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3

2003.07.17

포도송이 툭툭 … 헛힘만 쓰다 “항복”

솎아내기 작업 그리 어려울 줄이야 … 한-칠레 FTA 앞두고 먹구름 낀 農心 실감

  • 충남 천안 = 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

    입력2003-07-09 15:4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포도송이 툭툭 … 헛힘만 쓰다 “항복”
    내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포도를 따서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

    이육사 시인 덕분일까. 한국인의 7월은 청포도와 함께 온다. 일제 말기인 1930년대 말 이육사 시인은 ‘청포도’라는 시를 통해 잃어버린 주권 회복의 염원을 간절하게 그려냈다. 그러나 2003년 대한민국 국회 앞에는 ‘주권 상실 외교’를 규탄하는 성난 포도 재배 농민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국회 비준을 앞두고 있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할 경우 포도농사를 포기해야 하는 농민들이 ‘FTA 결사반대’를 부르짖으며 국회 앞으로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칠레산 포도 값싸고 껍질째 먹을 수 있어

    시인의 말대로 청포도가 탐스럽게 익어가는 7월 초순 어느 날. 칠레와의 FTA 비준을 앞두고 위기감에 휩싸인 포도 농가를 찾아 나섰다. 국내 최대 포도생산지 중 한 곳인 충남 천안시 입장면의 입장농협 조합장실. 명함에까지 포도를 새겨넣고 다니는 민태일 조합장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 옆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포도 재배 농민 박현희씨(40)는 침통한 표정. 두 사람 중 누구도 먼저 말문을 열지 못했다. 포도밭 현장체험을 위해 입장면을 찾은 기자도 덩달아 숙연해졌다. 이날 아침 신문에 노무현 대통령이 박관용 국회의장에게 서한을 보내 한-칠레 FTA를 이번 회기 내에 처리해줄 것을 요청했다는 기사가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7월 정기국회에서 한-칠레 FTA 비준 동의안이 통과되고 나서 현재 일정대로 9월에 양국 정부가 비준서를 교환하고 나면 한 달 뒤인 10월부터는 칠레산 포도가 지금보다 10% 낮은 관세를 적용받고 국내에 들어오게 된다. 당장 내년 4월부터 국내에서 출하될 시설재배 포도는 칠레 포도의 공습 사정권 안에 들게 된다는 이야기다. 현재 45.5%인 칠레산 포도에 대한 관세를 앞으로 10년 동안 10%씩 떨어뜨려 2013년에는 무관세화한다는 게 한-칠레 양국 정부가 FTA를 체결하면서 한 약속이다.



    칠레는 세계 포도 시장에서 24%의 점유율을 자랑하는 포도 수출 강국이다. 따라서 정부도 농민도 칠레와의 FTA 이후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될 작물로 포도를 꼽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물론 지금도 국내에 칠레산 포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연간 6000t 규모로 수입되는 포도 중 90%가 칠레산이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포도의 70%를 차지하는 ‘캠벨’이 검고 진한 색깔을 띠는 데 비해 ‘레드글로브(red globe)’라는 칠레산 포도는 ‘거봉’과 비슷한 옅은 보랏빛을 띠고 껍질이 벗겨지지 않아 ‘껍질째 먹는 포도’로 알려져 있다. 거봉의 풍부하고 시원한 맛과 캠벨의 달콤하고 상큼한 맛에 중독된 기자는 솔직히 박현희씨의 포도밭을 찾을 때까지만 해도 칠레산 포도의 맛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자 동행했던 사진기자가 “술집에서 과일안주 주문하면 나오는 포도가 바로 칠레산 포도”라고 귀띔해주었다. 국내산에 비해 가격이 훨씬 싸다 보니 유흥업소나 대형 뷔페 등에서 어렵지 않게 칠레산 포도를 발견할 수 있다. ‘한-칠레 간 FTA가 발효해서 칠레산 포도가 쏟아져 들어온다고 해도 국내산에 비해 맛이 떨어지는 데다 껍질도 안 벗겨지는 포도를 사 먹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별 생각 없이 위로 삼아 한마디 던졌다.

    포도송이 툭툭 … 헛힘만 쓰다 “항복”

    장마철 방재작업에 필수적인 방재기는 한 대 가격이 1700만원으로 포도 재배 농민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껍질도 안 벗겨지는 포도를 누가 사 먹겠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아이구, 그런 말 마세요. 기자님은 맥주 마실 때 잔에 따라 마십니까, 병째 들고 마십니까?”

    “저야, 아무래도 서로 권해가면서 잔에 따라 마시는 게….”

    “하지만 안 그런 사람이 훨씬 많다는 것 아시죠? 요즘 젊은 사람들 잔에 따라 마시면 촌스럽다고 합니다. 칠레산 포도도 그런 거예요. 수입업자들이 마진 폭만 보고 대량으로 들여와 뿌리게 되면 껍질째 먹는 게 유행할지도 모른다니까요.”

    머쓱해진 기자가 옷을 갈아입고 포도밭으로 뛰어들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니 우왕좌왕할 수밖에. 그러자 안쓰럽다는 듯 박씨가 포도 강의를 시작한다.

    “거봉은 다른 어떤 종보다도 사람 손을 많이 타는 종자예요. 자식같이 보살피지 않으면 제대로 된 상품을 수확하기 힘들죠.”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즐겨 먹는 대표적 종인 캠벨에 비하면 거봉은 4~5배 가량 더 많은 손길을 필요로 한다. 우선 수확을 마치고 나면 동해(凍害)를 방지하기 위해 줄기와 가지를 한데 엮어서 땅에 묻어야 하고 봄이 되면 겨우내 묻어둔 가지를 파내 다시 일일이 제자리를 잡을 수 있게 붙들어 매줘야 한다. 특히 포도덩굴에 꽃이 피기 시작할 무렵인 5월에 날씨가 조금이라도 이상할라치면 포도농가에는 초비상이 걸린다. 자칫하면 화진(花振)현상이 발생해 알이 군데군데 떨어져버리는 일이 비일비재기 때문이다. 흔히 ‘꽃떨이’라고 하는 화진현상을 겪게 되면 상품화할 수 있는 포도를 몇 송이도 건지기 어렵다. 장마와 여름을 얼추 넘겼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포도에 예쁘게 색이 들 때쯤 조금만 관리를 게을리 하면 빽빽이 열린 포도송이가 착색되면서 팽창해 터져버리는 열과(裂果)현상이 생길 수 있기 때문.

    열과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포도송이를 중간 중간 솎아주어야 한다. 기자도 박씨를 따라 이 작업에 나섰지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포도송이 따는 것만 생각하고 덩굴에 매달린 포도송이에서 한 알을 따봤지만 두꺼운 껍질이 손 안에서 툭 하고 터져버린다. 포도송이를 솎아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포도알을 하나하나 터뜨려 포도송이를 망쳐놓고 있는 것이다.

    포도 망가뜨릴까 싶어 단순노동 자원

    거봉 재배는 이처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경험 있는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제대로 된 녀석들을 수확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하우스 시설을 갖추는 데 드는 돈도 캠벨을 재배할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캠벨 재배용 시설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ha당 3000만원 정도. 그러나 거봉 재배용 시설을 갖추는 데 드는 비용은 이보다 5배나 많은 ha당 1억5000만원에 이른다.

    하우스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재배할 때는 장마철 배수관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5~6월을 거치면서 한껏 영글어 검은 빛이 착색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포도에 잘못 손을 댔다가 1년 농사 망쳤다는 말을 듣기보다는 단순노동을 하는 게 낫겠다 싶어 배수로 확보 작업을 하겠다고 장화를 신고 포도밭에 뛰어들었다. 이건 그나마 위험부담이 덜하다. 박씨가 시키는 대로 배수로를 파내고 나니 쪼르륵 하며 주변에 고인 물이 흘러들었다.

    포도송이 툭툭 … 헛힘만 쓰다 “항복”

    시설이 아닌 노지에서 포도를 재배할 때는 하나하나 봉지로 싸주어야만 병충해가 번지지 않는다(왼쪽). 입장면의 특산물인 거봉은 시설투자비가 매우 높다.

    그런데 배수로를 정비하다가 삽질을 멈추고 허리를 펴보니 박씨의 포도밭 주변에만도 비닐을 다 걷어내고 골조만 앙상하게 남은 하우스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보온성도 없고 비 피해를 피할 수도 없는데 왜 저런 것을 만들어놓았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겨 물어봤더니 옆에서 포도송이를 솎아내던 박씨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웃었다.

    “저게 다 돈 잡아먹는 귀신이에요, 귀신. YS(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에 너도나도 정부 돈 받아서 짓기 시작했는데 관리비를 감당하질 못하는 거예요. 결국 이자 부담만 지금까지 떠안고 오지 저건 무용지물이에요. 저것만 봐도 정부 지원이라는 게 얼마나 공허한지 알겠죠? 돈만 주고 나면 끝이에요, 끝!”

    이들 골조만 남은 비닐하우스는 결국 실패한 정부의 포도농가 지원정책의 상징인 셈이다. 정부에서도 이런 사정을 모르지는 않는다. 포도 재배 농민들은 그동안 정부 지원에서 가장 소외된 품목이 바로 포도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또 FTA 발효로 인해 칠레산 포도가 낮은 가격으로 국내 시장에 들어오게 되면 국내 포도 시설재배 농가들은 직격탄을 맞게 된다는 사실을 정부도 뻔히 알고 있다. 농림부에서도 한-칠레 간 FTA가 발효하면 현재 4000호 정도인 국내 포도 시설재배 농가 중 30~40%는 포도농사를 포기할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마련한 FTA 이행특별법에는 포도 시설재배를 포기하는 농가에 한해 3년간 순소득을 보장하는 수준의 보상금을 주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보상금은 300평당 1000만원 정도 될 것이라는 게 농민들의 추산이다. 박씨처럼 2000평 남짓한 시설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포도농사를 짓지 않겠다고 신청한 뒤 대략 7000만원 정도의 보상금을 받고 밭을 갈아엎으면 된다. 사실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그 돈 받고 농사 포기하면 그만이라는 사람도 있어요. 자식농사 다 지은 노인들이니까 그런 말 하는 것도 이해는 되고요. 하지만 아직까지 애들 교육비 댈 일이 까마득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돈 받아서 뭘 하란 말입니까.”

    실제 한-칠레 간 FTA 발효를 앞두고 입장면 에는 이미 포도농사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고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귀농 인구의 비율이 높다 보니 아쉬울 것 없다며 포도밭을 갈아엎거나 헐값에 주변에 넘겨버리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이렇게 포도밭을 떠난 사람들은 레미콘 차량을 몰기도 하고 공사장 막노동 일자리를 알아보기도 한다. 그렇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없고 잡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명색이 체험 취재를 위해 내려온 탓에 기자 입장에서는 포도송이에 봉지라도 하나 더 씌우고 포도알 한 개라도 더 솎아내야 했지만 박씨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며 기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박씨는 화물연대 파업이나 철도 파업을 보며 느낀 것이 많은 듯했다. 나라를 먹여 살리는 트럭 운전기사들이 핸들을 놓아버리거나 철도 기관사들이 기차를 버리고 도망가고 나서야 신문이나 방송이 크게 다뤄준다는 사실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농민들도 철도 기관사나 화물차 운전기사들처럼 파업하는 방법이 있으면 좀 일러달라”며 기자의 팔을 붙잡는 박씨의 목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사실 박씨는 지난 6월 말 ‘한-칠레 간 FTA 반대’를 주장하며 상경해 차량시위를 벌이려는 과정에서 동네 입구에서부터 원천봉쇄에 나선 경찰과 농민들이 충돌하는 바람에 생긴 문제를 수습하느라고 지금도 동분서주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자칫하면 다음달부터 시작될 포도 수확기를 FTA 규탄 시위로 보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마 봉지싸기를 일찌감치 마무리해놓은 덕분에 한 번이라도 더 시위에 참가할 여유가 생긴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따지고 보면 원래부터 농사꾼도 아닌 박현희씨가 포도밭 돌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시위에까지 나서게 된 것도 결국은 6년 전의 ‘귀농’ 때문이다. 김씨는 지난 97년 10년간의 직장생활을 접고 미련 없이 고향으로 향했다.

    “귀농한 걸 지금처럼 후회해본 적이 없어요. 내가 귀농할 때만 해도 주변에서 부러워하는 친구들도 많았는데…. 꿈은 이루어진다고요? 꿈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러나 박씨의 포도밭에서 한나절 함께 일하며 느낀 것은 칠레산 포도가 가격을 무기로 밀고들어온다고 해서 그가 쉽게 포도밭을 갈아엎을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박씨는 ‘이제 포도농가도 고품질로 승부해야 한다’는 정부의 논리를 “공허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도 현재 연간 200~300t에 지나지 않는 국산 포도 수출길이 열린다면 다른 나라와의 FTA 때문에 피해를 볼 수도 있는 산업을 위해 지원금을 내놓을 용의가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남의 나라 일인 줄로만 알았던 세계화의 물결을 헤쳐나가는 박씨 나름의 방법인 셈이다.

    “포도농사 도와준답시고 폐만 끼치고 간다”며 작별인사를 건네는 기자를 박씨가 슬그머니 붙잡더니 이 이야기만큼은 기사에 꼭 써달란다.

    “포도는 원래 포도농장에 와서 직접 먹는 게 제일 맛있습니다. 새벽 4시에 수확해서 서울로 올려보내지만 일반 소비자들은 결국 수확한 지 최소한 3~4일이 지난 포도를 먹게 되는 거예요. 이미 맛이 떨어지고 난 다음이죠. 서울사람들한테 포도농장을 많이 찾으라고 꼭 써주세요.”

    한나절 내내 기자를 붙잡고 정부의 농정 실패를 규탄하던 박씨가 처음으로 씨익 웃어 보였다. 귀농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다고 했지만 박씨는 영락없는 농사꾼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