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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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분신 시련은 이제부터”

권력무상 ‘동교동계 해체’ 역사 속으로 … 舊정치 단죄 대상·개혁 압박 ‘가시밭길’ 예고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3-01-09 16: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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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J 분신 시련은   이제부터”

    2003년 1월3일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대화를 하며 웃고 있다

    박지원 대통령비서실장이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동교동’ 해체와 관련한 메시지를 받은 것은 2002년 12월31일. 이날 오전 대통령 전용 별장인 청남대로 내려가 휴식을 취하던 김대통령은 오후 박실장을 불러 이 지시를 내렸다. 그래서일까. 1월1일 청와대 비서실장 공관에서 비서관, 출입기자들과 신년인사를 나누던 박실장은 술을 마셨다. 박실장과 술잔을 주고받은 한 기자는“포커페이스였지만 가슴속 회한이 엿보였다”고 말했다. 이날 박실장은 술을 많이 마셨다. 다음날 그는 청와대 시무식에서 ‘양들의 효행’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계미년은 양의 해이며 양은 효를 상징한다. 양은 무릎을 꿇고 어미의 젖을 빤다. 때문에 은혜를 아는 동물로 여겨지고 있다. 금년은 효와 정의가 화두가 될 것이다.”

    행간에 화두를 숨겨 던지는 박실장 특유의 어법에서, 떠나는 자의 복잡한 심사가 묻어났다. 오전 11시 기자들과 마주앉은 박실장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김대통령의 청남대 메시지를 풀어놓았다.

    “대통령은 과거 동지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며 그들이 잘 되길 바란다. 그러나 동교동계란 말의 사용이나 그런 모임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노무현 시대 ‘낡은 정치’로 낙인 찍혀



    “DJ 분신 시련은   이제부터”

    박지원 대통령비서실장(왼쪽).한화갑 민주당 대표.

    기자회견 중 박실장의 한 측근이 “TV에서 동교동 ‘해체’라고 표현했다”고 하자 즉석에서 “해체라는 말은 안 썼다. 자제라고 표현해달라”며 마지막 여운을 남기려 했다. 그러나 언론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파란만장한 동교동은 이렇게 ‘해체’됐고, 그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동교동계의 해체는 3김정치의 종식에 뒤따른 필연적 수순이다. ‘김대중’이라는 거목 아래서 성장해온 탓에 동교동계는 그에 걸맞은 정치적 신념이나 고유의 색깔을 갖지 못했고 이는 동교동계의 비운을 초래한 결정타가 됐다. 김대통령 두 아들과 아태재단 이수동 이사,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의 구속 등으로 동교동은 스스로 지탱할 도덕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현실은 동교동계와 부패를 동의어로 쓸 정도다.

    동교동계의 퇴조현상은 지난해 당내 쇄신파의 정풍(整風)운동에서 이미 표출됐다. 권 전 고문과 한화갑 대표계가 감정대립 끝에 신·구파로 갈라서 급격하게 사분오열됐고, 당총재직을 떠난 김대통령은 이들을 바라만 봐야 하는 극도의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다. 이인제 의원을 통해 차기 정권 창출을 노렸던 구파는 2002년 4월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노무현 당선자가 승리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DJ 분신 시련은   이제부터”

    ▲1987년 6월25일 가택연금 조치가 해제되자 김대중 당시 민추협 의장이 몰려든 당원, 시민들에게 즉석연설을 하고 있다.<br>▶ 1987년 6월 동교동 자택에 연금돼 있던 김대중 대통령 내외가 집 주변을 지나가는 시민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당시 비서였던 김옥두의원(왼쪽)과 남궁진 전 문화관광부 장관(오른쪽)의 모습도 보인다.<br>▼ 1998년 2월25일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장에 나란히 앉은 홍일, 홍업, 홍걸 형제(왼쪽부터).

    노무현 시대가 펼쳐지면서 동교동은 다시 한번 낡은 정치로 낙인 찍혔다. 정치질서 재편 드라이브에 커다란 걸림돌로 등장, 개혁파들로부터 2선 퇴진 요구를 받았다. 그 와중에 동교동의 반격프로그램도 있었다. ‘주군’이었던 김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그 가운데 하나였다. 정치적 중재를 요청한 동교동계의 긴급 파발이 비밀리에 청와대 담장을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동교동계를 보살필 힘도, 의지도 없었다.

    오히려 청와대는 “결자해지(結者解之) 차원에서 동교동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마지막 역할”이란 개혁파의 반대 주장에 더 큰 부담을 느낀 듯하다. 동교동계 해체라는 김대통령의 결단 이면에는 ‘DJ-노’ 라인의 입장 조율 흔적이 엿보인다.

    민주당 개혁파와의 알력과 갈등이 정점을 향해 치닫던 2002년 12월23일, 노무현 당선자와 김대통령이 청와대 회동을 가졌다. 노당선자의 한 측근은 “이 자리에서 김대통령의 향후 역할과 동교동계 처리 문제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비서진을 물리친 독대 자리에서 김대통령은 동교동계 인사들과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 인사들의 대선 행보에 대해 “시시비비를 따지기보다 모두가 힘을 합쳐 정권 재창출의 의미를 되살릴 때”라는 입장을 전달했다는 후문이다.

    동교동계는 퇴임 후 안전판이 불투명한 김대통령이 비상시 기댈 수 있는 우군이다. 이런 동교동계를 무장해제한 김대통령의 결단은 노당선자에 대한 배려로 볼 수 있다. 노당선자가 새로운 정치질서를 구축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준 셈이다. 동교동계 K씨는 “죽어야 산다는 사즉생(死卽生)이 아니겠느냐”고 해석한다.

    盧당선자 배려 DJ의 최후의 결단

    동교동계를 해체시킨 김대통령은 “퇴임 후 평범한 전직 대통령으로 돌아가 세계가 평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협력하는 일에 전념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에 개입하는 일은 없지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전직 대통령으로 세계평화와 한반도 평화의 전도사역을 맡겠다는 의지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이미 김대통령의 해외강연과 면담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동교동계의 어른이 아닌 나라의 어른이자 원로로 자리매김하고 싶다는 김대통령의 포부에 대해 노당선자측도 고개를 끄덕인다. 노당선자의 한 측근은 “우리도 이제 퇴임한 대통령이 평범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정치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노당선자는 동교동계 해체 발언을 전후해 인적청산 반대 입장을 개진하며 화답했다.

    무한대결 국면으로 치닫던 민주당 내 신·구세력 간의 파워게임은 자연스럽게 소멸했지만 동교동계가 가야 할 가시밭길은 아직 멀기만 하다. “이렇게 밀려나는구나”라는 자괴감과 ‘김대중’이라는 우산 없이 2004년 총선을 치러야 하는 부담도 떨치기 어렵지만 더 큰 문제는 시시각각으로 죄어오는 개혁세력의 압박이다.

    “법적·정치적 책임 사면 아니다”

    민주당 개혁파 인사들은 “김대통령의 해체선언이 정치적 행위에 대한 면죄부는 아니다”고 말한다. 인수위 한 인사는 “동교동계 해체선언이 법적·정치적 책임을 질 일에 대한 사면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인수위는 비리척결위원회를 구성, 구정치에 대한 단죄를 예고하고 있다. 노당선자 주변에서 김대통령과 측근, 가신에 대해 차별화 전략이 가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야당인 한나라당도 이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공적자금은 물론 현대상선 대북지원금 등에 대한 국정조사를 요청하며 구여권 실세들을 겨냥하고 있다. 민주당 내 개혁세력들은 신·구주류가 모두 참여한 당 개혁특위로 인해 당 개혁이 환골탈태가 아니라 신장개업에 그칠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개혁파 의원들은 이 같은 위기감을 반영하듯 1월6일 강도 높은 개혁을 촉구하는 모임을 가졌다. 1998년 연초, 정권을 잡은 동교동계 인사들도 비슷한 모임을 가진 적이 있다. 그때 그들에게는 정권 창출에 대한 자부심과 도덕적 우월성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권력도, 도덕성도 모두 잃었다. 5년의 시차가 동교동계에 던진 메시지는 권력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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