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8

2000.04.06

줄서! 문화판도 줄줄이 줄-줄-줄

미술 음악 무용-학맥간 알력, 영화-강우석라인 vs 제일제당라인, 문학-문지파 對 창비파 등 파벌 심각

  • 입력2006-04-25 1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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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서! 문화판도 줄줄이 줄-줄-줄
    시인 최영미씨가 최근 펴낸 산문집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사회평론)에서 자신의 작품을 신랄하게 비판해온 평론가 김정란교수(상지대)에 대해 공개적 반박을 시도해 화제를 모았다. 김정란교수는 그동안 몇몇 대형 출판사들이 ‘인기 작가’를 간판으로 내세워 유력 언론들과 상업적으로 결탁해 왔다고 비판하며, 그 대표적 예로 창작과비평에서 시집을 펴낸 최영미시인을 거론한 바 있다. “창비가 (최영미시인의) 부실한 시집에 창비의 이름으로 문학적 아우라를 씌워 한국 시단 전체를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것.

    최영미씨는 이에 대해 자신은 ‘상업적인 작가’이긴커녕 “줄 서는 걸 싫어해 문단 내의 어떤 권력집단과도 가까이 지내지 않고 외톨이로 살았다”고 항변했다. “대한민국의 문학판이 썩은 건 문학을 권력의 수단으로 알고 자기들끼리 모여 서로가 서로에게 상을 주고 출판기념회다 심포지엄이다 자기도취에 빠진 우물 안 개구리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교수가 최씨를 예로 들어 비판한 ‘일부 문학권력의 상업주의’를, 최씨는 “도리어 나야말로 문단 내 권력을 멀리한 탓에 공격받은 피해자”라고 맞받아친 셈이다.

    두 여성문인 사이에 오고간 ‘분파’ 혹은 ‘문화 권력’ 논쟁은 우리 문화계의 권력구조, 혹은 ‘파벌주의 문화’의 현주소를 한 번쯤 되짚어볼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과연 우리 문화계에는 어떤 파벌이 형성되어 있고, 이들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우선 문학계의 경우를 보면, 최근 수년 동안 몇몇 동인지 중심의 ‘에콜’(유파)을 둘러싼 ‘섹트주의’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돼 왔다. “밖에서는 (‘문학과 지성’이나 ‘창작과 비평’의 동인모임을) 좋은 의미의 ‘연대’라기보다는 나쁜 의미의 ‘패거리’로 보고 있으며, 또 그 패거리의 위력을 절감한 나머지 너도나도 패거리 만들기에 골몰하고 있는 형국”(전북대 강준만교수, ‘인물과 사상’11호), “우리 문학판의 마피아적 구조는 20대 40의 구조, 즉 소통 담론의 파시즘 문화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 (문학평론가 신철하, ‘문예중앙’ 99년 여름호) 등의 강도 높은 문제 제기도 있었고, “일부 에콜은 자기 원칙을 저버리고 상업주의로 빠져들고 있다”(문학평론가 권성우)는 지적도 들려오고 있다.



    ‘문학관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일정한 공동 생산과 비판의 통로를 유지하는 것’을 두고 ‘패거리’ 라고까지 보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는 견해도 만만찮다. ‘섹티즘의 당사자’로 지목되어온 ‘문학과지성사’ 의 채호기사장은 “에콜이란 배타적인 권력 개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유파’일 뿐이다. 어느 나라, 어떤 문화 장르에서건 유파는 존재해 왔다. 유독 우리 문학판에서 그같은 현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려 하는 것은 문학을 정치권력과 동일시하는 왜곡된 시각 탓”이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이같은 견해 차이를 두고 ‘파벌주의’라는 부정적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는 지적도 많다. 문학계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주로 문학적 생산물의 유통과 수용구조의 문제에 대한 담론이지 금전적인 이권다툼이나 행정적 자리싸움, 연고주의 등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는 얘기다. 또 서울대 국문과나 불문과, 중앙대, 동국대, 경희대, 서울예대 등 몇몇 ‘명문’ 출신들이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지만 배타적 ‘파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상이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것은 오히려 미술계 쪽이 심각하다. 우리 미술계에 서울대-홍익대 학파간의 미묘한 알력, 혹은 이 두 학교와 기타 학교 출신들의 갈등관계는 수십년째 미술계가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 있다. 최근 벌어진 한국미술협회(이하 미협)의 ‘두 사람의 이사장 싸움’도 이같은 갈등이 누적되어 폭발한 사건. 전임 이사장 박석원씨가 애초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서예 분과로부터 문인화 분과 분리 신설 △서울지회 인준 △전국회원 참정권 여부 등의 협회개정안 이행을 유보하겠다고 발표하자 이에 반발한 회원들이 김선희 서양화분과회원을 새 이사장으로 선출하게 된 것이 이번 사건의 개요다.

    “겉으로는 공약 불이행, 그 중에서도 지방 회원의 이사장 선거권 문제로 가시화되고 있지만 사실 이번 사태는 그간 미협에 누적되어 온 모순, 즉 서울대 홍익대 등 특정대학 출신 회원들의 요직 독점과 미협 재정의 파행 운영 등이 빚어낸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한 미술관계자의 말이다.

    미술계는 또한 60, 70년대 친 정부적인 태도를 보인 ‘제도권 작가’들과 민중미술계 출신 작가들 사이의 불화도 완전히 진화되지 않은 상태다. 최근에는 80년대 진보적 활동을 펼쳤던 최민 현 한국예술종합학교영상원장이 2000광주비엔날레 총감독으로 인선되었다가 광주시와의 대립으로 해임되고, 그 뒤를 이어 보수 성향이 강한 오광수씨가 후임 총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미술계 내부가 진통을 겪기도 했다.

    영화계는 김지미씨가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영화인협회’와 문성근 명계남씨 등이 주도해 만든 ‘영화인회의’로 크게 갈린다. 충무로 토착자본과 비교적 친 제도적 성향을 지닌 영화인들이 모인 영화인 협회는 진보적 성향의 영화인들이 모여 영화인회의를 결성하는 과정에서부터 민감한 반응을 보여 왔으며 스크린쿼터제, 영화법 개정, 등급외 전용관 설치, 영화진흥위 설립 등의 사안을 둘러싸고 사사건건 대립해 왔다. 양 단체는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영화진흥위원회 인적 구성을 놓고 어느 편 목소리가 더 많이 반영되는지 팽팽한 힘겨루기를 벌이기도 했다.

    이같이 뚜렷한 입장을 대변한 단체활동과 별개로, 현재 영화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는’ 곳은 강우석감독 라인과 제일제당 엔터테인먼트라는 것이 한 영화관계자의 이야기. 이 경우 작품에 대해 뜻을 같이해서라기보다 ‘극장을 많이 가진 실세’에 의탁한다는 실리적인 이유가 크다.

    하지만 영화나 연극계는 특정 인물이나 출신학교를 둘러싼 파벌문제가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라는 게 일반적 시각이다. “영화나 연극(그리고 문학)은 초-중-고 과정에서 실기 조기교육이 행해지지 않고, 따라서 대학입시 과정에서도 이권이 개입될 여지가 없기 때문에 파벌, 혹은 줄서기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영화평론가 이영미)는 것.

    반면 음악 무용 미술 분야 등의 경우 ‘출신학교 파벌’이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미술계는 앞서 언급한 대로 서울대-홍익대 학파가, 무용계는 이화여대 출신이 커다란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 국악계는 국립국악고-서울대 중심 학파와 국악예고-중앙대 중심의 학파가 확연히 양립하는 형편이다.

    이들 분야는 어릴 때부터 실기레슨을 받아야만 대학진학이 가능하고 해당 분야에 전문가로 진출할 ‘자격’을 따낼 수 있다. 좋은 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교수에게서 레슨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대학입시에 유리하다는 얘기다. “대학진학 뒤에도 해당 분야에서 연주활동을 계속하거나 교수로 진출하려고 할 경우 ‘아무아무 선생님의 제자’라는 타이틀이 없이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게 한 클래식 연주자의 고백이다. 음악이나 무용 분야에서 유난히 대입 실기채점 비리니 불법 레슨문제가 자주 불거져 나오는 것도 결국 ‘힘있는 선생에게 줄서기’라는 파벌문화의 소산인 셈이다. 이렇듯 분야에 따라 정도와 양상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문화계는 파벌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다.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는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유형 무형의 ‘권력’을 둘러싼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또한 특정한 목표 관철을 위해 예술인들이 집단적 세력화를 꾀하는 것을 무조건 싸잡아 비난할 수도 없다.

    하지만 예술가가 자신만의 올곧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집단으로부터의 소외’를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특정 문예지와 출판사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나홀로 노선을 걸어온 지난 몇 년간 어려움도 많았다. 하지만 그같은 ‘독립적 활동’을 높이 사서 내 글을 신뢰하는 독자들도 적잖다는 것을 이즈음 실감하고 있다. 그들의 신뢰는 늘 나를 긴장시키고, 최선을 다해 글을 쓰게 만든다. 나는 앞으로도 ‘왕따’를 자처하려 한다”는 문학평론가 권성우씨의 고백은, 그런 점에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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