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3

2000.03.02

“다 떠나네… 에잇, 난 뭐야!”

벤처 이직 열풍 속 ‘남은 자’들 박탈감·업무과부화 이중고…“난 쭉정이 인간인가” 회의도

  • 입력2006-02-03 14: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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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떠나네… 에잇, 난 뭐야!”
    “에잇, 나도 회사 관둬버릴까?” “그런데 뭘 해서 먹고 살지?”

    지난해 하반기부터 직장인들의 이직열풍이 시작된 이래 또하나의 집단증후군을 앓는 현장이 있다. 바로 ‘엑소더스’에 동참하지 못한 ‘낙오자’들이 겪는 마음앓이의 현장이다.

    “××부 ×과장도 나간대.”

    “누구는 어디로 가서 스톡옵션 얼마를 받았다는데….”

    “어디어디로 옮긴 누가 전화했는데….”



    요즘 어느 직장이건 여유있는 시간이면 또래 동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이런 얘기를 하는 장면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미지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동료들을 보며 조직에 남은 직장인들의 엉덩이가 들썩일 수밖에 없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

    언론사에 근무하는 S씨(34)는 요즘 고민에 쌓여 있다. 얼마 전 다른 회사로 자리를 옮긴 후배가 빈 자리가 많으니 옮겨볼 생각이 없느냐고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분야가 달라 아예 생각지도 않은 자리였는데, 이 기회에 직종을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다. 더구나 새로 시작하는 업체들의 경우 ‘인재난’이 아닌 ‘인력난’을 겪는다고 하므로 도전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S씨는 얼마 전 벤처기업으로 옮긴 처남이 수억원대 스톡옵션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나서 더욱 쫓기는 기분이 든다고 한다. 아내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회사로 옮겨가지 못하는 자신이 무능하고 뒤떨어진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이야기다.

    회사를 떠난 사람들이 수십억대의 스톡옵션, 수억원대의 연봉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속이 쓰리고 상대적 박탈감마저 드는 것도 인지상정.

    “이런 얘긴 ‘쏘주’ 마시면서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문을 여는 삼성SDS 직원 P씨(36)는 “벤처기업의 가능성을 얕봤던 동료들끼리 ‘저렇게까지 뜰 줄 몰랐다’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고 말한다.

    한진투자증권 Y대리(35)는 “다른 길을 찾는 주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초조해진다”고 말한다. “얼마 전 신문에서 보니 잘나가던 국제변호사가 연봉이 훨씬 적은 야후코리아에 입사하면서 ‘혁명의 대열에 동참하기 위해’라고 얘기했다던데 ‘그럼 그 대열에 끼지 못한 나는 뭔가’란 생각이 들더라”고 말하는 그는, 벤처 업계에서 유행한다는 “30대 초반에 10억원 벌지 못하면 바보”란 얘기를 들으면 더욱 심란해진다고 말한다.

    갑자기 빈 자리를 메우느라 늘어난 업무에 헉헉댈 수밖에 없는 현실도 ‘살아남은 자들’의 또다른 비애. 삼성물산 전자상거래 파트에서 일하는 K대리(32)는 “15~20%의 사원이 빠져나갔고, 아직도 이직 바람은 끝나지 않았다. 특히 가장 많이 일할 계층에서 인력 유출이 이뤄진다는 게 문제”라고 말한다.

    벤처 엑소더스의 최대 피해자는 해당업계 대기업들. 대기업 종사자들의 이탈현상은 대기업이란 메리트가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삼성전기 직원 C씨(37)는 분석한다. “전에는 어딜 가건 모 기업에 다닌다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지금은 그런 이점이 다 사라졌다”는 얘기다.

    최근 창사 이래 유례없는 젊은층의 사직 러시를 겪은 모 언론사 기자 M씨(39)는 “자부심 하나로 먹고 살던 이 회사로서는 상징적 의미가 큰 사건이다. 이제 이 회사에 희망이 없다는 얘기”라며 심란해한다.

    젊은층의 사직 러시는 사원들이 회사에서 정신적으로 ‘독립’해 버렸음을 의미한다. 요즘 젊은 샐러리맨들은 더이상 대기업을 평생직장으로 여기지 않으며, 살아남아 ‘영화’를 누리겠다고 생각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형성된 데에는 IMF사태와 그로 인한 구조조정 경험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회사가 어려워졌다고 가차없이 사람을 자르던 회사의 행동을 보며 이미 회사에 대한 신뢰를 잃은 지 오래라는 것. LG-EDS 사원 Y씨(34)는 “내가 일하던 사업부에서는 90명 중 50명이 남았다”며 “업무는 과중해졌지만 그렇다고 더 보상해주는 것도 아니고, 늘어난 업무를 재조정해 줄 기미도 안보인다”고 호소한다.

    벤처기업으로의 엑소더스 바람을 맞고 있는 것은 언론사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벤처 열풍이 일면서 정보통신부 기자실은 크게 술렁거렸다. 정보통신부 김인식공보관은 “출입기자 70여명 중 열댓명 정도가 언론사를 그만두었다”고 소개한다. 최근 모 언론사에서는 젊은 기자 4명이 한꺼번에 인터넷 주식사이트를 운영하는 업체로 자리를 옮겨 사내에 충격을 던졌다. 다른 언론사도 정보통신 관련 기자들의 대대적 퇴직바람이 일기는 마찬가지.

    남아 있는 사람들이 퇴직 동료들을 보는 시각도 제각각. 미련없이 훌훌 털고 떠나는 후배를 보며 “어떻게 키워놨는데…”식의 배신감을 토로하는 상사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동료 입장에서는 “가는 사람을 매도할 수도 없고, 남은 사람이 잘한 것도 없다”는 게 대체적인 반응이다. 현대종합상사에 근무하는 L씨(37)는 “알맹이는 가고 쭉정이들만 남은 것 같아 불안하다. 나도 옮겨볼까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 번은 하지만 마땅히 대안이 없다”고 고백한다.

    ‘아직 떠나지 못하고’ 대기업에 남아 있는 잔류파들도 다시 현상유지파와 판단유보파, 준비파로 나뉜다.

    요즘 뜨거운 이직 열풍과는 관계없는 분야에 종사하는 쌍용화재 H과장(40)은 별 수 없는 현상유지족이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가차없이 잘려나가는 선후배 동료들을 보며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었는데…”라며 말문을 연 그는, “그저 부러울 뿐이다. 20대 80의 사회에서 갈 데 없는 80 중 하나로 남는 것 같아 비애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렇게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보상심리가 작동한다. 쥐꼬리만한 비자금을 주식시장에 넣어두고는 매일매일의 시황에 가슴 조리고, 인터넷 경품사이트를 기웃거리며 ‘대박’을 꿈꾸거나, 복권을 사서 박박 긁어보기도 한다.

    지난해 이래 전사원 5000명 중 10%가 빠져나간 것으로 알려진 삼성SDS의 입사 6년차인 K씨(34)는 판단유보파. “먼저 간 동료들로부터 벤처기업으로 옮기라는 오퍼를 받았지만 그 회사의 노동강도나 성공 가능성을 생각해보니 회사에 남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한다. “컴퓨터프로그래밍 등 벤처에서 필요로 하는 분야는 10대나 20대에 가장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다. 30대 후반이면 벌써 정년에 해당하는데 직장을 옮겨도 적응하지 못할 것에 두렵다”는 것.

    역시 삼성SDS 입사 3년차인 Y씨(31)도 ‘판단유보’ 중. “업종 특성상 오퍼가 많이 오는 편이다.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본다.” 그는 지금의 벤처 열풍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모 잡지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Y씨(34)는 한달 전부터 웹디자인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앞날이 그리 밝지 못하다는 인쇄매체 대신 그가 준비중인 직업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디자인하는 웹디자이너. “전에는 ‘웹디자이너 모집’이었던 채용광고가 요즘은 ‘디자이너 출신 웹디자이너 모집’으로 바뀌었다”며 디자이너 출신 웹디자이너라는 강점으로 벤처기업에 도전해 볼 생각이라는 그는, “그만두더라도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니 직장에서도 위축되질 않는다”고 말한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을 가려던 삼성물산 K대리(32)는 지난 1월 사내 공모를 통해 사내 벤처팀 격인 토털솔루션팀으로 옮긴 뒤 생각을 바꿨다. “사내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공부도 할 수 있으니 이보다 행복한 일이 있겠느냐”는 것. 하지만 K대리도 회사에 영원히 남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1, 2년 경력을 쌓아 훗날을 기약하겠다는 생각이다.

    산업구조의 변화와 함께 고용관행도 크게 변화하고 있다. 이 거대한 변화에 대처하기 힘든 것은 경영주들도 마찬가지. 우선은 남은 사람들 다독이고 관리하는 게 급선무다. 삼성경제연구소 강우란박사는 “한국기업들은 처음 겪는 일이라 당혹스러울 수 있지만 마이크로소프트나 인텔 등의 유명 대기업도 늘 인재 유출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재 유출을 얼마나 줄였는지가 임원급에 대한 인사평가의 기준이 될 정도”라고 소개한다.

    그는 “개인마다 특성에 따라 일할 자리를 선택하는 때가 곧 올 것”이라고 말한다. 돈벌이를 중시하고 단타를 좋아하고 순식간에 확 뜨고 싶은 사람은 벤처기업, 장타에 익숙하고 인생의 작은 즐거움들을 맛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대기업을 택하는 식으로 정리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직장인들의 정신건강을 연구하는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박사는 흔들리는 직장인들에게 “변화가 대세라면, 차제에 자신이 어떤 직장에서 어떤 일을 하는 게 좋을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판단해보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성공이란 무엇이고 행복은 어디서 오는지를 제대로 정립하지 않고 일시적 흐름에 휩쓸리다 보면 언젠가는 또다시 흔들릴 수 있다고 충고한다.

    공무원보다 ‘돈무원’이 좋다

    산자부 정통부 직원들 벤처 진출 바람… 퇴근 뒤엔 대부분 이직이야기


    벤처 이직바람이 공무원 사회에도 솔솔 불고 있다. 특히 이 바람이 거센 곳은 벤처 창업 등과 관련이 깊은 산업자원부와 정보통신부. 산업자원부의 경우 지난해 하반기부터 구본룡 산자부 전 산업기술국장, 이홍규 이사관이 벤처기업으로 자리를 옮기는 등 일찌감치 벤처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95, 96년 PCS사업자 선정 당시 대대적인 인력유출이 있었던 정보통신부의 경우는 최근까지 잠잠했던 편.

    그런데 최근 들어 정보통신부를 이끄는 선두주자격 중진들이 벤처진출을 위해 사표를 던져 충격을 줬다. 얼마 전 정보통신부 강문석 지식산업과장이 삼보컴퓨터에서 출자한 벤처기업 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데 이어 2월17일 공종렬 국제협력관마저 벤처기업 창업을 위해 사표를 제출한 것.

    이보다 앞서 한국전력이 모집한 정보통신 분야 자회사 파워콤 직원모집에는 정통부 6급직 가운데 25명이 응모, 그중 4명이 자리를 옮겼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정보통신부의 한 공무원은 “근무시간에야 그렇지 않지만 식사시간이나 퇴근 뒤 술집에서는 상당히 뒤숭숭하다”고 분위기를 전한다. ‘누가 나간다더라’ ‘그때 한통프리텔로 간 누구는 스톡옵션으로 지금 20억원을 벌었다더라’는 얘기들이 주종을 이루고 “그때 나도 갈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목소리도 상당하다고 한다.

    정보통신부 모 사무관(35)은 “이는 당연한 현상이지만 공무원의 속성상 대규모 인력 이동은 없을 것” 이라고 전망한다. “민간기업과 공무원의 경우 직업의 안정성이나 추구하는 바의 차이가 있기 때문” 이란 설명이다. ‘자신감 결여’도 공무원 이직을 망설이게 하는 또하나의 요인. 이직에 대해 얘기하다가도 “가서 그 고생하면서 일할 자신이 없다”는 얘기로 귀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것.

    그러나 민간과 공무원 사이에 보상의 격차가 지나치게 커지고 공무원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게 그의 걱정이기도 하다.


    “대기업에서도 사람값 달라질 겁니다”

    인센티브제 도입·사내 벤처 권장 등 모색… “인력 공동화 없을 것”


    사상 유례없는 인재유출을 겪는 대기업들은 어떤 대처방안을 세우고 있을까. 기업 인재관리와 인력개발에 대한 연구를 담당하는 삼성경제연구소 이정일수석연구원의 얘기를 들어본다.

    기업마다 인재유출 러시다. 대기업에서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가장 당면한 과제는 보상문제일 것이다. 외부 시장에서 제시하는 보상수준에 상응하는 보상체계를 통해 유능한 인재를 잡아놓는 방안이 강구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최근 기업마다 인센티브제, 이익공유제, 프로젝트 인센티브 등의 방안을 마련중이다. 직장인들에겐 그런 움직임이 피부에 와닿지 않을지도 모르나 조만간 분위기가 확 달라질 것이다. 임금문제만이 인재 유출의 이유는 아니라고 보는데….

    “경직된 인사의 틀이나 개인의 창의성이 발휘될 수 없는 의사반영구조 등도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 또한 앞으로 많이 변할 전망이다. 최근 사내 벤처기업 설립이 이뤄지고 있다. 리스크는 회사가 지고,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면 회사 기여분에 대한 공유를 하는 형태다.”

    벤처쪽으로 인력이 자꾸 빠져나가다 보면 특정 분야의 경우 대기업의 인력기반이 와해되는 것 아닌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외국의 경우도 대기업의 인력 유출이 있은 뒤 다시 인재 보충이 이뤄졌다. 앞으로 대기업의 인력관리는 필요한 인재에 대한 관리와 필요없는 인력의 배제 등 양 측면으로 이뤄질 것이다. 요즘 대기업으로서는 기존에 확보한 인재를 붙드는 문제 못지 않게 새로 들어올 인재에게 얼마나 매력있는 기업으로 보이는지가 ‘발등의 불’이다. 무엇보다 핵심 우수인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문화가 가장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경영진이나 관리자의 의식전환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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