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6

2000.10.26

역사를 깨우는 감격의 체험기

  • 입력2005-06-30 13: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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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깨우는 감격의 체험기
    우리에게 ‘고고학’이라는 분야를 처음 맛보게 해준 것은 하인리히 쉴리만(독일)의 전기가 아니었나 싶다. 아동전집물로 유명한 한 출판사 세계위인전기 시리즈에 쉴리만이 들어 있어 비교적 일찍 트로이의 발굴과정을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발굴’ 하면 지금도 호머의 ‘일리아드’와 트로이부터 떠오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온갖 신비주의로 덧칠된 이집트 투탕카멘 왕의 무덤 정도가 우리에게 기억되는 발굴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도 광복 이래 우리 학자의 손에 의해 수많은 발굴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1946년 5월12일 경주 노서동 호우총 발굴. 바닥에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壺杆十’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뚜껑 달린 청동그릇이 발견됐고 그 위에는 우물 정자를 옆으로 눌러 찌그러뜨린 모양(#)의 뜻 모를 부호가 새겨져 있었다.

    을묘년(415년)은 광개토왕(호태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개토왕비(碑)를 새운 해였다. 이 호우가 광개토왕비 건립 기념품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으나 이것이 왜 신라왕족의 무덤에 묻혔는지는 지난 반 세기가 넘도록 수수께끼였다.

    현재는 복호(卜好)라는 이름의 신라왕자가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가져온 물건이며, 우물 정자는 고구려 사람들의 국장(國章)이 아닐까 정도로 해석한다. 아직도 맨 끝의 열십(十)자는 무슨 뜻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만큼 고고학이 인내심을 요구하는 지루한 작업임을 말해준다(‘유물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에서).

    불행하게도 호우총을 발굴할 때는 국내에 훈련된 고고학자가 한 명도 없어 총독부 직원이었던 아리미츠씨의 지도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50여년이 지난 지금 약 1000명의 고고학발굴요원이 1년에 400건 정도의 발굴을 한다. 양적으로는 엄청난 발전이다. 문제는 그 많은 발굴현장에 일반인의 접근이 어렵고, 발굴보고서는 모두 전문적인 내용이어서 웬만한 식자들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박물관 전시실에 걸린 발굴기록을 꼼꼼히 읽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젊은 고고학자 25명이 ‘유물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푸른역사)를 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은 그동안 고고학자들의 전유물이었던 현장유적과 유물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이 책은 딱딱한 발굴보고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일어난 에피소드와 중요한 유물을 발견하는 순간의 벅찬 감격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생생한 고고학 체험기다. 오랜만에 C. W. 세람의 ‘신, 무덤, 그리고 학자들’을 읽는 것처럼 흥미로웠다.

    내용은 크게 4부로 나뉜다. 1부 ‘역사의 편린을 발굴한다’는 경기도 미사리 선사시대 사람들의 살림집, 삼국시대 산성인 하남시 이성산성, 김해 양동리 가야 고분, 공주 백제고분 중 무녕왕릉에 대한 의문과 발굴과정을 소개했다. 2부 ‘시간의 무덤 밖으로 나온 유물들’은 청동거울, 새, 조개껍질, 곱은 옥 등 말이 없는 유물과 고고학자의 대화를 담았고, 3부 ‘불굴의 무대는 세계다’는 한국 고고학자들이 세계 유적지를 답사한 여행기다. 4부 ‘발굴하는 발굴 이야기’에서 발굴이란 무엇인지 또 어떻게 하는 것인지 고고학자들의 삽질소리를 들으며 고고학에 입문하는 기회가 주어진다.

    25편의 개성 넘치는 글 중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토지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인 심광주씨의 ‘이성산성 발굴기’였다. 그는 10년 전 일을 마치 어제의 사건처럼 그리는 훌륭한 글솜씨를 발휘했다.

    1990년 7월 3개월째 이렇다할 성과 없이 발굴이 계속되던 중 10m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안개 속에서 “와!”하는 임반장(인부들의 작업반장)의 외침이 들린다. 임반장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꿈에도 찾고자 했던 목간(木簡)이 있었다. 이 목간의 발견으로 그동안 이성산성을 놓고 신라의 도성이냐 백제의 도성이냐 하던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목간에 쓰인 ‘도사’와 ‘촌주’가 신라의 관직명이었던 것이다.

    심씨의 발굴기에는 이성산성 밑에 사는 도사와 꿈과 낭만과 위험 속에서 함께 작업하던 동료들, 그리고 발굴 현장에서 사고나 병으로 죽은 선배들의 애절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 여전히 이성산성이 백제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던진 한 마디가, 고고학자는 역시 과학자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역사는 꿈꾸는 자의 것이라고 하지만, 이제 과감하게 현상을 직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왜곡된 역사는 너무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심광수). 이 책 때문에 올 대학입시에서 사학과나 고고인류학과를 지원하는 젊은 인문학도가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도 해본다.

    유물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이인숙·임효택 외 지음/ 푸른역사 펴냄/ 355쪽/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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