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4

2002.12.19

촛불로 타오른‘반미’ 들불로 번지다

중고생까지 대거 참여한 ‘반미시위’ 전국 확산 … 온라인 게시판에도 ‘반미 글’ 도배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2-12-11 13: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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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로 타오른‘반미’  들불로 번지다

    한국-포르투갈전이 열린 6월14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네거리(왼쪽). 12월7일 열린 광화문 촛불시위.

    1982년 3월18일 오후 2시 무렵, 20대 초반의 여성 두 명이 부산 대청동 부산 미국문화원 출입구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잠시 후 또 다른 20대 초반의 여성 두 명이 각각 양손에 휘발유가 가득 담긴 물통을 들고 문화원 정문 앞으로 다가갔다. 곧 이어 휘발유통을 든 여성들은 문화원 실내의 복도 바닥에 휘발유를 쏟아붓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미문화원에 불길이 치솟은 직후 문화원 건물에 인접한 유나백화점 6층에선 유인물이 뿌려졌다. 이 유인물에는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한국에서 물러가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었다.

    당시 언론들은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관련해 ‘한미 관계를 이간하려는 망상’ ‘반공과 친미는 헌법 이상의 국민적 합의’라고 일갈했다. 이런 보도는 이 사건을 보는 당시의 ‘일반’ 여론과 거의 일치한 것으로 보인다. 미문화원 안에서 목숨을 잃은 한국 대학생들에 대한 애도가 이어졌고, 마침내 미문화원 방화 현장에 있던 범인들이 검거됐다. 검거 후 현장검증 장면을 구경하러 몰려온 2000여명의 시민들은 범인들이 물통을 들고 문화원 앞 큰길가에 나타나는 순간 ‘저놈들을 죽여라’고 고함을 질렀고, 곳곳에서 ‘저런 죽일 놈들’ 하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오노 사건·악의 축 등 쌓였던 분노 폭발

    그로부터 20년여가 흐른 2002년 12월5일 오후 6시. 서울 광화문 앞을 달리던 택시 안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흘러나온다. “왜 이렇게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지, 미국 이야기라면 이제 신물이 납니다.” 월남 파병용사 출신의 택시운전사 김모씨(54)는 승객 중 한 명이 주한미군 궤도차량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미군 문제가 어제오늘 이야기냐”면서 버럭 화부터 냈다. 김씨는 “사람을 죽여놓고 무죄라고 헛소리를 하는 미국보다, 이를 두둔하고 미국의 눈치를 보는 정부가 더 나쁘다”고 핏대를 올린다. 승객들도 모두 동조하는 분위기. 택시에 합승한 또 다른 승객은 “사과를 하려면 직접 나와서 해야지 대사를 통해 유감이라고 한마디 던지는 게 무슨 사과냐”며 “반미 감정에 불을 끄려는 미국의 꼼수일 뿐”이라고 운전기사의 말을 받았다.

    반미 감정이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며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주한미군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과 가해 미군에 대한 무죄 평결은 일반 시민뿐만 아니라 미국에 우호적이었던 세력들조차 미국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국내 미국 관련 시설에 대한 화염병 세례와 시위대 진압 과정에서의 몸싸움 등 일련의 모습은 언뜻, 역사의 시계 추를 20년 전으로 되돌려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2002년 12월의 반미는 80년대 학생운동권과 재야단체가 주도하던 반미 운동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반미’라는 말을 입에 올리고 유인물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철창 신세를 져야 했던 시대와 수만명이 촛불시위에, 수백만명이 사이버 시위에 동참하는 양상을 어떻게 역사의 반복으로 치부하고 말 것인가.

    고려대 사회학과 박길성 교수는 “80년대의 반미운동이 사변적이고 논리적인 일부 민주화세력에 의해 주도된 제한적 운동이었다면 2002년의 반미운동은 시민의 ‘감성적 분노’를 동력으로 하고 있다. 오노 사건, 악의 축 발언 등 구체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한 감성적, 정서적 시민 연대는 엄청난 파괴력과 폭발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촛불로 타오른‘반미’  들불로 번지다

    촛불시위에 참여한 여중생들이 만들어온 피켓.

    반미 시위는 주말을 맞아 미군 장갑차에 의해 희생된 여중생들을 추모하는 집회가 전국 30여곳에서 열린 12월7일 절정을 이뤘다. ‘미군 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 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는 7일 오후 서울 종묘공원을 비롯해 대구 부산 광주 등 전국 곳곳에서 집회를 개최했다. 이날 저녁 광화문 네거리에만 1만여명, 전국적으로는 5만여명의 시민이 모여들었다. 대책위는 집회를 마친 후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2일 발족한 ‘사이버 여중생 범국민대책위’ 소속 네티즌 등과 함께 8일째 촛불시위를 이어갔다.

    월드컵의 ‘성지’였던 광화문 네거리는 어느덧 반미의 무대가 되어 있었다. 7일 오후 종묘공원 집회에서도 시위대가 가장 많이 외친 구호는 ‘가자! 광화문으로!”였다. 이들은 ‘광화문’을 목놓아 외쳤다. 6월 우리에게 광화문은 거대한 용광로의 중심이었다. 꼭 15년 전 그날, 넥타이 부대와 학생들이 ‘직선 쟁취’ ‘호헌 철폐’를 외치며 6월 항쟁을 시작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보다 조금 더 전인 80년에는 계엄이라는 서슬 퍼런 상황에서도 ‘독재 타도’의 구호가 넘치던 거리였다. 바로 그 자리에서 ‘대~한민국’과 ‘오~ 필승 코리아’가 넘쳐흘렀다. 해일처럼, 광화문과 시청에서 시작된 ‘필승의 염원’은 온 나라를 덮어갔다.

    네티즌 입 통해 촛불시위 촉발

    바로 그 자리에서 벌어진 촛불시위는 거대한 ‘번개’(인터넷을 통한 즉석 모임)였다. 촛불시위는 30일 모 일간지 게시판에 한 네티즌이 “광화문을 촛불로 태웁시다”라는 글을 올리면서 촉발됐다. 수많은 네티즌들의 입과 손을 통해 대형 포털사이트 등 각종 게시판에 시위 소식이 빠르게 전해졌고, 네티즌들의 의견이 보태져 시위 일시와 행동요령이 전파됐다. 촛불집회를 맨 처음 제안한 김기보씨(30)가 “나는 세 군데 사이트에만 글을 올렸는데 나머진 누가 올렸느냐”고 묻자 여학생들이 “우리요”라고 크게 외쳤다.

    사실 2002년의 반미, 그 핵심에는 재야단체도, 대학생도 아닌 중고등학생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토록 많은 수의 중고생들이 시위에 참여한 것은 4·19 이후 처음 있는 일. 반미운동의 ‘선봉장’ 역할을 하며 시위 장소, 일정 등을 정하고 배포하는 역할을 하는 인터넷 사이트도 시민단체의 것이 아닌 여중생들이 만든 사이트(www.antimigun.org)다.

    역사학자 최상천씨(전 효성가톨릭대 교수)는 “반미 시위가 여중생들로부터 촉발되고 어린 학생들이 대중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실이다. 이는 좌파적인 이론 따위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반(反)종속적, 자주적인 의식이 남달리 강한 ‘신주류’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복종, 순종, 차별 속에 자라온 구세대와 달리 자유, 평등, 독립, 민주적인 인간관계를 당당히 요구하며 커온 신주류의 등장이 월드컵의 열기와 반미운동의 확산을 이끌어냈다”는 게 최씨의 설명.

    12월7일 광화문 촛불시위에 참여한 심미선양의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뭐라 할 말이 없다. 딸의 죽음을 본 부모가 어떻게 표현하겠느냐”며 분루를 삼켰다. 신효순양의 어머니도 “온 국민의 참여에 감사드린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가수 이정현씨와 민주당 김근태 의원도 눈에 띄었다. 김근태 의원은 “네티즌이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한 것이라 더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대통령후보로는 유일하게 참석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우리는 이미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면서 소파(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을 촉구했다. 권후보가 연단에 오르자 곳곳에서 “정치인은 빠져라” “정당연설회가 아니다”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광화문 촛불시위를 주도한 수천명 ‘꼬마’ 학생들의 분노는 그야말로 ‘폭발’ 일보 직전. 하지만 ‘감성적 분노’ 그 자체에 머무르진 않았다. 아침이슬을 목놓아 합창하던 김지희양(16·고1)은 3일째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면서 시위용으로 들고 나온 굵은 초와 호각을 내보였다.

    “미국이 정말 싫어요. 올림픽에서 금메달도 빼앗아 가고, 중학생을 죽이고도 발뺌만 하잖아요. 미군들에 대한 유죄판결이 나올 때까지 매일 나올 거예요.”

    “한국전쟁 때는 우리를 도와줬잖아요. 또 미군이 철수하면 당장 안보문제가 걱정되지 않나요?”(기자)

    “미군 철수 그런 건 잘 몰라요. 다만 미국이 하고 있는 짓을 용서할 수 없어요. 돈하고 석유 때문에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그런 나라가 좋은 나라인가요, 기자 아저씨? 죽은 여중생이 처참하게 탱크에 깔려 쓰러져 있는 사진 보셨어요? 학교에서 반미문제로 토론 수업을 한 적이 있었는데 미국 편을 드는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촛불로 타오른‘반미’  들불로 번지다

    중고생들이 시위에 대거 참여한 것은 4·19 이후 처음 있는 일. 최근 반미 시위 중심에는 중고생들이 자리잡고 있다.

    “무죄 평결은 미국의 법체계와 한국의 법 감정이 달라서 그렇게 된 거라는 지적도 있는데….”(기자)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어떻게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은 없을 수가 있어요. 장갑차라도 구속시키라 그래요.”

    대화를 듣고 있던 박희진양(16·고1)이 체계적인 논리로 김양을 거들고 나섰다.

    “배심원들이 모두 미국인이었는데 공정한 재판이 가능했겠어요. 한국과 미국이 맺은 소파는 미군 주둔국의 권한을 대폭 강화한 일본 미국간 협정에도 크게 못 미쳐요. 한미 소파는 한국 사법체계에 대한 미국의 무시와 불신이 그대로 반영돼 있습니다. 재판권 논쟁이 생길 경우 자동적으로 미군에 재판권이 넘어가는 예외 규정까지 있어요. 소파는 반드시 개정돼야 합니다. 우리 법체계가 범인도 가려내지 못하는 미 군사법원보다 형편없습니까?”

    “…….”(기자)

    대미 저자세인 한국 정부에도 비난 화살

    ‘퍽킹USA’를 따라 부르며 반미 구호를 외치던 주부 우영진씨(28·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는 “대학 때도 미국을 싫어하거나 반미 시위에 참여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11월27일 오후 우씨는 인터넷 메신저를 통해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날 인터넷에선 하루 종일 하얀 리본(▷◁) 이 휘날렸다. 두 명의 여중생을 애도하고, 미국측에 항의의 표시로 매신저 대화명 앞에 ‘▷◁’을 입력한 것이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이 사이버 시위는 점심시간 이후 메신저를 사용하는 거의 모든 네티즌들이 참여하는 대형 시위로 발전했다. 처음엔 MSN사용자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다 삽시간에 다음 메신저 버디버디 등으로 번졌다. MSN 사용자가 600만명, 다음이 300만명임을 미뤄보면 적어도 500만명 이상이 사이버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리본을 달지 않은 사용자들에겐 왜 동참하지 않느냐는 독촉 메시지가 전달되기도 했다.

    우씨와 친구들이 나누던 대화도 당연히 반미에 관한 것으로 흘렀다. 여중생 사망사건 관련 홈페이지에 들러 사건 경과를 보고 나선 저절로 반미감정이 생겨났다. 그러던 가운데 우씨와 친구들은 메신저를 통해 네티즌들의 촛불시위 제안을 듣고, 광화문 행사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리본 달기 운동 이후 인터넷을 통한 반미 시위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고 신효순 신미선 양을 추모하는 장갑차 사망사건 전국민대책위(www.antimigun.org) 등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는 연일 미군을 비판하는 글이 폭주하고 있는 상태다.

    여중생 사망사건과 관련, 미국을 항의 방문중인 여중생 사망사건 범대위 집행위원장 김종일씨는 “한국 정부가 미국과의 협상에서 지금처럼 저자세로 일관한다면 반미운동은 반정부투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며 “‘미국이 없어도 더 잘살 수 있다’는 시민의식이 커갈수록 반미운동은 더욱 확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2년 겨울, 한국의 시민들은 반세기 ‘우방(友邦)’ 미국에게 ‘진정한 친구’로 다시 태어날 것을 거듭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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