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2

2002.07.11

“우리는 그동안 환호할 남자가 없었다”

‘붉은 악녀’ 6월의 꽃으로 핀 이유 … 선수들의 열정·섹시함·극적 승부에 매료

  • < 김현미 기자 > kimzip@donga.com / < 전원경 기자 > winnie@donga.com

    입력2004-10-18 15: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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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그동안 환호할 남자가 없었다”
    ‘월드컵 사상 최초의 승리를 가져다 준 대 폴란드전. 내 생애에 밑그림처럼 깔려 있던 ‘한국적 패배주의’가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미국전 내내 아쉬움과 탄식과 흥분의 용광로 속을 왔다 갔다 하는 나를 보았다. …포르투갈전 때는 식구들이 모두 붉은 티를 입고 전광판이 있는 광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설기현이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후반 2분을 남겨놓고 동점골을 넣었을 때 나는 거의 미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여성신문 683호의 ‘아줌마 일기’에 실린 김혜기씨의 글이다. 이 글에서 김씨는 축구에 열광하는 친구에게 “친척 중에 축구선수 있니?” 하며 냉소했던 자신이 아이들과 붉은색 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외치는 ‘붉은 악마’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재미있게 풀어놓고 있다.

    월드컵은 참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대한민국 국민 6명 중 1명이 참가했다는 장대한 거리응원의 물결도, 처음 목표했던 16강 진출을 넘어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4강 진출의 위업을 이룬 대표선수들의 투혼도 희망의 기억으로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연예인과 다른 순수한 매력”

    “우리는 그동안 환호할 남자가 없었다”
    그러나 또 하나 주목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은 여성들의 열광적인 응원행렬이었다. 애당초 월드컵이 시작될 때만 해도 대다수 여성들은 냉소적이었다. 인터넷 사이트에 ‘축구를 싫어하는 아내들의 모임’이 조직될 정도였다. 그러나 월드컵이 진행되고 우리 대표팀이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서 여성들은 거리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과감하게 태극기를 접어 만든 탱크톱이나 치마를 입고 빨간 뿔이 달린 머리띠를 하거나 붉은 스카프를 두른 ‘붉은 악녀’들은 경기가 있던 날이면 거리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실제로 붉은 악마 회원의 반수 가까이가 여성이라고 하니 ‘여자는 축구와 군대 이야기를 가장 싫어한다’는 고전적인 속설이 무너진 셈이다.



    그동안 축구의 ‘ㅊ’자만 나와도 고개를 저었던 여성들이 과연 어떻게 해서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울고 웃는 열성팬이 되었을까. 디자이너 이진숙씨는 ‘원초적인 섹시함’에 그 이유를 둔다. 고화질의 TV 화면에 생생하게 잡힌 선수들의 역동적인 근육과 땀방울은 탤런트나 가수 등 기존 연예인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부분이라는 것.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젊음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연예인들은 멋지기는 하지만 대중과는 유리된 존재잖아요. 하지만 축구선수들에게서는 섹시하면서도 가식 없는 순수함을 볼 수 있었어요.”

    “우리는 그동안 환호할 남자가 없었다”
    처음에는 월드컵에 냉담했다가 나중에는 회사 동료들과 ‘여관방 잡아놓고’ 열광하면서 축구를 보았다는 페미니즘 저널 ‘이프’의 권혁란씨(단행본 팀장)의 말은 더욱 솔직하다. “남자를 대상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미끈한 몸으로 그라운드를 누비는 모습은 정말 멋있더군요. 우리 선수들 축구만 잘하는 게 아니라 안정환 선수의 반지키스나 히딩크 감독의 연인까지 모든 게 흥미진진한 한 편의 드라마였어요.” 열렬한 축구팬이 된 권씨는 “그동안 우리는 환호할 남자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그라운드를 누비는 축구선수들에게서 ‘순수한 섹시함’을 느꼈다거나,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감의 극치(오르가슴)을 맛보았다는 여성들도 적지 않다. 축구를 남성적인 힘의 상징으로 여기면서 ‘저급한 마초’정도로 취급했던 페미니스트들이 월드컵에 열광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축구가 남자들의 경기이기 때문에 더멋있다는 견해도 있다. 외국인 은행에 근무하는 정혜원씨는 ‘만약 축구가 여자들의 경기였다면 그렇게 재미있다고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전에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축구경기나 축구선수들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죠. 그래서 그 매력도 몰랐던 것 같아요. 승리가 주는 자랑스러움도 있고요. 왜 여자들이 더 열심히 응원했냐고요? 우리나라 여자들은 원래 남자보다 더 솔직하고 적극적이지 않나요?”

    “우리는 그동안 환호할 남자가 없었다”
    재미있게도 남자들은 축구의 경기내용과 승패를 보지만, 여자들은 축구 속에서 드라마와 인생까지도 찾아낸다. 20대 초반의 젊은 선수에게서는 미래에 대한 패기를 발견하는 반면, 황선홍 홍명보 등 노장의 얼굴에서는 하나의 가치에 인생을 건 사람의 결연한 표정을 읽는다. 아슬아슬한 승부차기에서는 모성본능까지도 발휘한다.

    “이탈리아전이 끝나고 황선홍 선수가 히딩크 감독을 포옹하기 직전의 표정 보셨나요? 그야말로 ‘우리는 생사고락을 함께해서 여기까지 왔죠’ 하는 표정. 사랑하는 전우를 껴안는 듯한, 아니 전우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는데 굉장히 감동적이었어요.”(류지선·인터넷 ID Carlene)

    나이와 세대를 막론한 여성들의 적극적인 응원에 대다수 전문가들은 긍정적 시선을 보내고 있다. 현실문화연구 조윤주 편집장은 거리에 나선 과감한 ‘그녀들’을 보면서 통쾌했다고 말한다. “거리응원전이 억눌렸던 감정과 스트레스의 해방구임은 부인하지 않아요. 특히 여자들에게는 일탈의 욕구를 분출할 기회였어요. 혼자서는 엄두도 내기 어려웠던 행위를 여럿이 모인 김에 확 풀어버릴 수 있었죠.”

    “우리는 그동안 환호할 남자가 없었다”
    일부 남성들은 ‘여자들은 축구 규정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응원만 한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여성들의 대답은 당당하기만 하다. ‘그래, 우리는 축구 규정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 축구 할 기회가 있기라도 했냐?’ 연세대 4학년 박유미씨는 농구 배구 등은 수업시간에 맛보기로 접할 수 있었지만 축구나 야구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울 기회조차 없었다고 항변한다. 그는 ‘여성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어떤 운동이든 직접 뛰고 굴러봐야 그 맛을 아는 법이다. 학교측이 여학생들이 정말 원하는 운동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그런 수업을 개설해 주기 바란다”고 했다.

    사실 이번 월드컵에 열광했던 여성들이 지속적으로 축구 애호가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여성들이 환호한 것은 축구보다는 그동안 자신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집단행동의 자유’일 수도 있다. 연세대 황상민 교수(심리학)는 여성들의 열광은 축구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축제를 즐기고 싶은 마음에 가깝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과거 한국 사회에서 일어났던 집단행동은 대부분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한 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정치적 견해가 없는 여성들에게 이 같은 시위행렬에 가담할 기회는 거의 없었죠. 반면 아무런 이념이나 위험이 없는 축제인 월드컵은 여성들이 마음놓고 참여할 수 있는 말 그대로의 ‘카니발’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들이 열광한 대상이 축구든 축제든 간에, 이래저래 월드컵은 ‘붉은 악녀’들에게는 곱절로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집단행동과 축구 두 가지 다 남성들에게는 별반 새로울 것이 없었던 반면(지난 87년 거리에 나섰던 ‘넥타이 부대’를 생각해 보라!), 여성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난생 처음 겪는 일들이니 그 즐거움도 배가될 수밖에 없는 것.

    “우리는 그동안 환호할 남자가 없었다”
    이화여대 조기숙 교수(국제정치학) 역시 억눌려 왔던 발산의 욕구와 공동체 문화에서 그 답을 찾는다. “1차적으로는 발산의 욕구였다고 봐요.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아줌마들을 비롯한 여성들은 나이를 막론하고 젊은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그들과 하나가 되었어요. 새로운 공동체를 수립한 것이죠. 오히려 중년 이상의 남성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어요. 붉은 악마와 여성들이 만들어낸 융통성과 창의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문화가 중년 남성의 엄숙주의에서 젊은 문화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었어요.”

    그러나 이번 거리응원에서 여성들이 특별하게 더 두드러진 것은 아니었다는 시각도 있다. 축구칼럼니스트인 숭실대 장원재 교수(문예창작)는 “남자들이 목소리로 응원했다면 여자들은 도구와 패션, 표정으로 응원했다”고 평했다. 또 조선시대 여성사 연구가인 정지영씨(서강대 강사·한국사)는 “여성들의 옷차림이나 차 위에서 춤추는 모습 등 자극적인 장면만 골라 전달한 언론의 시각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여자들이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여자들도 그렇게 한 것뿐이죠. 여자만 따로 떼어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는 그동안 환호할 남자가 없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월드컵에 대한 열정적 반응에는 남녀의 차이가 거의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치러져 온 월드컵에서는 몇몇 스타플레이어가 빛났던 반면, 유독 이번 한일 월드컵은 스타가 아닌 한국 대표팀 전체가 빛났습니다. 한국 선수들의 선전을 본 대중은 그 속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죠. 특히 답답하고 항상 지기만 했던 과거의 한국 축구와 비교해 보았을 때 희열은 더 커졌습니다. 한국 축구에 대한 자긍심이 곧 나의 자긍심과 연결되면서 성별을 막론하고 초인적 에너지가 폭발한 것이죠.”

    결국 ‘붉은 악녀’들의 열정은 여성만의 힘이라기보다는 ‘월드컵 세대’ 또는 ‘W세대’로 불리는 젊은 세대의 힘과 열정이다. 이 긍정적 에너지가 사상 유례없는 축제의 장을 맞아 마음껏 펼쳐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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