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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협객의 시대

“고등계 형사 미와 내 손으로 처단”

김두한 육성 증언 … “구마적 제압하고 종로통 장악, 스무살 때 전국 오야붕으로”

  • 정리/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고등계 형사 미와 내 손으로 처단”

“고등계 형사 미와 내 손으로 처단”

1969년 10월부터 1970년 1월까지 김두한이 동아방송 \'노변야화\'에 출연했을 당시의 녹음기록.

SBS 드라마 ‘야인시대’는 요즘 김두한이 종로 일대의 ‘주먹’ 신마적과 한판 끝에 그를 제압하고, 바야흐로 구마적과의 일대 승부를 남겨놓고 있는 1930년대를 그리고 있다. 거지소년에서 종로의 ‘오야붕’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이 시기를 김두한 자신은 어떻게 회고할까.

김두한은 1969년 10월14일부터 1970년 1월26일까지 당시 동아방송 인기 대담프로였던 ‘노변야화’에 출연해, 종로 ‘주먹’에서 시작해 국회의원으로 활약하기까지의 인생역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야인시대’ 작가인 이환경씨도 김두한 회고록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와 함께 당시 프로그램 녹취본을 참고해 드라마를 집필했다고 한다. 60분짜리 테이프로 22개 분량의 방대한 육성자료 중 종로 우미관 뒷골목 생활, 일본 야쿠자와 겨루던 이야기 등 김두한의 소년시절과 청년기를 생생한 육성으로 들어본다. 대담은 당시 동아일보 권오기 논설위원이 했다.

-어떻게 거지생활을 하게 됐습니까?

“여섯 살 때 만주로 가서 아버님을 만나고 일곱 살 되던 이듬해에 돌아왔죠. 아버님은 저를 키워 후계자로 만들려고 했는데 정세가 워낙 험했어요. 한국 사람으로 가장한 일본 앞잡이들이 들어오고 마적이 들끓는 데다 러시아에는 적화 바람이 불고. 너무 위험하니까 씨앗이라고 저 하나밖에 없는데 하는 생각에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내신 거죠. 그런데 제가 여덟 살 때 고아가 됐어요. 아버지가 독립군 총사령관이니까 혹시라도 밀정 노릇을 할까봐 할머니와 어머니를 예비 검속했어요. 그 사이 외삼촌이 집이고 땅이고 다 팔아먹으니까 여덟 살짜리가 하루아침에 거지지. 종로 장차구(지금의 광교) 다리 밑구녕에서 고아로 성장했죠.”

-주위의 도움으로 거지생활을 면하셨다면서요?



“고등계 형사 미와 내 손으로 처단”

1966년 9월22일 국회오물투척사건. 김두한 의원이 오물을 뿌리는 순간이다.

“아버님이 형평사라고 소백정조합 초대회장을 하셨잖아요. 당시 이들은 사대문 밖에서만 살 수 있었는데 아버님이 안동 김씨들한테 돈을 받아 이들에게 수만원씩 줘서 낙원동 인사동에 푸줏간을 내줬어요. 그때 형평사 부회장 하던 원씨라는 노인이 있었는데 지금 종로구청 자리, 바로 건너편에 사동옥이라고 설렁탕집을 했거든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밥 좀 주세요’ 했는데 이 양반이 돈을 받다 말고 저를 가만히 쳐다봐요. 그리곤 버선발로 튀어나오더니 ‘너 두한이 아니냐’ 하더군요. 그래 ‘제가 두한입니다’ 그랬더니 저를 붙들고 흐느껴 우는 거예요. 그 길로 날 끌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 깎이고, 그 사이 양복을 벌써 사오셨어요, 목욕탕에 데리고 가더니 할아버지가 손수 씻겨요. 그렇게 원노인 밑에서 17세까지 성장한 거예요. 노인은 내가 19세 되던 해 돌아가셨지.”

-소학교 2학년까지 다녔는데 왜 원노인이 공부를 시키지 않았나요?

“두 가지 이유가 있죠. 하나는 공부를 많이 하면 조국보다 자기가 편히 살고 싶어져서 친일파가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일사상이 빨리 온다는 것. 제가 김좌진 장군의 일점혈육인데 반일운동을 하면 자칫 혈통이 끊어진다고 공부하지 말고 운동만 하라고 하신 거죠.”

-단순히 힘이 세다는 것만으로 주먹대장이 되는 것은 아닐 텐데요.

“열여덟 살 때부터 사동옥 맞은편 조선극장 옥상에 샌드백을 갖다놓고 뒷발질로 때리는 연습을 했죠. 열여덟 살 때 키는 다 컸죠. 체격은 25관이었지. 샌드백은 내 중량보다 무거운 것을 쳤어요.

요즘 깡패들처럼 무기를 쓰는 게 아니라 순전히 주먹으로 했거든요. 제가 아버님의 좋은 체격을 타고났어요. 다음은 담력이에요, 암만 힘이 세도 겁이 많으면 안 되거든. 간땡이가 강철 같아서 겁이 없어야지. 담력 있고 용맹하고 날래고 그러니까 무적이죠. 싸움을 잘하는 사람한테는 권투고 레슬링이고 당수고 유도고 간에 안 돼요. 내가 한번 나가면 20명, 30명씩 때렸거든.”

“고등계 형사 미와 내 손으로 처단”

재벌의 밀수를 따지기 위해 국회에서 발언권을 달라고 삿대질을 하고 있는 김두한 의원(왼쪽 부터). 정치깡패로 재판정에 섰던 김두한. 1966년 한독당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될 당시의 김두한.

-본격적인 우미관 뒷골목 시절 이야기를 해주시죠.

“구마적과 신마적이 장악하고 있었어요. 구마적의 기운이 얼마나 센지, 자동차 바퀴가 터지면 왼손으로 차를 들고 바른손으로 빵꾸 때우고 턱 놔요. 손가락으로 잣을 구부리고 동전을 구부리고 그랬어요. 그 사람한테 떡 붙잡히면 다룽다룽 매달렸다 죽을 정도였죠. 그때 제가 신진으로 자라고 있었는데, 구마적과 신마적을 잡지 않으면 종로 협객사회에서 ‘오야붕’을 할 수 없다 싶었지만 선배니까 대중 앞에서 때릴 수는 없고 그래서 조선극장 뒤 넓은 터로 불러냈죠. 10시쯤 극장이 파한 뒤에 갔어요. 형님에게 충고를 하겠는데 ‘싸움이라는 것은 자기보다 센 사람을 때려야지, 아침밥도 못 먹고 극장에서 거적때기 깔고 자는 아이들을 꽝꽝 치니 후배도 선배를 존경할 수 없어, 내가 당신을 좀 때려야겠다’ 했지. 휙 뜨면서 두 발로 안면을 내질러버렸는데 내가 25관, 구마적이 30관이니 55관이 부닥치니까 푹 거꾸러질 것 아니오. 일어나는 것을 눈과 코 사이 급소를 쳤거든. 종로통을 장악하고 목포, 전주, 광주 이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휩쓸어 스무 살 때 전국의 ‘오야붕’이 된 거죠.”

-일본 야쿠자와 싸운 이야기도 유명하던데.

“지금 충무로 1가에서 5가까지 그들이 살았죠. 건축토건업, 곡마단, 영화, 흥행, 도박 등을 장악하고 있었어요. 지금 시민극장 건너편에 아사히 비루 회관이 있었죠. 그곳에 정복수 등 조선 출신 권투선수 5명과 술을 먹으러 갔어요. 그 회관에는 모두 일본 여자들만 있었는데 권투선수들이 왔다고 무척 좋아했거든요. 이걸 본 일본 하야시 패들이 아니꼬웠던지 우리 쪽으로 접시를 던졌어요. 저쪽 패들은 단도를 가지고 있거든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만히 앉아 있으라 하고 제가 나섰죠. ‘한번 싸울까’ 했더니 8명이 빙 둘러싸는 거예요. 단도 들고 놈들이 빙 둘러쌀 때 가운데로 척 들어가는 것은 기운이 세서 하는 게 아니에요. 간땡이가 크지 않으면 안 돼요. 그때 푹 찌르면 죽잖아요. 쓱 들어갈 때 벌써 내 바른 발에 한 놈이 떴어요. 다시 빙 돌며 갈기니까 또 한 놈이 떠버렸거든. 6명이 남았잖아요. 한번 연습해보시오. 상대가 칼 들고 날아 들어오는 것을 쓱 비키면서 발로 탁 치면 상대의 몸이 빙 돌아요. 옆으로 빠지는 듯하면서 왼발로 옆구리를 탁 치면 끽하고 쓰러지거든. 6명이 뻗었지. 그때 순사들이 호루라기 불고 막 올라와요. 일본 사람들 깨끗한 면도 있어요. 싸움에 지니까 칼을 앞에 탁 갖다놓고 ‘형님’ 하며 절을 하는 거예요. 일본촌 일대에 종로통의 곰보딱지 긴또깡이 일본여자 50명과 순사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칼 잘 쓰는 8명을 물리쳤다고 소문이 났죠.

그후 일본인들이 하는 도박판에 갔습니다. 내가 중간 오야붕을 만나 한 달에 500원씩 보내줘야겠다고 했죠. ‘싫으면 한판 붙자. 하지만 비겁하게 일본도나 곡괭이 들고 오지 마라. 단도까지는 괜찮다. 남자라면 내가 맨손이면 너도 맨손으로 해야지’ 하면서 장충단에서 아침 6시에 만나기로 했죠.”

-조선과 일본이 한판 싸운 셈이네요.

“전라도 광주 출신 유도 4단 김무옥과 상해 직업권투선수 출신인 문영철 등 6명과 함께 갔어요. 저들이 일본도를 가지고 올지 모르니까 우리는 파이프를 준비했죠. 손잡이에 고무를 감아서 미끄러지지 않게 하고 가죽장갑 끼고, 배에다 호스를 둘러요. 세 겹을 감으면 웬만한 칼로 찔러도 들어가질 않아요. 심장하고 복부만 맞지 않으면 되거든요. 광목 감듯 쭉쭉 감고 신발은 권투선수들 신는 것 같은 것 신었죠. 그냥 신발은 벗겨지니까요. 제 직업이 싸움 아닙니까.”

안개 낀 새벽 장충단에서 하야시 패와 일전을 벌인 김두한은 수십명의 상대를 물리치고 그 후 하야시와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된다. 하야시는 매달 1000원씩 김두한 앞으로 보내주었다.

“설렁탕 한 그릇에 10전, 담배 한 갑 10전 할 때니까 1000원이면 큰 돈이죠. 그 다음에 단성사 조선극장 우미관 같은 데서 100원 50원씩 봉투에 넣어 보내왔는데, 당시 조선총독 월급이 1만원이고 제 수입이 2만7000원 정도 됐단 말이에요. 주먹사회의 무적이 된 거죠.”

“고등계 형사 미와 내 손으로 처단”

3대 민의원이던 1956년 당시 장남 경민의 돌을 맞아 서울 낙원동 집에서 부인 김부미씨와 함께 한 모습.

-종로경찰서 마루오카와의 한판도 유명하던데.

“마루오카는 종로경찰서 유도선생이었죠. 4단인데 일본 천황 앞에서 하는 의전시합에서 내리 4승을 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경찰들이 못살게 구니 어떻게든 마루오카와 한판 붙어야겠는데 방법이 없어요. 일본 경찰 때리면 그대로 몇 년 징역일 테고. 그때 유도선수 출신인 김무옥에게 너 유도복 챙겨 들고 종로경찰서로 가서 마루오카와 시합을 해라 했죠. 무옥이가 마루오카에게 ‘선생님 제가 배우러 왔습니다’ 하고 한 달 동안 기술을 다 배워왔지. 사실 첩자가 된 건데. 무옥이와 사흘 연습하고 우미관 옆 술집으로 갔어요. 마루오카가 광교다리 백영상회 주인과 술을 마시러 왔거든요. 백영상회 주인이 변소에 왔을 때 일부러 따라붙어서 발을 꽉 밟았어다. 왜 밟느냐고 따지기에 길이 좁아서 그런 거지 누가 고의로 했어 하고 번쩍 들어 테이블 위로 던져버렸죠. 일부러 시비를 건 거지. 마루오카에게 나는 조선사람이고 너는 일본 사람이니까 남자답게 싸우자, 팔다리가 꺾이거나 턱이 떨어지고 머리가 쪼개지더라도 서로 고소하지 않는 조건으로 싸우자고 했어요. 경찰들이 새카맣게 모여들어 우리를 둘러싸요. 싸움은 한 방입니다. 두 번은 없어요. 마루오카가 들어올 때 왼쪽으로 쓱 빠져서 바른 발로 정갱이를 냅다 치면서 빠져나갔어요. 제아무리 장사라도 발길로 정강이를 치면 온 신경이 다 죽어요. 마루오카가 ‘아야’ 하면서 옆으로 쓰러질 때 목의 급소를 공격하고 공중으로 붕 날라 등을 확 찍었죠. 나중에 들으니 대학병원으로 실려갔다고 해요. 그 소문이 전국으로 알려지면서 ‘두한이, 두한이’ 하던 사람들이 ‘긴또깡상’이라고 깍듯이 부르게 됐습니다.”

-일본 헌병대와 싸워서 도망다닌 적도 있으시죠.

“해방 6년 전이죠. 황병관이라고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는 레슬링 동양챔피언이 있었어요. 일본에서 인기가 대단했죠. 그 친구가 여름방학 때 고향인 평양으로 가기 전에 서울에서 친구들과 만나 술을 먹으려고 종로3가 술집에 왔어요. 10평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술집인데 그곳에 일본 군인 3명이 술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이 길 쪽으로 다리를 내놓고 앉아 있어서 황병관이 변소 가다 발등을 콱 찍은 거예요. 그냥 미안하다고 했으면 되는데 ‘아, 군인인가’ 했지. ‘뭐, 어째?’ 하면서 대위 1명과 중위 2명이 당장 칼을 뽑아 들었죠. 가만 있으면 한국 학생들 다 죽이겠더라고. 그래서 두 발로 일본 헌병들을 차버렸지. 군인 때리면 즉결재판이에요. 황병관과 함께 그 길로 뚝섬에 있는 절 암자로 도망쳐서 석 달 숨어 지내다 나와보니 부하들은 모두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더군요.”

김두한은 이 사건으로 결국 일본 헌병대에 끌려갔으나 기지 하나로 살아 돌아온다. 고문실에서 그는 일본 대위(수사과장)에게 “조선 사람은 미국 사람이냐, 중국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 천황폐하가 군인에게 칼을 하사할 때 적병의 목을 치라는 것이었지 같은 적자를 죽이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때 내가 헌병들에게 말로 참으라고 했다면 이미 일본 레슬링 선수인 황병관의 목이 잘렸을 것이다. 선생 같으면 이때 어떻게 말렸으면 좋았는지 조언을 해달라”고 해서 풀려난다.

-종로서 고등계 미와 형사와 악연이 있다고 들었는데.

“미와는 종료경찰서 고등계 주임이었는데 사상범만 취급했죠. 독립운동하던 이 치고 그 사람한테 안 걸린 경우가 없어요. 어머니 할머니 계실 때 우리 집에 자주 왔으니까 그 사람이 나를 잘 알거든요. 그 사람이 제게 요시찰을 붙였죠. 8·15가 되자 내 머릿속에 딱 들어오는 게 미와였어요. 총으로 무장하고 미와의 집으로 뛰어갔습니다. 남산 드라마센터 좌측으로 들어가면 세 번째 집이었죠. 갔더니 손주들만 있고 미와가 보이지 않는데 지하실이 수상했죠. 그래 뒤져다 거적을 뒤집어쓴 미와를 발견하고 붙들었죠. 끌고 나와서 남산 약수터로 데리고 가서 죽이고 파묻었습니다. 순국선열에 대한 복수를 제가 했죠. 조금만 늦었어도 보따리 싸서 도망쳤을 거요.”

김두한의 육성 증언 무삭제판은 동아닷컴(http://www.donga.com)을 통해 연재한다.



주간동아 2002.10.17 355호 (p66~68)

정리/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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