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있으나 마나 상표권, 국가 분쟁으로

도용에도 솜방망이 벌금, 특허청·법원 심사 기준 달라 혼돈… 중국엔 상표 브로커 기승

  • 김유림 기자 mupmup@donga.com

    입력2016-08-12 16:5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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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H농협, 신한금융지주, 우리금융지주는 해마다 자회사로부터 적게는 800억 원, 많게는 4000억 원까지 ‘브랜드 사용료’를 받는다. 브랜드 사용료란 회사명에 대한 상표권을 갖고 있는 지주회사가 자회사로부터 해마다 거둬들이는 명칭 값을 말한다. 5월 한진해운은 지주사인 한진칼에 한진해운 소유의 해외 상표권을 742억 원에 양도해 유동자금을 늘렸고, 최근 캐주얼 브랜드 ‘팬콧’은 170억 원을 받고 중국 기업에 상표권을 매각했다. 이름(상표) 하나를 팔고 사는 데 이렇게 많은 돈이 드는 건 그만큼 상표권이 갖는 위력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수무책으로 상표권을 침해당하는 경우가 빈번히 일어나면서 상표권에 대한 회의감을 토로하는 이가 많다. 더욱이 상표권을 둘러싼 소송이 진행 중임에도 후등록 상표권자의 상품이 대형 온라인 유통채널에서 여전히 판매되기도 해 업계의 관심을 모은다.

    2009년 A천연비누를 개발해 판매하던 사업가 K씨는 2015년 9월 특허심판원으로부터 우편으로 ‘상표등록무효심판청구서’를 받았다. 2014년 10월부터 A천연비누와 동일한 상표의 비누를 판매 중이던 B사가 2015년 8월 특허법원에 상표등록무효심판청구소를 제기한 것. 그동안 B사는 3번에 걸쳐 상표를 출원했으나 이미 K씨의 상표가 등록돼 있어 특허청으로부터 거절당하자 급기야 소송을 낸 것이다. B사의 상품 판매를 중지시키고 손해배상을 청구할 계획으로 B사를 방문한 K씨는 그 회사 대표들이 선처를 호소하며 사죄의 뜻으로 매월 광고비와 마케팅 비용을 집행하겠다고 약속하자 손해배상 청구 계획을 접었다. 이후 K씨는 B사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B사가 제기한 소송에도 일절 응하지 않았다.



    상표권 소송 중인데 물건 판매 여전?  

    그사이 특허심판원은 상표법 제73조 제4항(‘3년 이내에 국내에서 정당하게 사용했음을 증명하거나, 사용하지 아니한 데 대한 정당한 이유를 증명하지 않는 한 상표등록의 취소를 면할 수 없다’)에 근거해 K씨의 상표권 취소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이때부터 B사 측 태도가 돌변했다는 게 K씨의 주장. K씨에 따르면 B사는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K씨는 이제라도 상표권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에 상표등록무효심결에 대한 취소항소를 진행했다. 더불어 K씨는 B사에 상표침해통고서를 발송했으며 B사의 비누를 판매하는 대기업 유통사들에게도 상표침해에 따른 판매중지통고서를 보냈으나 이행되지 않자 제조사 및 유통업체를 대상으로 형사 고발을 진행 중이다. 이 사건과 관련해 B사는 “문제가 커지기를 바라지 않기에 어떤 얘기도 하지 않겠다”고 대응한 반면, K씨 측 변리사는 “K씨가 3년 이내 A천연비누를 판매했다는 걸 입증할 만한 증거는 충분하다. K씨가 별도로 민형사소송을 진행하는 만큼 승소하면 손해배상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문제는 상표권 소송을 진행 중인데도 B사가 여전히 A천연비누를 판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B사의 자체 온라인 사이트는 물론, 일부 대형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쉽게 구매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특허청 관계자는 “원 상표권자가 항소해 상표권이 아직 소멸됐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물건을 판매하는 건 명백한 위법”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K씨는 상표권이 살아 있다는 전제하에 상대방에게 가처분신청을 하거나 경고장을 보낸 뒤 상표권 침해에 대한 민형사소송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상표권 침해자에 대한 형사처벌이 매우 낮다는 데 있다. 7년 이하 징역이나 1억 원 이하 벌금형이 내려지지만 상표권 침해자에게 실상 부과되는 벌금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 얘기다. K측 변리사는 “고의성과 판매 정도에 따라 벌금 액수가 달라지긴 하지만 200만~300만 원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여전히 시장에서 ‘짝퉁’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도 이런 솜방망이 처벌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론 K씨가 상표권을 되찾을 경우 B사를 상대로 상표권 도용에 따른 손해배상을 받아낼 수 있지만 그사이 상표권 도용자가 물건을 팔아 얻은 이익 전체에 대한 배상은 아닌 경우가 대다수다.  

    한편 특허청의 부정확한 심사 기준으로 상표권이 침해되는 일도 발생하고 있다. 유사한 상표를 등록해줬다 나중에 특허심판원에 의해 등록무효 결정을 받는 경우인데, 그럼에도 상표가 취소된 자는 특허청을 상대로 그 어떤 손해배상도 물을 수 없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카파(Kappa)’와 유사한 신발 브랜드인 ‘카파(KAPPA)’의 전용사용권 계약자인 F사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이 난 사례를 들 수 있다. 당시 재판부는 “이탈리아 브랜드 카파(Kappa)는 카디건, 모자, 와이셔츠, 우산 등을 지정상품으로 등록한 반면, 국내 브랜드 카파의 지정상품은 신발로 해당 상품이 달랐던 데다 상표등록 심사 당시 카파(Kappa)가 소비자에게 확실하게 인식된 저명한 상표라고 볼 수 없었던 만큼 특허청 판단에 과실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F사는 특허청의 과실로 중복상표로 등록됐다 결국 말소되면서 인수한 제품을 전량 폐기하는 등 손해를 입어야 했다.



    작정하고 한국 상표 선등록하는 중국 브로커들

    이에 대해 박준용 법무법인 율정 변호사는 “상표나 특허 등을 등록하는 특허청의 실무상 심사 기준과 사법적 분쟁 시 법원의 판단 기준이 달라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특허청은 심사 기준에 판례 반영목록 등을 별첨해 해당 경향을 실무에 반영하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특허청 관계자 역시 “특허청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향후 심사관에게 책임이 전적으로 전가된다면 업무 추진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상표법과 특허법에도 이러한 내용이 분명히 명시돼 있다”고 해명했다.

    국내 업체 간 상표권 분쟁도 분쟁이지만, 최근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이 늘면서 중국 내 브로커들에게 상표권을 침해당하는 일도 많아졌다. 악의적으로 수십, 수백 개의 한국 브랜드 상표권을 선(先)등록한 브로커들은 국내 상표권자가 중국에 진출하려고 하면 자국 내 상표권을 침해한다며 거액의 협상금을 요구해 상표권을 양수하도록 강요하는 수법이다. 특히 우리 기업의 주력 수출품목인 화장품, 식품, 프랜차이즈 등에 집중돼 있다. 한류 대표 화장품인 ‘설화수’는 ‘설연수’, LG생활건강 ‘수려한’은 ‘수아한’, ‘네이처리퍼블릭’은 ‘네이처리턴’, SPC그룹의 ‘파리바게뜨’는 ‘바리바게뜨’ 등 중국 현지 소비자가 혼동할 수 있는 유사 상표로 등록됐다. 아예 동일 이름으로 등록돼 있던 ‘굽네치킨’은 중국 진출 사업을 중단할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중국 상표권자에게 돈을 주고 다시 상표권을 사왔다. 똑같이 중국 진출을 꿈꿨던 ‘설빙’은 현재 중국에서 상표권 소송을 진행 중이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중국 시장이 개방되면서 이를 노리는 상표 브로커는 더욱 활개를 치고 있다. 실제로 중국의 상표권 출원 건수는 2008년에 비해 4배 이상 늘었고 한국 기업의 피해는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특허청 관계자는 “상표권은 먼저 등록한 사람에게 우선권이 인정된다. 기업 이미지와 영문 발음 등을 고려해 미리 중국어 브랜드를 만들고 이와 비슷한 브랜드까지 동시 등록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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