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2

2001.05.03

‘전시장’ 설계 없는 무모한 시공 탈 났다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전면 재조정 … 경험 없는 업체에 수의계약 ‘밀어붙이기’

  •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

    입력2005-01-21 13: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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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장’ 설계 없는 무모한 시공 탈 났다
    지난 4월16일 문화관광부는 자체 홈페이지를 통해 2003년 12월로 예정한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준공과 개관일을 전면 재조정한다고 발표했다. 이날 국회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지원 소위원회(위원장 이미경 의원)가 중앙박물관 건립 공정상의 각종 문제점을 담은 검토 결과서를 발표하자, 즉각적으로 이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학계에서는 일단 이런 문화부의 전향적 태도를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그동안 부실공사 우려가 제기되었음에도 꼼짝 않던 문화부가 돌연 ‘백기’를 든 배경에 의혹의 눈길이 쏠린다.

    1993년 김영삼 정부의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와 함께 급조한 중앙박물관 신축계획은 출발 당시부터 ‘10년의 공기는 턱없이 짧다’는 학계의 비판을 받아왔다. 연건평 4만616평과 공사비 3291억원이라는 박물관 규모로 보나, 외국 박물관의 시공 사례와 비교해도 10년 후 개관은 무리라는 게 당시 학계의 공통된 시각이었다.

    사실 국회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지원 소위원회가 발표한 이번 검토 결과서도 △학예인력 부족 △무리한 공기문제 △박물관 건립조직의 이원화 △소화방재 시스템의 부적절 △미군 헬기장 문제 등 그동안 전문가들이 지적한 내용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그렇다면 지난 8년간 곳곳에서 터져나온 각종 문제점 지적에도 ‘모르쇠’로 일관하던 문화부가 개관 연기를 전격 결정한 ‘진짜 이유’는 뭘까. 공사 관계자들과 관련 학계 인사들은 국회의 압박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문화부가 서둘러 진화에 나선 숨은 배경은 그동안 전문가들 사이에서 계속적으로 의혹을 제기한 전시장 설계 부분을 검토서에 일부 언급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일반 건물의 건축과 달리 박물관의 경우 건축물 설계와 시공에 앞서 반드시 완결하여야 하는 전시장의 설계부분에 엄청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 학계에서는 이 검토 결과서가 일부 문제점만 지적했을 뿐 전시 설계에 얽힌 갖가지 의혹들과, 공기 연장에 따른 책임 부분은 거론조차 하지 못한 채 권고 수준에만 머물렀다고 비판을 한다. 즉 그에 대한 ‘책임 시비’를 제기하기 전에 문화부가 서둘러 잘못을 덮어버릴 수 있는 기회만 제공한 꼴이 되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전시장’ 설계 없는 무모한 시공 탈 났다
    박물관 공사에 관여했던 각종 전문가들이 상식적으로 납득하지 못하는 공정상의 최대 의문점은 문화부 직속 박물관 건립추진기획단(이하 기획단)이 지난 97년 10월31일 전시 설계도의 얼개도 짜여 있지 않은 상태에서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는 대목이다. 전시 설계도는 유물의 특성과 형태, 그 규모 등 전시물에 대한 각종 정보와 전시 테마, 전시 시나리오를 주축으로 전시 공간을 어떻게 꾸밀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설계도로, 이것을 잘못하면 건축물의 공간 설계와 시공을 새로 해야 하는 부담을 안는다.

    “시나리오 없는 영화나 관람석 없는 축구장을 상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유물이 어느 곳에 어떻게 들어갈지도 모른 채 건축물의 공간 설계를 하고 시공을 시작했습니다.”

    기획단의 자문위원직을 맡았던 한 전문가는 기획단의 무모함을 지적했다. 그는 “세계 어느 박물관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 세계 6대 박물관을 지향하는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 공사에서 벌어졌다”며 “이는 무리하게 공기를 맞추려는 행정편의주의식 발로로밖에 볼 수 없다”고 정부를 질타했다.

    전시 설계를 담당한 J건축의 한 관계자도 이를 인정했다. 그는 “2년에도 못 미치는 촉박한 설계기간 때문에 건축 설계와 전시 설계 모두 1년 연기를 신청했지만 기획단측이 공기가 늦어진다는 이유로 거절해 건축 설계도만 서둘러 완성해 납품하면서 이런 결과가 빚어졌다”며 “여기엔 박물관측이 유물에 대한 정보를 늦게 넘긴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고 이해를 구했다.

    하지만 착공 1년 후인 98년 12월 J사가 뒤늦게 납품한 전시 설계도조차 24억원의 선급금을 지급하였음에도 ‘전시 설계의 기본 사항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도면’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와 함께 학계 내부에서는 기획단의 전시 설계업체 선정상의 의혹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국회 소위원회 조사활동의 자문위원으로 나섰던 한 전시 전문가는 “모형과 영상에 관한 설계가 아예 없고, 시방서, 주요 마감재료의 색상과 견품 등이 빠져 있는 등 시공이 아예 불가능한 도면이었다”며 “이는 전혀 전시 설계 경험이 없는 업체가 수의계약으로 이를 수주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J건축은 중앙박물관의 건축 설계 부분과 감리를 한꺼번에 맡으면서 이미 의혹의 눈길을 받은 적이 있는데도 기획단은 전시 설계까지 이 회사에 수의계약으로 발주했다. 즉 한 회사가 건축물의 설계와 감리, 전시물의 설계-감리를 모두 수주한 것이다. 당시 기획단의 논리는 전시와 건축의 상호 연계성을 높여 짧은 공기에 맞추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전시 설계의 경험이 없던 J건축은 지난 95년 12월 기획단과 설계 수의계약을 맺은 후 A업체에 하도급을 주었으나, 이 회사가 부도나자 또 다른 3개 회사에 전시실별 하도급을 따로 주는 기형적 설계 시스템을 갖추었다. J건축의 모 실장은 “당시 프랑스 빌모트 사에 전시 설계를 의뢰하려 했다. 그러나 최저 38억원의 금액과 5년간의 기간을 요구했다. 이같은 사실을 기획단측에 알렸지만 묵살되었다”며 “행정직 중심의 기획단은 유물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는 한편 박물관측은 바쁘다고 무시하는 이원적 구조 속에 무리한 발주가 이루어진 게 사실”이라고 해명했다. 전시에 무지한 기획단의 ‘밀어붙이기식 행정’과 국립중앙박물관측의 ‘무관심’ 속에 헤매던 J건축은 99년 말까지 박물관측의 협조를 어렵사리 얻어 전시 설계도의 보완을 마쳤으나 이마저도 관련 자문위원들의 비판을 받으면서, 이번에는 기획단 내에 새로 생긴 전시과에서 직접 전시 설계에 대한 전면 수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시장’ 설계 없는 무모한 시공 탈 났다
    이 과정에서 기획단은 설계도가 완성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208억9000만원의 전시 인테리어 발주에 나섬으로써 또 한번 특혜 의혹에 휩싸였다. 당시 전시과의 요청으로 수정 설계를 담당한 한 관계자는 “전시과와 J건축 하도급업체의 요구로 수정 설계에 들어갔으나 업체측이 대금 지급을 제대로 하지 않아 기본설계 단계에서 그만뒀는데 기획단이 전시 설계의 한 부분인 붙박이 진열장에 대한 일괄 발주를 냈다”며 “이는 어떤 유물이 들어설지, 전시 프로그램을 어떻게 마련할지도 확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취한, 도저히 이해 못할 처사”라고 비난했다. 또 그는 “기획단이 발주를 낸 시점은 국회 소위원회가 전시 설계의 문제점을 제기하며 전면 재검토를 권고하던 지난해 12월 말이었다”며 “당시 전시과가 이를 반대하자 기획단장이 시설과에서 이를 발주토록 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특히 기획단이 200억원이 넘는 발주대금을 지불하고 수의계약으로 진열장 발주를 낸 곳이 신축 중앙박물관의 시공사인 D사라는 대목에선 의혹이 더욱 증폭된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D사는 건설토목 전문회사로 인테리어와는 거리가 먼 회사일 뿐만 아니라 D사가 진열장의 하청 발주를 준 업체 중 하나가 J건축의 전시설계 하도급업체인 K사였기 때문이다. 즉 전시 설계를 담당한 회사가 진열장도 납품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기획단장이었던 문화부 김준영 종무관은 “완벽한 전시 설계는 있을 수 없으며, 붙박이 진열장은 인테리어 개념으로 보고 우선 가능한 부분이라도 먼저 발주한 것”이라며 “시설과에서 발주하도록 한 것은 단장으로서의 지휘권 행사였으며, 인테리어 발주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지겠다”고 밝혔다.

    “박물관 착공 후에 기획단장이 네 번 바뀌고, 그때마다 패턴이 달라지는데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으니 전면 재검토를 하면 뭐합니까.” 국립중앙박물관의 시공과정을 줄곧 지켜본 한 설계사의 말이다. 그는 문화부의 이번 박물관 전면 재검토 대책안을 절대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민이 주인인 국립박물관을 ‘주인 없는 박물관’으로 만드는 주인공이 바로 공무원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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