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5

2002.03.14

한국문화재단은 ‘대선 캠프’?

탈당 회견문 작성 때 활용, 한러문제연구소도 최초 확인 … 대권 밀어줄 ‘확실한 돈줄’은 아직 못 잡은 듯

  • <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4-10-19 15: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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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화재단은 ‘대선 캠프’?
    박근혜 의원을 받쳐주는 조직과 자금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그의 한나라당 탈당 선언 이후 정치권 인사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점이다. 대권을 노리는 정치가가 갖춰야 할 요소는 대개 대중적 인기, 조직, 자금 등 세 가지. 박의원의 인지도는 이미 여론조사를 통해 검증받았다. 그러나 나머지는 베일에 싸여 있다. 감춰진 부분이 대선정국의 ‘박근혜 파괴력’을 가늠할 척도가 될 가능성이 많다.

    ‘주간동아’는 ‘박근혜 사단’의 조직과 자금의 실체적 모습을 탐구하기 위해 여러 각도에서 접근을 시도했다. 우선 박의원측 설명부터 들어봤다. 내용은 간단명료했다. 조직이라고는 보좌관 2명, 비서관 1명, 비서 3명으로 구성된 보좌진, 자원봉사 형식으로 박의원을 돕는 정윤회 비서실장, 남덕우 전 총리가 회장을 맡고 그 외 몇 명의 외부 인사가 참여하는 후원 조직이 전부라는 것이다. 박의원 측근은 “의원회관 사무실 외에 대선캠프 같은 별도 사무실은 없다”고 말했다. 현역 의원이나 외부 명망가들과 연대하는 사적 모임도 없다고 한다.

    재산 공개 때 신고된 박의원의 재산은 12억원. 정치자금은 세비와 후원금만으로 충당한다고 했다. 지난 1월 대구후원회에서 모금한 돈은 약 4억원이었다. 선거가 있는 해 국회의원은 6억원까지 모금할 수 있다. 한마디로 박의원은 공식적 루트로 제공되는 조직·자금만으로 정치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2월28일 탈당 기자회견 때 흥미 있는 장면이 포착됐다. 오전 9시30분 기자회견에 앞서 많은 기자들이 의원회관 박근혜 의원실에 모여들었다. 이윽고 박의원이 왔다. 기자회견문은 플로피 디스켓에 담겨 있었다. 보좌진이 급히 PC에 디스켓을 넣어 프린트기로 회견문을 출력하기 시작했다. ‘주간동아’는 회견문의 ‘내용’이 아닌 ‘배포 방식’에 주목했다. 회견문이 플로피 디스켓에 담겨 있다는 점은 회관 내 사무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작성됐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외곽 캠프의 존재 여부와 관련, 주목되는 대목이다.

    한국문화재단은 ‘대선 캠프’?
    기자의 질문 공세에 박의원 보좌진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회견 전날인 2월27일 밤 서울 시내 모 사무실에서 보좌진이 모여 회견문을 만들었다”는 대답이다. “그 모 사무실이라는 곳이 서울 신사동 한국문화재단인가. ‘예, 아니오’로 답해달라”는 질문에 보좌진은 “답하기 곤란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좌진이 편의상 한국문화재단에 들러 일을 볼 때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로써 박의원에겐 탈당과 같은 중요한 정치적 진로를 결정할 사무실이 의원회관 외부에 따로 마련돼 있으며 그곳은 한국문화재단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지금까지 한국문화재단의 존재에 대한 보도는 몇 차례 있었지만 박의원 주변 정치인들이 한국문화재단을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처음 확인된 것.

    박의원이 회장을 맡고 있는 한국문화재단은 리틀엔젤스 공연단을 운영하는 재단과는 같은 이름의 다른 단체다. 1979년 3월 11억원의 자산으로 출발한 이 재단은 국제간 학술·문화 교류 지원을 주목적으로 한다. 처음엔 강남구 논현동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으나 최근 신사동으로 옮겼다. 박의원의 한 측근은 “우리에겐 캠프 만들 여력이 없어 재단 사무실을 잠깐씩 이용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취재 과정에서 매스컴에 공개되지 않은 박의원의 또 다른 사설 조직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러문제연구소’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 95년 설립된 이 단체에서 박근혜 의원은 회장, 권영갑씨는 소장을 맡고 있다. 한러문제연구소는 서울 강남지역에 사무실을 두고 있으며 10여명의 직원이 시베리아철도의 한국 연계, 러시아의 가스·농지 개발 참여 등 한국과 러시아의 경제협력과 관련된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5·16 쿠데타 당시 육군사관학교 생도였던 권영갑 소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 등 다른 육사 생도들과 함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쿠데타를 지지하는 성명에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소장은 육사 교수를 역임했다. 이 단체는 러시아 정부의 고위관리들과 상당한 친분을 쌓아두고 있으며 러시아 관리들을 박의원과 연결해 주고 있다. 권소장은 박의원을 적극 도와 그녀의 외교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셈이다. 사무실 운영비는 자체적으로 마련한다고 한다. 한 관계자는 “이 연구소에선 국가의 장래와 미래의 비전에 대한 정책안을 내놓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서울 힐튼호텔에서 기자는 박근혜 의원의 인맥을 논할 때 빠져서는 안 될 인물인 L씨를 만났다. 그는 한국문화재단과 가까운 위치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중견 건설업체 회장이다. 그의 이력만 들어도 박의원과의 관계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장군이던 시절 부관을 지낸 L씨는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하는 순간까지 대통령 수행비서로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인물이다. 박 전 대통령과는 30여년 동안 인연을 맺어온 셈. 박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중 공직자나 외부 인사들이 대통령을 만나려면 반드시 그를 거쳐야 했다. 이 때문에 그는 거물급 정치인, 고위관료, 경제계 인사, 언론계 고위층, 교수집단 등 수많은 사회 지도급 인사들과 지금까지도 막역한 인간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한국문화재단은 ‘대선 캠프’?
    L씨는 박의원과 이들 인사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권 한 인사는 이렇게 평한다. “박근혜 의원은 영남에서만 통하는 정치인이 아니다. L씨 같은 사람들이 주변에 포진해 박의원을 돕기 때문에 박의원은 서울의 지도층 사이에서 단기간에 돌풍을 일으킬 만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기자와 만나는 동안 L씨는 박의원을 항상 ‘큰 영애’라고 지칭하며 깍듯이 예의를 갖췄다. 요즘 같은 시대에 신선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장면이었다. 박 전 대통령의 향수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러문제연구소의 권소장이나 L씨 같은 인물과 박근혜 의원과의 관계는 영화처럼 의리 있고 낭만적인 모습으로 비칠 법하다.

    상청회 역시 박의원이 갖는 정치적 무게를 상징한다. 상청회는 박의원이 이사장으로 있는 정수장학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정수장학회는 지난 1962년부터 가정 형편이 어렵지만 학업 능력이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해 학비 전액을 지원해 왔는데 그 수가 3만명에 이른다.

    기자가 최근 확보한 상청회 임원 명단에 따르면 수많은 상청회 회원들이 전국 각지의 정치, 행정, 경제, 법조, 교육, 의료, 문화, 언론계의 주류로 포진해 있다. 상청회는 서울 중앙회를 중심으로 전국 주요 도시마다 지부를 두고 있는데 지역편중 현상도 없다. 예를 들어 전북, 광주, 제주에도 지부가 있다. 신승남 전 검찰총장도 기자가 확보한 상청회 회원 명단에 올라 있었다.

    회원들은 어려운 시절 자신들을 도와 성공의 밑거름이 되게 해준 장학회에 동문 의식을 느끼고 있다. 이 때문에 상청회는 사회 지도급 인사들의 모임이면서 결속력이 매우 강한 특성이 있다. 상청회는 각 지부별로 회장단을 중심으로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면서 여러 사업을 펴고 있다고 한다. 박의원도 상청회 행사에 자주 참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의원측은 상청회는 단순 친목모임이며 정치적 활동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충성도 높은 전국단위 조직이 박의원 주변에 있다는 것은 대선을 앞둔 박의원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다.

    이 밖에 새마을운동과 관련되었던 인사들이 박의원에게 우호적인 전국적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지만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다.

    박의원에게 조언해 주는 자문그룹은 폭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덕우 신현확 전 총리, 김만제 의원 등 경제계의 TK 출신 세 거두는 박의원에게 호의적이다. 상청회에서도 각 분야에 걸쳐 교수 집단이 두껍게 포진해 있다. 유신시대 박대통령과 관계를 맺었던 많은 전문가 그룹과 그 자제들이 박의원에게 자문해 준다는 후문이다.

    박의원은 이런 인맥을 토대로 사회 지도층 사이에서 외연을 넓혀 나가고 있다. 최근 박의원은 유신정권 출신 한 지인의 소개로 경기여고 출신 인사들의 식사 모임에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정·재계 거물급 인사의 부인들이었다. 이 모임에 동석한 한 인사는 기자에게 모임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경기여고 출신 여성들은 사실 경기고 출신 정치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좀 딱딱하고 재미없지 않느냐. 그런데 박의원은 달랐다. 여성끼리만 통하는 뭔가가 있었다. 정치인이라는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시종 화기애애했다. 모임이 끝날 때쯤 우리 여성들이 여성대통령 만들자는 다짐까지 했을 정도다.”

    박의원측은 의원회관 보좌진 외에 ‘상근 조직’의 형태를 갖춘 싱크탱크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최근 박의원은 상당히 정교하면서도 과단성 있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어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취재 결과 한국문화재단과 한러문제연구소의 역할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박의원은 영남 주자면서도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말은 안 한다. 대신 당내 개혁을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의 후광에다 개혁의 색을 더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일관되게 진행되었다. 이회창 총재를 비판할 때도 정밀한 어휘 구사로 단계별로 수위를 올렸다. 여론의 의표를 찔러 탈당효과도 극대화했다. 지금까지는 완전히 ‘프로’의 솜씨다. 박의원 혼자서 한 일일까. 박의원을 위해 일하는 보이지 않는 싱크탱크 그룹이 있다는 가정은 이러한 정황에서 나왔다.”(한나라당 한 TK 의원)

    박의원이 탈당하자 한나라당 일부 인사들 사이에선 “조직과 세도 없으면서 뭘 믿고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이들 역시 ‘박의원의 잠재력만큼은 대선주자급으로 분류되기에 충분하다’는 데 동의한다.

    박의원의 정치자금 문제와 관련해 일차적으로 거론되는 단체는 정수장학회다. 정수장학회는 1962년 설립되어 지난 90년 기준 자산총액이 96억원, 2002년 현재 부산일보 주식 100%, 서울 MBC 주식 30%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박의원 관련 재단은 공익사업재단이어서 비록 박의원이 이사장이지만 자의로 처분해 정치자금으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익법인 재산은 매각되더라도 그 돈은 모두 국고로 귀속되기 때문이다.

    박의원에게 대선자금까지 확실하게 밀어줄 ‘스폰서’가 있다고 믿는 정치인은 거의 없다. 주목받는 인물은 박의원의 초등학교 동창이면서 1000억원대 재산가인 정몽준 의원. ‘박근혜-정몽준 연대’가 성립된다면 자금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 정당 조직을 가진 민주당 개혁그룹과의 연대가 점쳐지는 것도 자금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의원의 대선 출마 시나리오는 아직까지 머릿속 그림일 뿐이다. 단기필마가 된 박근혜 의원 본인은 지금쯤 조직과 돈에 대해 걱정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 문제가 이미 해결되었기에 탈당을 선언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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