선언 직전인 4년 전쯤부터 중단되었다. 그 전까지는 체제 선전부터 ‘부대에서 돼지 잡았다’는 내용까지, 가지각색의 대남 방송이 시끄럽게 양지리 들녘을 울렸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도 왜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까? “그때야 전국 어디를 간들 고생 안 했겠어요? 그나마 민통선 안 마을이 살기가 나았어요. 70년대에 농민이 고무신 신고 맥주 마신 곳은 전국에서 여기밖에 없었다고요.” 안승욱씨의 말이다.

    안씨의 말처럼 민통선 안 마을의 삶은 오히려 다른 농촌보다 나은 편이다. 이곳의 1인당 경작 면적은 경상도나 전라도보다도 넓다. 더구나 한여름에도 밤기온이 서늘해 벼가 생육 하기에 좋고 공해까지 없어서 농사짓는 데에는 최적의 조건이다. 이곳에서는 여주나 이천쌀 못지않다는 ‘철원 오대쌀’이 난다. 때문에 ‘민통선 안 주민들은 그랜저 타고 농사지으러 간다’는 소문도 생겨났다. 양지리도 85가구의 거주민들이 107대의 차를 가지고 있다. 양지리 주부들은 차를 몰고 철원에 가서 장을 본다.

    젊은층 줄어 초등학교는 2년 전 폐교

    엄격하던 군부대의 규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을 전후해서 눈에 띄게 사라졌다. 이제 민통선에 남은 규제는 동송읍 등 외부에 거주하면서 민통선 안쪽에서 농사짓는 주민들이 밤 9시까지 민통선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과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빨간 모자’를 써야 한다는 규정 정도다. 그 전에는 반드시 흰 상의와 밀짚모자를 착용하고 일해야 했다고 한다. 비상시에 아군이 민통선 주민들을 구분하기 위한 장치다. 7월27일이 정전협정 50주년 기념일이지만, 양지리에서는 어떤 기념행사도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평온 속 긴장’ 민통선 마을의 반세기

    월정리역 안의 철길. 언덕 너머로 비무장지대(DMZ) 철책이 보인다.

    그러나 양지리에서 완전히 긴장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도 숲 속에서 지뢰가 터지는 바람에 숲을 개간하던 포크레인 기사가 사망한 사건이 터졌다. 주민들은 숲 속이나 산에 올라가는 일이 거의 없다. 아직도 지뢰는 이곳에서 가장 큰 위협이다.

    양지리는 요즘 새로운 변화를 꿈꾸고 있다. 이장 윤창희씨는 “주민들이 힘을 합해 짓기로 한 펜션이 7월 말에 착공에 들어간다. 10월 말이면 첫 손님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군부대의 허가 없이도 민통선 안 마을에 건물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양지리 펜션은 민통선 안에 처음으로 탄생하는 펜션이 될 것이다.

    “겨울마다 양지리 인근 토교저수지에 오는 철새를 보러 오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마을에서 머물 숙소가 마땅치 않았죠. 이제는 통제소에 신고만 하면 손님들이 마을에 머물다 가실 수 있거든요. 겨울에는 탐조 체험, 여름에는 우리 마을에 있는 ‘철원옛쌀작목반’에서 영농 체험을 할 관광객을 위한 펜션입니다.”

    소문난 부촌 … “차 몰고 장보러 가요”

    “관광객들이 민통선 안에서 머무는 일을 불안해하지는 않을까”라는 질문에 윤이장은 손사래를 쳤다. “에이, 무슨 말씀을요. 여기가 오히려 더 안전하지요. 군부대가 24시간 지켜주니 도둑 없지, 잡범 없지, 공해 없어서 깨끗하지, 이런 곳이 어디 있다고요. 통제소가 여기 보초병 아닙니까. 마을사람들이 한길에 트랙터 같은 농기계를 내놔도 절대 없어지지 않는 농촌은 대한민국에서 이곳뿐일 거요.” 윤이장은 “인근 군부대와 의논해서 ‘1일 병영체험’ 같은 프로그램도 개발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윤이장의 말처럼 양지리 인근에는 남한 최북단의 기차역인 월정리역, 한국전쟁 당시 30만명의 인명을 앗아갔다는 백마고지, ‘서태지와 아이들’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것으로 유명한 철원 노동당사, ‘철의 삼각지대’ 등이 자리잡고 있다. 남측 DMZ 바로 밑에 위치한 월정리역에는 휴전선과 북한측 초소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도 설치되었다. 평소 하루 평균 2000~ 3000명, 6월이나 방학 때는 최고 5000~6000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월정리역에는 마침 대만에서 온 관광객들이 가득했다. 대부분 가족 단위 관광객인 이들은 빗속에서 기념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폐허가 된 기차 앞에서 사진을 찍는 중국인 관광객에게 “이곳이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월정리역 전망대에 올라가 망원경을 통해 북한 땅을 바라보았다. ‘숲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일 것’이라는 안내 헌병의 말처럼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무성한 초록 숲뿐이다. 1000년 전에는 궁예의 왕궁이 있었다는 땅, 그러나 이제는 숲과 철책만이 빽빽하다. 아득히 보이는 북한군 초소는 비어 있었다. 그 순간, 숲 속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늘씬한 고라니 한 마리가 무엇에 놀랐는지 껑충거리며 나무 사이로 달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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