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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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정책에 ‘통일’이 빠졌다

핵심 키워드는 ‘평화정착’과 ‘공동번영’ … 통일부 “충분한 국민적 합의로 내용 채울 것”

  • 김기영 기자 hades@donga.com

    입력2003-04-24 14: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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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북정책에 ‘통일’이 빠졌다

    노무현 정권 대북정책의 핵심라인인 노대통령과 라종일 국가안보보좌관(왼쪽에서 세 번째). 대북정책과 관련, 두 사람은 원칙론자로 알려져있다.

    노무현 정권의 통일정책이 공개됐다. 이른바 ‘평화번영정책’이라 명명된 새 정부의 대북정책에는 묘하게도 ‘통일 방안’이 빠져 있다. 당사자 간 대화보다 주변국과의 관계를 통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분명하다. 남북한 당사자 간 통일을 강조했던 6·15선언과도 간극이 적지 않다. 통일을 국시로 알았던 국민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현 정권 대북정책의 등장 배경과 노림수는 무엇일까.

    노대통령이 대북정책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직후. 그 무렵 노대통령은 보좌진에게 김대중(DJ) 당시 대통령이 아·태평화재단(이하 아·태재단) 이사장 시절 발간한 연방제 통일방안에 관한 자료집을 구해오게 해 밑줄을 그어가며 탐독했다. 노대통령은 또 당시 DJ의 연방제 통일방안 자료집을 사실상 다듬은 임동원 전 아·태재단 사무총장에 관한 자료도 구해 줄 것을 요구했다. 보좌진은 당시 시사잡지에 나온 임 전 총장 관련 기사를 구해 주었고 노대통령은 이 또한 열심히 탐독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임동원씨는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노대통령은 DJ의 통일방안에 깊이 공감했던 것이다. DJ와는 살아온 길도 다르고 정치경력도 다르지만 사람들은 두 사람이 대북정책에 관한 한 코드가 같다고 평가해왔다. 적어도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 노대통령 스스로 햇볕정책의 계승자임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2003년 4월, 노대통령의 대북정책은 DJ의 그것과 어딘가 달라져 있다. DJ의 대북포용정책이 남북한 당사자 간의 대화와 문제해결에 방점을 찍었다면 현 정권의 평화번영정책은 주변국과의 공동번영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북미 간의 핵 갈등에서 드러나듯 주변국이 한반도 평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한 평화정착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통일’ 국시 사라져 국민들 당혹감

    햇볕정책의 핵심라인이 DJ와 임동원 전 통일외교안보특보였다면 평화번영정책의 핵심라인은 노대통령과 라종일 국가안보보좌관이다. 청와대 주변에서는 DJ-임동원 라인에 비해 중량감이 떨어진다고 평가하지만 노무현-라종일 두 사람 모두 원칙주의자라는 점에서 이들이 이끌 대북정책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나타낼 것으로 내다본다.



    대북송금 의혹에서 드러나듯 노회한 DJ-임동원 라인이 목적을 위해 과정의 투명성을 포기했다면 노무현-라종일 라인은 투명한 관계 형성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노대통령은 햇볕정책이 남북관계의 획기적 발전을 가져왔음에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그 과정이 투명하지 못했고 원칙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며 “현 정권의 대북정책에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은밀한 거래는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노대통령은 최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원칙을 공개했다. 노대통령은 북한이 다자회담을 수용하는 과정에 “특별한 물밑거래는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평화번영정책의 최종 목표는 한반도 평화 증진과 남북한 공동번영 및 동북아 공동번영. 이를 위한 추진 원칙은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 ‘상호 신뢰 우선과 호혜주의’ ‘남북한 당사자 원칙에 기초한 국제협력’ ‘국민과 함께하는 정책’ 네 가지다. 국민과 함께 대북정책을 추진하겠다는 결의에는 햇볕정책이 빚은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남북관계의 모범을 세워보겠다는 노대통령의 비원이 담겨 있는 셈이다.

    하지만 노대통령의 대북정책에 혼란스러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현 정부 대북정책에는 뭔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이념의 좌우를 떠나 대한민국 사람이면 한결같이 공감해온 국시, 통일이 그것이다. 지난 3월 통일부가 공개한 ‘참여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이라는 문건은 ‘평화번영정책’의 목표 및 추진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평화번영정책은 당면과제가 되고 있는 북한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이를 토대로 남북의 실질 협력을 증진하며 군사적 신뢰 구축을 실현함으로써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킬 것이다. (중략) 평화번영정책은 남과 북을 포함하는 한반도의 번영을 실현해 나갈 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지역 이웃 국가들의 공동번영도 함께 추진해 나갈 것이다.’

    한마디로 평화번영정책의 핵심은 ‘평화정착’과 ‘한반도와 주변국의 공동번영’이다. 남북한 ‘통일국가 건설’이라든가 ‘자주통일’ 같은 낯익은 원칙들은 찾아볼 수 없다.

    대북정책에 ‘통일’이 빠졌다

    6·15선언을 이끌어낸 김대중 전 대통령(오른쪽)과 임동원 전 통일외교안보특보. 새 정부는 두 사람의 정책과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먼저 민감하게 이 문제를 지적하고 나섰다. 박원홍 의원은 “대북정책에 번영이라는 경제적 개념이 끼어들면서 통일과 안보의 영역이 희석됐다. 남북통일이 사라지고 평화공존이 상위목표가 된 지 오래다. 여기에 경제가 강조되고 남북이 아닌 동북아로 외연이 확대되었다”며 “이럴 바에야 통일부를 둘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솔직히 말해 그런 지적이 보수진영뿐 아니라 노대통령을 지지하는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제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통일은 노대통령의 평화번영정책의 전제조건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만 않았을 뿐 통일을 지향한다는 것이 대원칙”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같은 해명에도 어딘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통일부가 갖고 있던 대북정책의 입안 조정기능이 현 정부 들어 NSC(국가안전보장회의)로 넘어간 것도 중대한 변화다. 과거 정권에서 통일부 장관은 NSC의 상임위원장을 겸했다. 하지만 현 정권에서는 라종일 국가안보보좌관이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다. 대북정책을 입안, 조정하는 역할을 통일부 장관이 아닌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넘긴 것은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는 평가다.

    이에 대해 NSC측의 한 관계자는 “대북정책에서 남북한뿐 아니라 한반도 주변국가의 이해관계 조절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따라서 남북문제만 전담하는 통일부보다 넓은 시야에서 대북정책을 조율할 필요가 생겼고, 그래서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이 NSC 상임위원장을 맡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 정권 대북정책의 윤곽이 드러나면서 누구보다도 북한이 냉랭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대북송금 사건에 대한 특검의 활동이 시작되고 남한 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면서 북한은 아예 제10차 남북장관급 회담 등 약속했던 남북대화마저 취소하며 대화의 창을 닫아버렸다. 금강산관광, 개성공단사업 등 핵심 경협사업도 중단된 상태다.

    얼마 전까지도 당국자의 발언을 통해 “6·15선언을 지켜가자”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북한은 최근 들어 이마저 중단해버렸다. 북한측의 이런 태도 변화는 특검법이 제정되면서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다.

    그렇다고 2000년 6월 남북 정상이 서명한 6·15선언의 중요성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6·15선언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선언문 1조에 담긴 ‘자주적 해결 원칙’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해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에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선언문 2항에 담긴 ‘연방제 통일 원칙’이다.

    이 두 원칙은 과거 어떤 남북한 공동선언문보다 통일의 원칙과 방법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아왔고 정치권의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런 내용을 담은 6·15선언을 노대통령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구체화하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할 전망이다.

    노대통령은 최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6·15선언은 유효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서 노대통령의 현실인식이 과거와 달라졌음을 읽을 수 있다.

    “공동의 번영을 위해서 서로 함께 노력하고 적대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큰 틀의 합의로서 (6·15선언은) 유효하다. 중요한 계기가 있을 때 정상회담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지금은 북핵 문제가 중요하다. 핵문제는 한국도 중요한 당사자지만 주된 당사자는 아니다.핵과 안전보장의 중심적 당사자는 북한과 미국이다. 남북한 간 정상회담을 한다고 문제가 풀릴 시기가 아니다. 지금은 북미 간 대화가 잘 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북미 간 핵문제가 해결되면 남북한 간 협력과 군사적 대치 상태 해소 문제 등 중요한 일이 있을 테니 그때 (남북)정상이 만나야 하지 않겠나.”

    투명성 제고 지나친 평화번영정책

    노대통령은 당분간 남북한 당사자 간의 교류보다는 한반도 주변국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런 상황판단 때문에 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에는 ‘우리의 소원’인 ‘통일’이 사라지고 대신 단·중기 과제로 한반도 평화와 번영, 중·장기 과제로 동북아 번영과 동북아중심국가 건설이라는 생소한 개념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평화번영정책이라는 대북정책의 큰 틀은 완성됐지만 세세한 내용은 한창 다듬어가는 중이다. 정세현 통일부 장관은 최근 한 모임에서 “4, 5개월 정도 국민과 충분히 의견을 교환하고 8·15 대통령 경축사를 통해 그것을 해설하는 식으로 청사진을 내놓는 것이 도리라고 판단, 준비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장관은 “매달 네 번째 월요일 ‘열린 통일포럼’을 개최해 보수, 진보학자 간 논쟁도 벌일 계획이며 지방에서도 ‘열린 통일포럼’을 열 예정”이라며 “충분한 국민적 합의 과정을 밟아 대북정책의 내용을 채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처럼 ‘돌다리도 두들기고 건너는’ 식의 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햇볕정책 실패에서 비롯된 피해의식의 소산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어떻게 통일방안이 빠진 대북정책이 나올 수 있느냐. 평화번영정책을 살펴보면 ‘국민과 함께하는 정책’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햇볕정책이 투명하지 못해 비판을 받고 있다고 판단해선지 새 정부 대북정책은 지나치게 ‘투명성 제고’에 목매고 있다. ‘초당적 협력’ ‘국민참여 확대’라는 세부원칙들도 그렇다. 대북정책의 성격상 비밀과 보안이 요구되는데 어떻게 모든 것을 국민에게 알리고 야당의 동의를 구하고 할 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청와대 주변에서는 “노대통령 주변 진보학자 가운데는 분단체제의 평화로운 관리에 중점을 두는 통일 불필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평화번영정책에는 이들의 입김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 라종일 보좌관 등 통일정책 핵심 실무진이 통일론자다. 노대통령 주변에 통일 불필요론자가 없지 않지만 주요 포스트에 통일론자들을 배치했다는 점에서 노대통령 역시 통일론자라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튼 ‘통일방안’ 없는 통일정책, 즉 팥 안 든 단팥빵 같은 현 정권의 대북정책은 과연 제 꼴을 갖출 수 있을까. 노대통령은 과연 국민 다수가 동의할 통일방안을 내놓을 수 있을까. 북한 핵문제 해결의 조짐이 보이는 요즘 국민들의 관심이 이에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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