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1

2000.07.06

‘대문’ 열었어도 손해 안봤다?

대외 시장 확대 효과가 더 커…일본서 ‘쉬리’ 성공은 ‘상호주의’결과

  • 입력2005-07-06 15: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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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문’ 열었어도 손해 안봤다?
    “오겡키데쓰카(잘 지내고 계세요)?”최근 우리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 말이 크게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일본영화 ‘러브레터’ 에서 여주인공이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며 텅 빈 설원을 향해 외치던 대사였다. 이 영화는 국내에서 120만 관객 동원이라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네티즌들은 주인공을 맡은 나카야마 미호의 홈페이지를 찾아 사진을 다운받고 컴퓨터 모니터 바탕 화면에 그녀의 사진을 까느라 바빴다. 일본의 인기 스타가 어느새 국내 연예인 못지않은, 어쩌면 더 능가하는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이다.

    이런 유행은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비단 젊은이들뿐만이 아니고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온갖 학용품이나 일상 생활용품이 일본 만화 캐릭터나 인기 가수 사진으로 도배돼 있는 것은 이제 놀랄 일도 아니다. 98년과 99년의 1, 2차 개방에 이어 올 6월 하순 3차 개방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일본문화의 산업적 파급효과가 어느 정도이고 우리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최근 문화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정책개발원에서 발표한 ‘일본 대중문화 개방정책의 심사분석’이라는 보고서는 일본 대중문화의 1, 2차 개방 결과 ‘시장 잠식’ 이라는 부정적인 효과보다는 한국 대중문화의 국내외 시장 확대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결론내리고 있다. 일단 문화 개방의 이득이 더 많다고 보고 있는 셈.

    문화정책개발원의 이흥재 연구실장은 “두 차례에 걸쳐 단행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당초 우려와 달리 큰 부작용 없이 문화접촉 기회 확대, 국내 문화산업 경쟁력 강화 등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 영화가 일본에 진출해 전에 없던 대성황을 이루거나 공연 작품의 진출도 성공한 것은 일본 문화 개방에 따라 양국간 서로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된 결과”라고 말했다.

    위의 보고서는 한일 양국의 대중문화 교류를 상호주의 개념으로 파악,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대한 논의를 한국 문화상품의 대일 수출이라는 ‘역발상’으로 진전시켜 나가자고 제안하고 있다. 이는 개방정책에 따른 국내 문화산업의 수익 감소분이 국내 시장의 6∼10배에 이르는 일본시장에서 약간의 성공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는 분석 결과에 기반하고 있다.



    부문별로 살펴보면, 개방 효과가 가장 컸던 영화의 경우 개방조치 첫 발표 후 지난 3월까지 ‘러브레터’ 등 10편이 수입 개봉돼 지난해 현재 국내 시장 점유율 3.5%를 차지하는 등 당초 우려에는 못 미치는 것으로 분석됐다. 국산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98년 28.7%에서 지난해 36.1%로 오히려 높아졌다.

    비디오물 역시 상영영화 중 8편이 출시돼 ‘러브레터’의 경우 4만9000여 개가 판매됐으나 이렇다 할 부정적 개방 효과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일본 대중가요 등의 공연도 2000석 이하라는 조건에 묶여서인지 시장을 위협하는 영향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문화부 문화정책과 오영우 사무관은 “2002년 한일 공동 월드컵 개최 때까지 단계적인 개방을 계속해 나갈 방침이다. 앞으로는 개방에 따른 우리 산업의 부정적인 효과에 집착하기보다는 일본시장을 좀더 적극적으로 파고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문화산업의 대외 경쟁력을 확보하고 해외 마케팅에 주력하는 등 정부와 업계 공동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책개발원이 보고서 제작을 위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 동안 일반 국민의 3분의 1 정도가 일본 대중문화를 실제로 경험했고, 앞으로는 극장용 애니메이션 개방에 대한 기대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추가 개방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개방 수위와 대상 선정에 고심하는 동안, 관련 업계에서는 앞으로의 개방에 대비해 문화상품의 수입 및 수출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쉬리’의 일본 흥행 대성공으로 강제규감독과 배우 한석규는 일본에서도 스타 대접을 받게 됐다. 한석규 주연의 ‘8월의 크리스마스’도 일본 개봉관에서 상영돼 호평받았다. 지난해 한국영화의 대일 수출 총액은 3000만엔(약 30억원)을 상회하는 수준.

    영화 수입업자들의 일본영화 사재기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수입업자들이 일본영화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할리우드 영화보다 쌀 뿐만 아니라 정서의 유사성으로 흥행 가능성이 높다는 기대 때문. 일각에서는 과열 수입경쟁으로 인한 가격 인플레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휴종박사는 “전면 개방 초창기에는 일본영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시장점유율(15% 내외)을 차지할 것이지만, 점차 줄어들어 종국적으로는 오늘날 홍콩 영화 정도의 점유율(7%)로 감소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콘텐츠의 우수성으로 인해 개방시 파급 효과가 상당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음악

    그동안은 재즈 경음악 테크노DJ 등 가사가 없는 음반에 대해서만 수입이 허용됐으나, 음반사들은 일본 가수가 영어로 부른 노래에까지 개방이 확대될 것을 기대하며 음반을 준비하고 있다. 소니 뮤직은 ‘라캉 시엘’ ‘시암 세이드’ 등의 영어 노래를 모은 앨범을 낼 계획이고, EMI 코리아도 일본 최고의 여가수 우타다 히카루의 영어 음반을 낼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공연의 경우, 2000석 규모에서 대폭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국내 공연업계들이 우타다 히카루, 아무로 나미에, 그룹 ‘글레이’ 등의 내한 공연을 추진중이다.

    소니 뮤직의 이 혁씨(일본음악 담당)는 “그 동안 제일 많이 나간 일본 앨범도 판매량 1만장 정도로 미비한 수준이었다. 인기 가수들의 앨범이 발매되면 대폭 늘어나겠지만 우리도 단계적 개방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갑자기 밀려들어오면 거부 반응을 일으켜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한편 일본에서의 한국음악에 대한 관심도 점차 높아지는 추세. 일본의 대형 레코드 가게에 한국음악 코너가 설치되고 S.E.S의 음반은 10만장 정도가 팔려나갔다. 일본의 대중음악 업계는 인맥이나 업체간의 카르텔 체제가 심해 아시아권 가수가 들어가서 성공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Y2K 등 한일 합작 밴드를 만들어 양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방송은 개방에 있어 가장 ‘뜨거운 감자’로 얘기된다. 안방에서 TV를 통해 바로 접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일본의 스타들이 ‘뜨면서’ CF-음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최후에 개방한다’는 원칙을 세워둔 상태.

    방송 관계자들은 일본문화 개방으로 인해 방송사에 만연하던 ‘표절’ ‘베끼기’ 문화가 많이 없어졌다고 입을 모은다. SBS의 경우 원작을 사와서 문제의 소지를 없애는 노력을 시작했고, 포맷을 들여오더라도 프로그램의 한 코너로 활용하거나 우리 식으로 각색하는 형태가 됐다. 물론 “예전보다 표절의 방법이 더 교묘해졌다”는 비판도 많다.

    한일 양국간의 공동 제작 움직임도 활기를 띠고 있다. MBC 프로덕션과 일본 TBS는 2002년 월드컵을 기념하는 4부작 드라마를 공동 제작해 월드컵 기간 중 양국에서 동시에 방영하기로 했다. 이 드라마에는 양국 배우는 물론 프로듀서, 작가, 미술, 기술 등 모든 스태프가 공동으로 참여한다. 제작비는 총 18억원 규모로 이 역시 양측이 공동 부담한다.

    KBS 외주제작국 김성묵주간은 “위성 등을 통해 일본방송이 우리 시장에 들어온 건 이미 오래됐다. 개방이 되더라도 언어 문제 등이 있어 폭넓은 시청자 층을 확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제가 되는 저질문화는 어차피 지하로 들어와 유통되는 것이므로 방송 개방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출판

    조악하게 번역되고 인쇄되어 무분별하게 유입되던 일본만화는 이제 정식 계약을 통해 국내에 들어온다. 일본 서적의 중개 업무를 담당하는 신원에이전시 김상영회장은 일본문화 개방 훨씬 전부터 저작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일본시장을 접촉, 현재는 연간 600∼700종의 만화, 실용서, 학습지 등 일본 출판물을 국내에 소개하고 있다. 그는 만화 ‘드래곤볼’이 16종의 해적판으로 돌고 있을 때 서울문화사가 일본 출판사와 정식 계약을 맺도록 다리를 놓았다. 역으로 ‘조선어사전’을 일본에 판매했고, 만 8년에 걸친 준비 끝에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일본 3대 출판사 중 하나인 ‘슈에이’에서 좋은 조건에 출간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김회장은 “‘태백산맥’이 올 6월에 일본에서 완간됐는데, 이를 통해 한국문화에 대한 인식이 격상됐다는 평을 들어 기쁘다. 일본 출판사들에 우리나라 작품에 대한 자료를 지속적으로 보내고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세계의 바이어들한테 소개하는 작업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작가의 만화 작품도 일본 만화잡지에 실리고 있다. 한국을 찾은 일본 만화잡지 편집자들이 한국의 우수한 만화를 접하고 계약을 맺어 일본 잡지에 연재하는 것. 일본문화평론가 김지룡씨가 운영하는 ‘스튜디오 놀다’에서도 양경일의 만화 ‘아일랜드’로 일본진출을 시작했다. 단편으로 시작해 내년부터 장편 연재를 하기로 했는데, 잡지에 실린 총 15편 정도의 만화 중 ‘아일랜드’가 독자엽서 인기순위 2위에 올랐을 정도로 반응이 좋다고.

    김지룡씨는 “일본 업계는 얽히고 설킨 인맥관계와 카르텔 등으로 진출이 쉽지 않은 만큼 지속적인 신뢰 구축 작업이 중요하다. 단순히 이 영화 좋다, 이 음악 좋다 하는 것으로는 안된다. 홍보 및 프로모션을 통한 붐 조성, 유통망 구축 등의 과제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이제 처음의 우려에서 벗어나 차츰 대일 문화상품 수출의 기회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 대중문화의 대일 수출 및 흥행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본 업계들도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우리 문화상품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소프트웨어의 우수성’ 확보에 대한 문화계 노력과 정부의 실천적인 뒷받침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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