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8

2001.04.05

‘함석헌’ 석 자에 인생이 변했어요

철도기관사→유학→역사학자 … ‘김성수 박사’ 끊임없는 변신

  •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

    입력2005-02-23 11: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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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 석 자에 인생이 변했어요
    1989년 2월4일 새벽 5시40분.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선을 타고 숨가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함석헌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즉시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대 병원으로 달려갔다. 라디오 뉴스는 벌써 ‘함석헌의 죽음’을 알리고 있었다. 영안실엔 이른 시간에도 불구하고 많은 조문객들이 있었다. 김성수씨는 마치 자신이 관속에 누워 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함석헌 선생의 삶과 인생, 그리고 자신의 인생…. 3시간 뒤 김씨는 8년간 일했던 철도청에 사직서를 냈다.

    영국 셰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난해 귀국한 김성수씨(41). 김씨는 최근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를 발췌해 재구성한 ‘함석헌 평전’을 출간했다. 가난한 철도 노동자에서 늦깎이 유학생으로, 다시 역사학자로 그는 끊임없이 변신했고 또 성공했다.

    김씨를 만나기 위해 그의 사무실을 찾았을 때 그는 쑥스러움 가득한 웃음으로 맞이했다. 김씨의 별명은 ‘와단’이다. ‘밥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의 저자 최일도 목사가 지어준 별명이란다. 와이셔츠 단추 구멍만큼 눈이 작다고 해서 붙여진 애칭이다.

    김씨는 1960년 서울에서 함경도 출신 아버지와 서울 토박이 어머니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기율씨(80)는 서울신문(현 대한매일신보)에 시사만화를 연재하던 화백이었다. 그는 풍족하지는 못했지만 화목한 가정에서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창 시절엔 교회가 제 삶을 지배했죠. 특별한 취미도 없었고 공부도 시원치 않았습니다.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성경 공부하는 것이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소년 시절의 자신을 아무런 ‘의식’도 가지지 못한 ‘골통 보수 예수주의자’라고 불렀다. “유신 때였습니다. 학교에서 유신 홍보 포스터 그리기 대회가 열렸어요. 저는 일체의 ‘사회적 의식’이 결여된 채 만화가였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을 한껏 발휘했죠. 입상을 해서 상장까지 받았습니다.”

    김씨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가세가 갑자기 기울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새로 시작한 출판업이 실패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가난을 경험했다. 하지만 ‘골통 보수 예수주의자’답게 그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행복으로 가득할 내세가 있는데 현재의 고민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국가가 학비를 지원해주는 한국철도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후 고생하는 어머니를 위해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김씨는 철도청 기관사로 경부선, 장항선, 영동선을 오가며 전국 방방곡곡을 철마와 함께 누볐다.



    그러던 그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김동길씨(전 연세대 교수)의 강연을 듣고부터. 강연이 끝난 뒤 김교수가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취미가 뭐요?”

    “철야기도, 금식기도를 하며 기독교 근본주의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 교회에 미쳐서 살면 안 됩니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함석헌 선생님처럼 사회문제에도 눈을 돌려보세요.”

    김씨는 김교수에게서 ‘함석헌’이란 친숙지 않았던 이름 석자를 처음 접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함석헌이란 사람의 공개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함석헌의 조용한 열변에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은 주체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기독교 근본주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함석헌의 종교적 관용주의는 충격이었다.

    퀘이커 신자였던 함석헌의 다원적 종교관은 타 종교에 대한 종교적 관용을 보여줬고 광범위한 인간사에 대해 폭넓은 인도주의적 관심을 갖게 했다.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친구를 만나도 그는 언제 어디서나 함석헌을 생각했다. “그의 저서를 모조리 읽었고 그의 강연을 미친 듯이 따라다녔습니다. 저는 결국 함석헌에 미친 ‘함석헌 환자’가 돼버렸고 그를 연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함석헌의 강의와 책을 통해 현실에 참여하지 않는 신앙과 실천하지 않는 사고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깨달은 김씨는 야간열차 운행을 마치고 서울역에 도착하면 연세대로 달려갔다. 역사학, 철학, 영문학 등 대학 강의를 훔쳐 들으며 가슴 속에 잠자던 ‘사회의식’을 깨워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방송통신대학 영문과에 입학해 88년 학사 학위를 받았지만 ‘함석헌 연구’에 대한 열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이듬해 함석헌의 시신을 본 뒤 그는 철도청에 사표를 냈다. “함석헌은 세계사에서 그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는 종교사상가였고 구도자였으며 때로는 인권운동가였습니다. 그의 생애와 사상을 영어로 쓰인 글을 통해 세계에 알리고 싶었어요.”

    그는 이듬해 영국 에섹스대학 역사학과에 지원했다. 운이 좋아 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300만원을 마련해 무작정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250개 장학 단체에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장학금을 보내주겠다는 답신은 없었다.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에서 그는 우연히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 의사인 잉글 로렌스를 만났다.

    그와는 일면식도 없었던 로렌스는 1953년부터 2년간 군산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했고 그때 함석헌과 함께 종교학을 공부한 퀘이커 신자였다. 김씨로부터 ‘함석헌 연구’를 위해 영국에 왔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미지의 한국인’ 김씨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줬다. 김씨에게 그녀는 친어머니와 다름없다. “1997년 어머니(잉글 로렌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두 아이들의 중간 이름을 어머니의 이름을 따 잉글로 지었습니다.” 그는 유학 중 만난 영국인 여성과 4년 전 결혼했다. 그의 아내는 일본문학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영국에 체류할 때 퀘이커로 개종했다. “80년대 후반 함석헌 선생의 노장사상 공부 모임에 나가면서 퀘이커에 대해 알게 됐고 결국 영국에서 퀘이커 교도가 됐지요.” 퀘이커는 17세기 중반 영국 랭커셔 지방에서 국교인 성공회에 대한 개혁운동으로 출발한 개신교의 한 분파로 내세 구원보다는 사회 개혁에 관심이 많다. 세계평화운동, 인권운동 등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1947년 퀘이커 교도들은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함석헌으로부터 물려받은 퀘이커리즘은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길을 그에게 제시해줬다.

    김씨는 한 명의 인물을 통해 그가 살았던 시대를 조망하는 역사연구를 계속할 계획이다. 그의 다음 연구주제는 ‘박헌영과 한국 근대사’. “좌, 우 모두에 버림받은 박헌영에 대한 연구는 남과 북 모두에서 전무한 실정입니다. 그의 삶과 사상을 통해 한국 근대사의 빛과 그림자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그는 또 미국 퀘이커회에서 준비하고 있는 한반도 통일모임에 참여해 통일운동에도 매진할 예정이다.

    “70년대는 ‘골통 보수 예수주의자’, 80년대는 철도 노동자, 90년대는 가난한 유학생으로 살았습니다. 어느덧 불혹을 넘긴 지금 제가 할 일은 역사연구와 통일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취재를 마치고 그와 함께 도산공원을 찾았다. 그는 멀리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당신(함석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철도공무원으로 인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당신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서구 사회를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고 영국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태평양 한가운데 빗방울 한 방울이 더해지듯이, 꼭 백년 전에 태어난 당신의 거대한 사상적 유산에 더해지는 작은 빗방울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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