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4

2000.05.18

부모 아픔 보며 10년, 한숨 들으며 10년

오월 광주의 상흔 가슴 속 대물림…“역사의 고통 언제나 잊힐까”

  • 입력2005-11-07 11:5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부모 아픔 보며 10년, 한숨 들으며 10년
    5·18둥이’는 광주에서만 통용되는 고유명사다. 정확히 따진다면 5·18둥이는 1980년 5월18일생이어야겠지만, 광주에서는 핏빛 함성으로 물들었던 80년에 태어난 아이들을 이렇게 부르고 있다.

    어엿한 스무살의 대학생으로 성장한 이들 가운데는 5·18 당시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부상했거나 모진 고문을 당했던 피해자의 자녀도 있다. 이러한 5·18둥이는 모두 20여 명이다.

    이들이 보는 ‘오월 광주’와 그 속에 감추어진 부모의 상흔은 이들 가슴 속에 어떤 멍울로 남아 있을까.

    광주 북구 신안동에 사는 5·18 부상자 이추자씨(43·여)의 딸 최효경양(광주여대 무용과 2년)은 올해 5·18 기념재단에서 주최하는 20주년 기념행사에 자원봉사자로 나섰다. 살육의 현장에서 질기게 태어난 생명의 의미와 그 속에 싹튼 인연의 참뜻을 되새겨보기 위해서였다.

    그해 5월22일 오후, 임신 3개월이었던 최양의 어머니 이씨는 광주 서구 화정동 단독 주택 2층에서 요란한 총소리에 놀라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 순간 그녀는 계엄군이 쏜 탄환 파편을 맞고 넘어졌다. 곧이어 집으로 몰려온 무장 군인들이 “집안에 숨어 있는 폭도를 내놓으라”며 집안 곳곳을 뒤질 때쯤 이씨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씨는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수술을 받고 한달여 동안 입원했는데, 그녀는 ‘환자’이기보다는 ‘폭도’로 취급받았다. 임신부의 몸으로 보안대(기무사의 전신) 군인들의 무자비한 구타를 견뎌내야 했다.

    이씨는 지난해 남편과 이혼하고 월세 5만원짜리 단칸방에서 아들(고3), 딸과 어렵게 살고 있다. 얼마 전에는 교통 사고까지 당해 지금은 아무런 수입도 없이 병원신세를 지고 있다.

    “어려서부터 ‘너는 총을 맞고도 죽지 않고 태어났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땐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왜 시민들이 총을 들고 그렇게 민주화를 외쳤는지….”

    이씨의 딸 최양의 말이다. 최양은 자원봉사자로서 5·18묘지를 찾는 참배객들에게 그날의 의미를 알려주는 일을 하고 있다. 최양은 “5·18 의미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80년 당시만 해도 광주시 남구 진월동은 농촌 지역이었다. 그해 5월24일 오후 1시쯤 논일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쉬던 노득기씨(53)는 콩볶는 듯한 총소리를 들었다. 군대 시절 경험이 생각난 그는 “이거 총소리 아닌가베”하고 방에서 일어서다가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총탄에 오른팔과 옆구리를 다쳤다. 노씨가 갑자기 피를 흘리자 부인 박종단씨가 깜짝 놀라서 달려왔다.

    당시 박씨는 9개월 된 큰딸(노주미)을 키우고 있었고 그의 뱃속에는 4개월 된 태아(노주원)가 자라고 있었다. 박씨는 다급한 김에 큰딸이 쓰는 기저귀를 찢어 남편의 상처를 지혈했다. 다행히 남편은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었다. 노씨가 큰길 가로 나서자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이 위협 사격을 가했다. 깜짝 놀란 노씨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뒷 울타리를 넘어 기독병원으로 달려갔다.

    노씨의 몸에는 그때 박힌 총탄이 그대로 박혀 있다. 총알이 그의 오른팔 뼈에 부딪혀 박히면서 그때 생긴 파편이 오른쪽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이런 상태로 노씨는 지난 20년을 살아왔다. 아버지가 총알을 맞던 날 엄마 뱃속에 있던 주원(목포대 컴퓨터공학과 2학년)이는 어엿한 장부로 자라나 올 가을 군에 입대할 예정이다. 주원군은 아버지 몸에 총알이 박혀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광주항쟁’ 비디오을 보고 ‘같은 민족끼리 저럴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주원군은 “그 당시 광주에 있던 군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나도 군에 가지만, 군대는 계급사회다. 당시 부하들은 진실이 뭔지도 모르고 상관의 명령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절대 국민을 학살하는 군인은 되지 않겠다. 국민을 지켜주는 그런 군인이 되겠다.”

    5·18광주민중항쟁부상자회를 이끌고 있는 박영순회장(47)도 80년 12월6일에 태어난 아들 형준군(조선대 독일어과 1년 휴학)을 두고 있다. 박회장은 80년 광주보건전문대 2학년 2학기 복학을 준비하다 5·18을 맞았다.

    간헐적으로 시위가 벌어지던 15일부터 시내를 배회했던 그는 21일 금남로 시위 때 화물트럭을 타고 참여했다가 오른쪽 발목에 총탄을 맞았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도청 앞으로 다가섰을 때다. 총소리가 들려 처음에는 공포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옆에 있던 시민들이 푹푹 쓰러져 아차 싶어 도망치려다 나도 발목에 관통상을 입었다.”

    박회장은 “지혈을 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혼자서 옷을 찢어 오른쪽 허벅지를 묶었다”며 “군대에서 위생병으로 근무했던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것 같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광주기독병원에서 6개월 가량 치료를 받다 쫓겨나다시피 퇴원했다. 그리고 1년간 목발을 짚고 생활해야 했다. 1982년 8월 광주항쟁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살벌한 때에 그는 14명의 회원을 규합해 어렵사리 부상자회를 결성했다.

    박회장의 아들 형준군은 “아버지가 부상자이지만 실은 고교를 졸업할 때 까지만 해도 5·18에 대해 잘 몰랐다. 아버지가 그때 일을 얘기해 주신 적도 없었다”고 말했다. 형준군은 올 3월 아버지가 공수부대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는 것을 보고 5·18에 대해 나름대로의 시각을 갖게 됐다고 한다.

    “아버지가 지난해 4월 시민들을 무참히 짓밟은 공수부대를 찾아 화해와 용서의 자리를 갖는다고 했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TV에서 공수부대원이 휠체어에 탄 부상자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아버지의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정동년 광주 남구청장(57)의 둘째 아들 재철군(광주대 언론정보학부 1년 휴학)도 5·18둥이다. 정구청장은 80년 당시 군부로부터 ‘광주사태’를 배후 조종한 인물로 찍혀 대법원에서도 사형 확정 선고를 받았던 ‘5·18의 산증인’. 올 9월 군에 입대하는 재철군의 말이다.

    “신문-방송에서 다루었던 5·18 특집물을 보면서 왜 시민들이 피로 ‘광주’를 지키려고 했는지를 알게 됐다. 그 항쟁의 무대에 아버지가 계셨다는 것이 지금은 무척 자랑스럽다. 가정에 소홀한 아버지에게 서운한 마음이 많았지만 당시 ‘투사’였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5·18둥이들은 80년 5월의 광주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그날의 비극을 자식들에게 일부러 알리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20년의 세월 동안 그날의 진실이 조금씩 밝혀지고 나름대로 명예회복도 돼 더 이상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한 탓이다.

    당시 피해자들은 요즘 한가지 고민에 싸여 있다. 5·18행사 때 자원봉사자들과 시민들의 참여가 줄어들어 그날의 의미가 퇴색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것.

    그래서 상징적인 의미로 5·18둥이들로 자원봉사팀을 꾸리기로 하고 봉사자를 모집하고 있다. 그러나 남자 아이들은 대부분 군대에 갔거나 입대 예정자여서 3년 후에나 모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20년 회한의 삶이 자식 세대에서는 희망의 역사로 쓰이기를 고대하고 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