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3

2002.09.26

우린 ‘수해현장’으로 간다

연인원 63만여명 꼬리 문 행렬 … 이웃과 함께 사는 사회 새로운 문화 창출

  •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3-05-23 14: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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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수해현장’으로 간다
    ”월드컵 때의 전 국민의 뜨거운 열기를 다시 보는 듯합니다.”9월12일 오전 9시30분경. 강릉시자원봉사센터(033-648-6100)에서 자원봉사자들을 수해현장에 배치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서성윤 소장(44)은 바쁜 와중에도 들뜬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곳엔 무언가 특별한 게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을 뒤로하고 이렇게 몰려들 수 있겠습니까.”

    태풍 루사가 영동지역을 휩쓸고 간 뒤 10대에서 50대까지, ‘나홀로 봉사자’에서부터 직장, 가족, 마을 단위의 ‘단체 봉사자’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센터를 찾았다. 이날 하루만 국민신용정보 45명, 한국철도대 400명, 고려신학대학원 94명, 근로복지공단 서울지역본부 37명 등 3000여명의 봉사자들이 센터를 통해 복구지원에 나섰다.

    8월31일 집중호우 이후 9월13일까지 강릉지역에서만 모두 2만1379명이 봉사활동을 벌였다. 이는 센터를 거치지 않은 민간봉사자들과 군인 공무원 경찰 관변단체 등 관에서 동원한 봉사자들을 뺀 수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일까. 5조5000억원이라는 사상 최대의 재산피해액 때문일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정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13일 센터에서 만난 ‘나홀로 봉사자’ 최광남군(23·경기대 체육학과)은 10일 강릉에 도착해 이틀 동안 강릉지방병무사무소 뒤쪽 산사태 발생 지역의 집 축대를 쌓고, 사흘째인 이날 재배치를 받기 위해 센터를 찾았다고 했다. “13일 저녁까지 봉사활동을 한 다음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그는 붉은악마의 상징이었던 ‘비더레즈(Be the Reds)’ T셔츠를 입고 자원봉사에 필요한 물품을 넣은 배낭을 둘러메고 있었다.

    “서울에서 TV로 수해현장의 참상을 보다가 이대로 구경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월드컵 때 축구 보다가 거리로 뛰쳐나갔던 것처럼요. 그래서 부리나케 배낭을 꾸려 무작정 수해현장을 찾아 나섰습니다. 현장에서 수업까지 빼먹고 온 성균관대생 3명을 만나 함께 봉사활동을 했는데 그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더군요.”

    우린 ‘수해현장’으로 간다
    역시 서울에서 온 S개발 직원 7명은 회사에서 선뜻 보내줄 것 같지 않아 결근까지 하고 달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일행 가운데 조모씨(38)는 “아파본 사람이 아픈 사람 마음을 아는 것 아니냐”면서 “사흘 동안 전기공사를 도울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크고 작은 사고가 잇따랐음에도 봉사현장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10일 오후 원주에서 개인택시를 모는 김남태씨는 복구작업중 화물차량에서 떨어져 뇌사상태에 빠졌다. 이에 앞서 9일 오후 미로면에서 복구작업을 하던 고진석씨는 중장비에 부딪혀 크게 다쳤으며 같은 날 오후 신용석씨는 차에서 떨어져 다리 골절상을 입었다. 이런 소식이 언론을 통해 속속 알려졌지만 자원봉사자들의 수는 갈수록 늘어났다.

    김씨의 딸 옥래씨는 “아버지는 평소 남들이 법 없이도 살 분이라고 했다”면서 “이틀 일하고 하루 쉴 때도 봉사활동에 자주 나섰던 분”이라며 울먹였다. 김씨는 상해보험도 들지 않았던 탓에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는 처지다.

    12일 오후 3시경 강릉시 주문진읍 장덕2리 복사골농원.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에서 온 자원봉사자 16명이 물에 잠겼던 집을 청소하고 축대 쌓기에 한창이었다. 이들의 대표 격인 학곡리 김영준 이장(46)은 “가난한 우리들이지만 자발적으로 뜻을 모아 작은 성금도 준비했다”면서 “와보니 너무 가슴 아픈 사연이 많아 시간 내어 다시 올 생각이다”고 말했다.

    복사골농원 주인 김해성씨는 “전혀 모르는 이들이 찾아와 너무나 열심히 일해주고 가니 몸둘 바를 모르겠다”면서 “다음에는 반드시 내가 신세를 갚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9월 초 아폴로눈병 때문에 휴교하고 내려온 남양주고교 선생님 10여분도 특히 기억에 남는다”면서 “서툰 삽질 몇 번 하고 사진이나 찍고 가는 유명인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분들”이라고 말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들이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 객지로 나갔던 출향민들이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 재경강릉시민회(회장 심재엽)는 9월8일 2000여만원어치 구호물품을 강릉시청에 전달했으며,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출신 재경향우회에서는 12일 2500만원의 성금을 모아 마을에 전달했다.

    구정면 학산2리는 이번 수재로 132가구 중 32채의 가옥이 유실되거나 침수되고, 완전 파손된 집만 해도 13채나 됐다. 4명의 사상자도 발생했다.

    우린 ‘수해현장’으로 간다
    12일 오후 마을을 방문해 복구작업을 도운 출향민 조중근씨(회계사)는 “수재가 전쟁보다 더한 피해를 입힌다는 것을 목격했다”면서 “기름진 옥답이 자갈밭으로 변한 상전벽해의 현장을 보고 정말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주문진읍 장덕2리 출신으로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30대 중반의 회사원은 직장동료 4명과 함께 고향마을을 찾아와 물에 잠겼던 각 가정의 보일러를 무상으로 수리해줬다.

    자원봉사 열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행정자치부 통계만으로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행자부에 따르면 9월13일 현재 수해지역 복구작업에 참여한 주민 회사원 학생 등 자원봉사자는 63만1630여명(연인원). 이는 공무원 7만1934명, 군인 70만9246명, 경찰 5만8038명, 소방 3만4931명 등 관·군봉사자 87만4149명(연인원)보다는 적은 인원이지만 관 주도의 봉사활동이 대부분이던 예전에 비해 분명 달라진 수치다.

    강원도청 지역지원과 관계자는 “강원도만 8만8000여명의 민간 자원봉사자가 복구작업에 참여했다”면서 “민간이 이처럼 대규모로 헌신적 활동을 벌인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이며 자원봉사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는 증거다”라고 말했다.

    이번 수해 봉사활동의 특징은 참가자들의 구성이 다양해지고, 의료 방역 도배 요리 보일러 등 전문기술직의 참여가 과거에 비해 두드러진 점이다.

    우린 ‘수해현장’으로 간다
    물론 여전히 단순노동 참가자들이 대부분이어서 도로 전기 전화 등 기간시설이 복구되고 난 뒤부터 도배 보일러 등의 전문직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줄을 이었지만 다 들어줄 수는 없는 실정이었다. 이 때문에 봉사센터는 필요한 인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자원봉사센터 서소장은 “일부 수해지역 주민들은 군인들이나 전문직을 선호하고 일반인은 받지 않으려 하기도 한다”면서 “수급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애로사항이 있다”고 말했다.

    아쉬운 점은 봉사활동중에 일어나는 사고에 대해 마땅한 보상체계가 없다는 점이다. 정기적으로 봉사에 나서는 사람들은 상해보험 등에 가입하기도 하지만 갑작스레 봉사에 나서는 이들은 이런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따라서 봉사자가 사고를 당했을 때 국가에서 보상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수해현장은 아직도 봉사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사단법인 볼런티어21 이강현 사무총장은 “안전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봉사활동을 위해선 봉사자들 스스로 먼저 봉사관련 민간단체나 행정기관에 문의해서 필요한 정보를 확인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인원 150만5779명(13일 현재)의 헌신적인 봉사활동이 깊은 상처를 입은 수재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한 9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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