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2

2001.02.22

“판사 월급으론 애들 학비 대기도 벅차요”

법복 벗는 이유 ‘경제난’이 으뜸… 격무, 경직된 조직문화도 법원 탈출에 한몫

  •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05-03-21 14: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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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사 월급으론 애들 학비 대기도 벅차요”
    판단의 문제는 언제나 사람을 괴롭힌다. 법률적 판단을 ‘업’으로 삼아 시시각각 선택의 딜레마에 봉착하는 판사들은 더욱 그렇다. 그런 그들이 전격적인 가치판단의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바로 그들 자신의 거취 문제다.

    현직 판사들의 ‘법원 탈출’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 대법원에 따르면 올해 2월 법관 정기인사와 관련해 사의를 표한 전국의 판사는 줄잡아 40여명(2월9일 현재). 심지어 서울지법 형사4부에서는 부장판사와 2명의 배석판사가 모두 사표를 제출하는 유례없는 일마저 벌어졌다. 2월5일(12일자) 이뤄진 고법 부장급 이상 법관 인사에 이어 2월12일(19일자) 발표될 지법 부장급 이하 인사가 남아 있지만 법복을 벗을 판사 수엔 변동이 없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하지만 오는 9월 한 차례 더 정기인사가 예정돼 있어 사직 판사 수는 훨씬 늘어날 전망이다.

    물론 판사들의 ‘줄사표’ 현상이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5, 6년 전부터 무더기 사표 행렬은 이어져왔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지난 97년 65명, 98년 80명, 99년 98명, 2000년 95명 등 최근 수년간 매년 사직 판사가 100명 선에 육박할 만큼 ‘탈법관 바람’이 가속화하는 추세다. 명예롭고 안정된 엘리트 직업의 대명사로 꼽혀온 판사들의 이런 퇴직 러시는 대체 어떤 연유에서 비롯됐을까. ‘이탈’의 으뜸 요인은 단연 경제적 이유다.

    “판사 월급으론 애들 학비 대기도 벅차요”
    “솔직히 선배들을 보면 앞날에 대한 위기감마저 든다. 두 자녀 대학 보내기에도 허덕이는 부장판사들이 적잖다. 냉엄한 경제현실 앞에 긍지와 권위만을 들먹이던 시대는 지났다.”

    경남지역 한 지법의 30대 중반 A판사는 “사실 일반의 예상과 달리 자신이 내린 판결로 인한 인간적 고뇌나 갈등 때문에 사직하는 판사는 거의 없다”고 귀띔한다. A판사의 사정은 그래도 낫다. 군법무관을 마친 직후 4년간 변호사 개업을 한 덕에 지난해 판사로 임관하기 전까지 ‘생활자금’을 다소 모아놓은 케이스이기 때문.



    통상 초임판사 월급은 140만원 가량. 하지만 10년 차가 돼도 연봉 4000만원 수준에 머문다. 고용 변호사들의 월수입이 못 받아도 500만원 정도임을 감안하면 천양지차인 셈.

    그러나 단순히 경제적 잣대로만 판사들의 ‘엑소더스’를 설명하기엔 모자람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적 이유에서 비롯된 로펌(법률회사)행이나 변호사 개업 사례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

    A판사는 “집단 이탈의 다른 한 축엔 엄청난 업무 과중이 자리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근무지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한 달에 보름 가량의 야근이 판사들 간에 일상화돼 있다. 서초동 판사들의 평균 퇴근시각도 밤 9시.

    “계속중인 속행사건을 포함해 한 재판부당 평균 400∼500건의 사건을 쥐고 있다. 집에서 밤늦도록 사건기록 검토와 판결문 작성에 매달리는 날도 많다. 게다가 판결 뒤 소송 당사자들이 내뱉는 비난과 욕설을 감내해야 하는 스트레스도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러나 박봉과 격무의 ‘쌍끌이’에 시달리는 직종이 단지 판사들뿐일까. 사실 판사들의 주된 이탈 원인은 오히려 경직된 법원 내부 조직문화에 있다는 것이 전-현직 판사들의 지배적 견해다.

    몇 년 전만 해도 사직은 고법 부장 승진에서 탈락한 중진판사들의 정해진 수순이었다. 평판사가 14년 경력을 쌓으면 보통 지법 부장으로 승진하고 20, 21년쯤 되면 고법 부장 승진대상이 된다. 하지만 자리가 일정하다 보니 연수원 동기 중 60%만 승진하고 나머지는 변호사로 돌아선다. 그러나 최근의 집단사직 현상은 양태가 다르다. 대법원이 정확한 통계를 내놓지는 않지만 법원 내부에서는 해가 갈수록 경력 1∼10년 미만의 젊은 판사들 조기 이탈이 잦아진다며 크게 우려하는 분위기다.

    “누구나 초임판사 때는 자긍심을 지닌다. 평생을 소명의식으로 보내겠다는 평판사들이 대다수다. 하지만 이런 포부는 연차가 늘수록 스러진다. 사법부에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판사 월급으론 애들 학비 대기도 벅차요”
    모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지난해 서초동 법조타운에서 단독개업한 B변호사는 그 원인의 하나로 법관생활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임관성적(사법시험 성적과 사법연수원 성적)을 든다. “법원에서조차 ‘행복은 성적순’이다. 실제 법원 내에서는 성적이 좋아 법원행정처로 차출되는 판사들을 ‘황태자급’으로 분류한다. 행정업무를 맡을 판사의 성적이 굳이 좋아야 할 필요가 없는데도 이들은 연차가 쌓일수록 승승장구한다.

    B변호사는 “개인의사 표명을 꺼리는 판사 집단의 속성상 겉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드물 뿐이지, 성적 때문에 보람은커녕 회의를 품은 판사들이 상당수”라고 털어놓는다.

    B변호사는 ‘한번 판사=평생 판사’란 소신으로 직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미국-유럽 법조계처럼 법관 승진제도를 없애든지, 연수원 수료 후 일정기간 변호사 생활을 거친 뒤 판사로 임관하는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변호사 개업 1주일 만에 전혀 다른 세상을 알게 됐다. 법원 내부에만 매몰돼 있던 시각이 새 영역을 접하면서 비로소 개안(開眼)된 느낌이다.” B변호사의 이런 토로는 정체된 법원 조직문화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시사한다.

    이와 관련, 지난 1월31일 사직한 수원지법 평택지원 좌진수 판사(39·사시29회)는 2월1일 법원 내부통신망에 올린 ‘사직인사’를 통해 법원의 편협한 인사원칙을 질타했다. 이 글에서 그는 ‘서열’(임관성적에 따른 법관별 개인순위)에 따라 서울 및 지방근무의 차별 편차가 크다는 점을 강조하며 법원의 비합리적 인사관행을 꼬집고 있다. 실제 판사들 사이에선 서울(수도권)`-`지방근무 판사들을 각기 빗댄 이른바 ‘경판’(京判), ‘향판’(鄕判)이란 은어가 자조적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대법원은 일선 판사들을 한가족으로 끌어안으려는 애정이 없다. 매년 판사들이 수십명씩 사직해도 대체인력이 얼마든지 있으므로 인력수급엔 차질이 없다는 식이다.” 현직 지법 부장 C판사의 지적이다. 그는 “법원에 새 물결이 밀려오고 있지만 아직도 법원은 ‘변호사 양성소’로 전락해 있다. 적성과 능력에 맞춰 창의적인 일을 하려 법원을 떠나기보다 열악한 법원 내부사정에 염증을 느껴 판사의 꿈을 접는 폐단을 막기 위해서라도 법관 처우개선이나 제도개혁이 아쉽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대법원의 입장은 판사들의 정서와는 평행선을 긋는다. 대법원 관계자는 “어느 조직보다 법원 인사는 객관적이며 현재 성적 이외에 공정하게 법관 능력을 평가할 다른 기준이 없지 않은가”고 반문한다. 사기진작과 관련해서도 “업무추진비 지급, 유학지 확대, 전문분야 선택폭 확대 등 조치를 실시중이며 보직 여부와 관계없이 동일 경력에 동일 임금을 지급하는 단일호봉제를 추진중”이란 공식 답변을 하지만 일선 판사들은 이에 쉽사리 수긍하지 않고 있다.

    ‘총체적 위기’에 빠진 판사들의 ‘법원 울타리 넘기’를 탓할 순 없다. 그러나 경륜과 자질을 갖춘 판사들을 초임판사로 교체하는 고육책만으로 법관 이탈에 따른 업무공백과 전문성 부족의 한계를 극복하고 충실한 재판을 진행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그런 힘겨운 부담은 사법부에 신뢰를 잃어 가는 국민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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